방송인 배성재가 다시금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의 순서 조작과 관련한 해명으로도 주목과 질타를 받았던 그에게 대중은 다시금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4년 전의 그가 중계 시 했던 발언에 대한 사과를 주문하고 있다.
배성재는 SBS 아나운서 재직 시절부터 박진감 넘치는 해설과 특유의 리듬감으로 스포츠 캐스터로서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축구면 축구, 올림픽이면 올림픽, 그의 중계는 종목을 가리지 않고 시청자를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배성재의 진행 능력은 SBS를 퇴사하고 프리 선언을 한 뒤에도 직전 소속 방송국의 스포츠 중계나 각종 예능 프로에 부름을 받을 정도로 정평이 나있었다.
그런 그가 왜 질타를 받는 것은 무엇인가. 유명한 사건이지만 기억을 돕기 위해서 간략히 정리를 해본다.
- 논란의 개요 -
배성재 아나운서에 대한 논란은 4년 전 평창으로 거슬러 오른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그는 파트너 제갈성렬 해설 위원과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팀추월 경기를 중계했다. 김보름, 박지우, 노선영 선수로 구성된 당시 여자 팀추월 국가대표팀은, 앞서 있던 선수들과는 현격한 차이로 뒤쳐져 결승선을 통과한 노선영 선수의 기록으로 8강에서 탈락한 바 있다. 팀추월은 최종 선수의 결승선 통과 기록이 집계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배 아나운서는 “여자 팀추월 종목이 상당히 아쉬움을 남겼다”, “중반 이후 노선영 선수가 많이 처졌음에도 나머지 선수가 먼저 도착하는 최악의 모습이 연출되고 말았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제갈성렬 해설 위원도 “팀추월이라는 경기는 단결력과 협동력, 한 선수가 부족하면 그 선수를 도와주고 끌고 가고 밀어주는 성격의 종목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종목에 대해 아름다운 종목이라 말한다”며 “이런 모습(함께 출전한 김보름과 박지우가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고 노선영 선수가 멀찍이 뒤처져서 한참 뒤 경기를 마친 상황)이 나온 것에 대해서는 선배로서 안타깝고, 앞으로는 도저히 이런 장면이 나오지 않게끔 선수, 지도자들은 생각을 해야 할 것 같다”라고 부연했다.
중계진의 말은 김보름, 박지우 선수가 노선영 선수를 독려하면서 같이 달렸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팀추월 경기에서는 그와 같은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두 사람 모두 유사한 상황에 대한 중계 경험도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배성재 아나운서를 후일 다시 대중이 배성재 아나운서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많은 대중이 이전에 접했던 스피드 스케이팅 종목은 기록을 집계해서 경쟁하는, 비교적 단순하고 직관적인 규칙이었는데 개인도 아닌 셋이 뛰는 단체 경기에, 꼬리잡기라는 복합적 요소가 추가된 팀추월 경기는 처음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혼란스럽기 충분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시청자는 정보의 주도권을 상당 부분 중계진에게 의지하게 된다. 더불어 그것이 중계진의 역할이자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논란의 여파와 전개-
이후 김보름 선수는 인터뷰 태도와 표정 논란까지 더해지면서 국민적 공분의 대상이 되었다. 그 이후의 일은 아주 유명하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김 선수의 자격 박탈 청원이 게시되었고, 6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동의했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올림픽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자신의 SNS 계정에서 김 선수를 거론하기도 했으며, 유명 인사들은 김 선수 비판에 한 마디씩 숟가락을 얹었고 급기야 시사프로그램에서까지 여자 팀추월 경기의 문제점을 다루게 된다.
아주 부끄럽고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김보름 선수를 향한 시선은 다르지 않았다. 본 글을 쓰면서 개인 SNS의 스크롤을 4년 전 기록까지 내려가며 살펴보았다.
다행인 것일까, 관련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4년 전 기록까지 부득불 스크롤 바를 내려가며 찾아봤다는 것은 그만큼 내 안에도 그녀를 향한 불만과 비난의 기억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록에 남아있지 않았을지라도 나 역시 그 시절 여러 사람들과의 자리에서 그녀를 향한 비토의 행렬에 비켜서 있지 않았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여론은 완전히 달라져있다. 여러 조사를 통해서 김 선수는 억울한 논란의 희생양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지난 4년 간의 시간 속에서 김 선수가 마주해야 했던 어려움과 단절감, 무력감과 외로움을 보상할 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대중은 배성재 아나운서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의 시작과 더불어 다른 화제와 논란거리가 끊임없이 생산됐지만, 배성재 아나운서의 김보름 선수 경기 중계 및 관련 발언은 시청자들의 꾸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 배성재의 선택-
지난 2월 19일 김보름 선수가 출전하는 매스스타트 경기에서 배성재 캐스터는 “편파중계는 없었고, 의도성도 없었다. 김보름 선수가 받았던 관심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라는 표현을 남기며 그녀의 경기 중계를 진행했다. 그리고 다시금 여론은 들끓었다.
이 논란을 주목하면서 우선 갖게 된 생각은, 과연 배성재 아나운서가 사과를 한다고 해도 지상파 중계 과정에서 공공의 전파로 사과를 전하는 것이 마땅한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한 편에서 보면 그가 4년 전 했었던 발언이 중계 과정에서였기 때문이므로, 결자해지도 방송에서 해야 한다는 말도 타당하게 느껴진다. 반면에 지상파 전파가 개인의 사과를 위해서 사용되는 것의 적정성이나 정당성에 대한 원론적인 반론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사유로 여겨진다.
