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
화려한 뉴욕을 꿈꾸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오랜만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다시 봤다. 뉴욕이 너무 가고 싶어서 봤는데, 이 영화도 볼 때마다 의미가 더해지는 명작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게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2010년 이전,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그 때는 오프닝곡이 좋다는 것과 패션계는 저렇구나, 하는 것만 대충 알았는데 다시보니 이 영화는 패션이 아니라 일에 대한 얘기라는 걸 알았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를 수 있는 이유는 캐릭터 설정 때문인 것 같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안드레아, 업계에 발을 들인지 꽤 된 에밀리, 그리고 업계 정점에 있는 미란다까지, 입장 다른 세 사람의 모습이 동등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사회초년생보다도 이전의 단계에 있는 대학생으로서 안드레아를 부러워하기도 했고, 에밀리같은 상사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잘러가 되고 싶은만큼 미란다는 내 롤모델이나 다름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인물에 대해 생각을 해보다보니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미란다는 왜 결혼을 했을까?
안드레아는 왜 결국 남자친구를 택했을까?
미란다는 소위 말해 일잘러다. 좀 많이 재수없는 일잘러지만, 그녀에게 당신 재수없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만약 그런다면,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해리포터 원고를 가져와야 할지도 모르니까.
미란다는 자기 분야의 탑으로서, 뉴욕 패션계는 그녀의 손에 달려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식의 양과 깊이, 타고난 센스는 아무도 따라올 자가 없고, 아마 감히 따라오려고 하다가는 벌레 취급 당하고 업계에서 지능적으로 삭제(?)될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미란다의 영향력은 강력하고, 나는 영화를 보며 그런 미란다를 동경했다.
"나만큼 이 일을 잘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게 사실이지." 화려한 명성, 당당한 편집장의 모습 뒤에 숨은 가정 불화와 딸 둘의 엄마로서 느끼는 막중한 책임감, 그러니까 자신의 사생활을 모두 오픈한 풋내기 비서에게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쿨함.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 세례로 걸어들어가며 시크한 웃음을 짓는 미란다를 보면 역시 프로라는 생각, 그리고 어떤 역경이 있든 될 사람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원래는 미란다가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도 없고 남편도 없으니 더 근심없이 일을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만약 정말 미란다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바쁘고 화려한 일상을 지내다가 집에 들어와서 자신을 반겨주는 게 차가운 공기와 집안일 뿐이라면.
사실 나는 비혼에 대한 생각이 확고하다. 이걸 말하면 대부분 페미니스트냐(진짜 거지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페미니스트가 아닌 여성은 있을 수 없다.),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는 질문을 하는데 그냥 난 결혼 제도가 번거롭다고 생각하고 어렸을 때부터 결혼한 내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내 말을 들은 엄마의 반응은 내가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것이어서 큰 깨달음이 왔다.
"친구들은 너와는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이 많을거야. 언제나 곁에 있을 것 같지만 다들 일과 가족이 생기면 멀어질 수밖에 없어."
미란다를 보좌하며 옆에서 바라보는 안드레아는 아마 이런 깨달음의 단계를 이미 넘어섰을 거다. 물론 안드레아라는 가상의 인물이 비혼을 추구하다 생각이 변한건지 그런거야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업계에서 자신에게 더 높은 자리로 가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을 대놓고 유혹하는 데도 생각이 다른 남자친구를 택한 안드레아는 안정감이 절실하다고 느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 여성들이 동경하는 미란다는 모든 걸 가진 것 같아보이지만 사실 그녀를 보좌하고 소일거리를 나눌 사람이 없다면 일상에 차질이 생기는 사람이고, 업계에서는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들이 도사리고 있으며 집에는 그런 미란다에 스트레스 받아하는 남편과 부양해야하는 아이들이 있으니. 노후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아무튼 안드레아라는 인물은 미란다의 삶을 보며 안정감의 필요성을 배운 게 아닐까 싶었다. 그 안정감은 완전한 내 편, 안정적인 연애 상대와 가족의 필요성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고.
일과 개인사가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은 참 슬프다. 무언가를 잘한다고 인정받는 것도 선망과 질타를 동시에 받는 존재가 되는 일이니, 미란다가 익숙하게 여기는 카메라 세례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일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20대 초반이니 아직 10년은 더 지나야 현실적으로 와닿고 진지하게 고민할 소재이긴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그리는 미래는 너무 평탄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시도때도 없이 엄습하는 요즘이다. 나를 둘러싼 현실이 너무 암울해서 도피하려다보니 그런지도 모르겠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면서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될 줄도 몰랐는데, 그래도 지금의 나에겐 일을 잘 한다는 말이 제일 큰 칭찬이다. 결국엔 그녀에게서 벗어나기로 했고 벗어났지만, 미란다에게 능력과 깡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사회초년생의 안드레아에게 큰 힘이 될거다. 나도 내가 매번 정하는 동경의 대상들에게 인정받으며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가고 싶다. 빠르게 적응하고 배울 건 배우면서도 안드레아처럼 삶에 대한 자기 결정은 확실하게 하는. 그게 지금의 내가 꿈꿀 수 있는 일잘러 사회초년생의 모습인 것 같다.
그런데 제일 인정받고 싶은 사람인 엄마아빠한테선 최고의 칭찬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게 갑자기 너무 슬프다. 엄마아빠랑은 일을 같이 할 수 없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