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기억
"혹시 지금 많이 어려우셔요?"
영인의 답변을 기다리던 상담사가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상담사는 연필을 꺼내 들어 상담기록이라고 제목이 크게 적혀있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두었다. 영인은 상담사가 자신에 대해서 무어라 적었는지 궁금함에 시선을 집중해 상담기록 종이를 살펴봤다. 하지만 흘려 쓰인 글씨 때문에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내용을 읽기를 이내 그만두었다. 잠시동안 이어지던 영인의 침묵이 해결은 아니었는지 상담사는 영인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다. 영인은 답답한 느낌을 내려놓으려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저, 솔직히 말해도 될까요?"
침묵하던 영인이 말을 꺼내자 상담사는 손에 들었던 연필을 책상에 내려놓고 손깍지를 끼고 몸을 영인 쪽으로 기대며 대답했다.
"그럼요. 영인님과 솔직하게 말하기 위해서 만나는 시간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솔직히 조금 어려워요. 입이 잘 떨어지지 않고, 말이 나오려다가 목에서 막히는 기분이 들어요."
"조금이라고 하기에는 어느새 20분이나 시간이 지났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하지만 오늘 이걸 꼭 해내셨으면 좋겠어요."
상담사는 반드시 답변을 들어야겠다는 마음인지 영인이 난색을 표하는데도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영인과 상담사에게 주어진 시간은 상담사의 다짐과는 다르게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상담사가 상담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계속 살펴보는 기분이 들었다.
"자, 그러면 우리 이번에는 이렇게 해봐요. 저를 따라서 말해보세요. 꼭 말로 하셔야 해요. 눈을 마주하면서 하기 어렵다면 다른 곳을 보면서 해도 괜찮아요. 아, 그리고 하기 전에 자세부터 만들어봐요. 우선은 양팔을 들어보세요."
상담사는 양팔을 번쩍 들어 만세를 하는 자세를 취했다. 의자에 앉아하기에는 어색한 자세임에 분명했지만 영인이 양팔을 들어 똑같은 자세를 취하자 상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전했다. 그리고는 상담사는 양팔을 교차해 내리며 손으로 자신의 팔을 감싸는 자세를 취했다.
"잘했어요. 이제는 그 팔로 자기를 안아주는 거예요. 저를 잘 보고 그대로 따라 하세요."
영인은 상담사의 자세를 보고 비슷하게 해 보겠다며 양손으로 팔을 붙잡아보았다. 손이 팔 위쪽에서보다 더 내려가 팔꿈치를 잡는 어색한 자세가 되었다. 그래도 이쯤이면 될 거라는 생각에 멀뚱 거리며 상담사를 쳐다보았다.
"영인님. 그건 팔짱을 낀 자세라는 걸 아시죠? 팔짱을 끼는 자세는 평가를 할 때나 어울리지 지금은 어울리지 않아요. 저를 보세요. 저는 제 팔을 잡아서 안아주고 있는데. 한 번만 다시 팔을 풀어서 자기 자신을 안아줘 보세요. 잘할 수 있어요. 너무 내려가지 않게 팔을 잡아야 해요. 추울 때 팔을 비비듯이."
영인은 상담사의 말에 따라 팔꿈치까지 내려간 손을 조금 위로 올렸다. 이번에는 썩 괜찮은 자세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괜한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잘하셨어요. 조금 더 꽉 안아주셨으면 좋겠지만, 우선은 그렇게만 해도 괜찮을 거 같아요. 이제 따라 말해보세요."
상담사는 영인의 어색한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은 멈춰있던 상담이 진행되는데 좋은 기분이 들었는지 신나는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상담사는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홉뜬 눈으로 영인을 바라봤다. 영인은 그 숨쉬기 마저 따라 하라고 무언의 제안을 받은 기분이 들어 똑같이 코로 숨을 마셨다. 그러자 상담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정답이었나 보다.
"영인아, 너는."
"어…. 나는."
"아니. 제가 말한 그대로 말씀하셔야 해요. 다시 한번 더. 영인아, 너는."