물론 이 고민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전술한 바와 같이 배성재 아나운서는 중계방송에서 사과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성재는 왜 사과하지 않았을까?-
자라면서 초등학교 때의 바른생활, 중학교 때의 도덕 시간, 고등학교 때의 윤리 수업 등에서, 아니 굳이 거창하게 교과목을 들먹이지 않아도 부모님으로부터, 어른들로부터 숱하게 들었던 것이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사과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살면서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부분을 인정하는 용기와 진심을 담은 사과를 통해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윤리관은 아주 당연한 진리처럼 반복해서 들어왔던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삶을 살아 살면서 마주한 현실은 가르침과는 다른 경우가 많았다. 유력 정치인들이나 재계 인사들이 잘못이 터졌을 때 퍼뜩 인정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청문회에서는 갑자기 기억상실증에 걸리시는 분들이 속출했고, 아예 답변 자체를 거부하시는 분들도 상당했다. 이런 일들을 빈번히 목도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감당해야 할 사회적 비판과 비난이 훨씬 더 거세질 것을 스스로 예감했기 때문이다. 가장 나중까지 미루고 미루어, 어쩔 수 없는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영리하고 이로운 판단에서 일 것이다. 배운 것과는 충돌하지만, 그야말로 유감스럽지만, 그들의 선택이 이해되는 구석은 있다.
배성재 아나운서 역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사과를 선택했다면, 지상파 중계 전파 적정성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개인 채널이나 SNS 등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사과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마음이거나 혹은 사과로 인한 전략적 유불리를 고려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논란을 바라보는 대중의 심리에 대한 오판-
하지만 배성재 아나운서의 판단이 무엇이든 간에 이번 선택은 오판이었다.
“부당한 중계를 하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은 대중에게 와닿지 않는다. 편파중계가 아니라고 했지만, 대중은 그의 중계를 편파중계로 해석하는 것이 아닌 선동 중계에 대한 부당함과 불편함으로 반응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설득의 힘이 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배 아나운서는 시청자, 그리고 많은 대중의 사과요구의 이면을 살피지 못했다. ‘김보름을 미워하게 선동한 죄에 대한 나에 대한 사과의 청구’라는 대중의 얄궂은 심리 말이다. 배성재 아나운서는 이 부분을 놓친 것으로 보인다. ‘사과하면 지는 것’이라는 관행적/전략적 판단을 선택한 것도 이 사실을 간과했기에 발생한 오판이다.
앞서 전술했던 정/재계 인물들의 사례들에서 대중의 참여는 제한적이다. 여, 야간의 정치공방이나 재계의 부정축제 등의 이슈에 내용에 일반 대중이 참여하는 경우는 많지 않고, 참여한다고 해야 아주 제한적인 수의 사람들이 연루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의 대중은 철저히 배심원의 역할을 할 뿐이다. 이런 경우에는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여론의 향배가 결정되는 속성을 생각해보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고 오히려 치명적이 될 수가 있다. 따라서 이런 땨에는 전략적으로 사과를 하지 않거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효율적인 결과를 도모할 수 있다. 실제의 잘잘못을 떠나.
그러나 이번 논란은 다르다.
많은 대중은 김보름 선수에 대한 비난의 행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지 않은 분들도 물론 있겠지만, 다수의 시청자는 4년 전 함께 그녀를 비판했다. 대중은 이 부분에서 김 선수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감을 갖고 있다. 이 심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주모자를 선별해서 정리해야 과거 비난에 참여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약간의 당위성이라도 확보할 수 있다.
이 경우 대중의 역할은 단순한 배심원이 아니다. 그들은 동조했던 가해자의 일부이기도 하다. 일정 부분 죄책감을 씻기 위한 속죄물로 가장 적당한 인물은 배성재 아나운서였다. 만약 대중의 심리를 배성재 아나운서가 보다 면밀히 살폈다면 2/19일 그의 발언은 달라졌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
김보름 선수가 겪었던 모든 어려움을 배성재 아나운서의 책임으로 몰아가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했던 발언들이 시청자들을 선동하거나 자극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도 곤란할 것이다.
방송인으로서의 사회적 기능과 책임에 대해 배성재 아나운서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감히 전하고 싶다. 더불어 그가 선택한 반응은 감정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지혜롭지 못한, 효용성마저 현저히 떨어지는 선택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도 전하고 싶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배성재 아나운서는 자신의 라디오나 유튜브 등을 통해서라도 김보름 선수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를 전하는 것이 비난에 맞서는 유일한, 그리고 책임 있는 자세일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번 논란을 통해 이슈를 대하는 태도도 되짚어보게 된다. 아무리 확신에 가득할지라도 찬찬히 살펴보는 물러서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 지도 다시금 상고해본다.
더불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면 용서하는 이른바 사회의 '똘레랑스'를 구축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무수한 논란이 있을지도 상상해본다.
다만 비록 아득히 멀리 있다고 해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싶다. 우리 모두가 그 길을 포기하지는 않았으면 싶다. 길은 발로 걷는 것만이 아닌, 어쩌면 마음으로 먼저 내는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우리가 놓지 않기를 소망해본다.
*이 자리를 빌어 힘든 여건 속에서도 세상의 벽에 맞서며 자신의 꿈을 향해 전진했던 김선수에게 사과의 마음과 위로의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