영인은 자신을 제삼자로 자신을 부르는 표현이 부끄럽게 느껴져 몸 안에 담아두었던 숨을 '푸하' 하고 내쉬어버렸다. 그래도 이전에 혼자서 말해보라고 할 때보다 말하는 단어를 단순하게 되풀어 말하기에 마음이 담겨있지 않아도 되리라고 떠올리며 따라서 말했다.
"영인아, 너는."
"꽤나."
"꽤나."
"괜찮은 사람이야."
"… 선생님, 저는 괜찮은 사람이 아닌 걸요."
영인은 이 말 한마디가 하기 어려워 여태껏 30분은 되는 시간 동안 입씨름을 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진심이 없는 말로 따라서만 말한다지만 거짓을 말하기는 싫었다. 여태껏 그렇게 생각본 적도, 그리고 이후로도 그렇게 생각해보고도 싶지 않은 말이었다.
"꼭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우선은 따라서 말만이라도 해보세요. 거기서부터 시작이에요."
"이상해요. 잘 못하겠어요."
"자, 처음부터 다시 합니다. 영인아, 너는."
"영인아, 너는."
"꽤나."
"꽤나."
"괜찮은 사람이야."
"괜…."
하지만 여전히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긴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상담사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은 눈으로 계속해서 영인을 바라보고 있다. 영인에게까지 상담사의 단호한 결의가 느껴졌다. 영인은 아마 자신이 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오늘은 끝까지 이런 시간만 계속 보낼 거라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오늘 다른 이야기도 할 게 많은데 이런 의미 없는 말에 시간을 보내기에는 비싼 상담비가 너무 쉽게 버려지는 거 같아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우선은 따라서 말이라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괜찮은 사람이야."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쭉 말합니다. 띄엄띄엄 말해도 좋으니깐 꼭 이어서 끝까지."
"선생님. 저 이거 정말 어려운데요. 그래도 한 번 해보긴 할게요."
"좋아요. 제가 앞에서 응원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지 말고 말해보세요."
영인은 괴로움에 마지못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영인아. 너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영인이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상담사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다. 어느 정도 안심이 되는지 상담사도 평소에 상담을 하던 때와 같이 소파에 기댔다.
"잘하셨어요. 영인님, 그거 아세요? 영인님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에요."
"저는 하나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걸요."
"우리가 벌써 몇 번을 만났는데. 그럴 때마다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리고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자신을 위해 나아져보려고 노력하고 있으시잖아요."
상담사는 뿌듯하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잘해보려고 하는 거. 그리고 나아지려고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세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신 걸 알고 있으니깐 저도 포기하기 않고 계속해서 방법을 알려드릴 거예요."
영인은 상담사의 말에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상담사의 말이 단순히 본인을 지지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얼른 인정하고 넘겨버리고 싶은 마음만이 들어서 대충 대답하기로 했다.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자, 여기서 그치면 안 되고, 우리가 원래 하려던 말을 완성하셔야 해요!"
여기서 이 어려운 방법을 끝내볼 영인의 바람과 달리 상담사는 원래는 영인 혼자서 했어야 하는 말을 또 시키려 했다. 영인은 오늘 상담센터에 와서 상담사에게 이 말을 자신에게 하는 행동을 숙제로 받았다. 절대로 하지 못하겠다는 영인의 말에 상담사는 '그렇다면 이 방법부터 해보세요.'라고 말하며 영인을 '괜찮은 사람'으로 만든 참이었다.
"선생님. 저 그건 진짜로 못할 거 같은데…."
"방금 전이랑 똑같이 하면 돼요. 겨우 단어가 몇 개 바뀔 뿐인걸요?"
영인은 고개를 떨구며 말한다.
"그래도 그 단어가 잘 입에서 잘 안 나와요. 입이 잘 안 떨어져요."
그리고 다시 상담사를 보자 이번에도 아까와 똑같이 만세를 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리고 따라 하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여 보인다. 영인도 만세를 하고 다시 양손을 내려 팔을 겹치며 자신을 껴안아본다.
"이번에도 하나씩 해봐요. 영인아, 너는."
"영인아, 너는."
"사랑받아 마땅한."
"받아 마땅한."
"중요한 단어 몰래 빼지 마시고요. 다 들려요. 여기 상담실에 우리 밖에 없는데 왜 그러실까."
영인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간지러웠다. 다른 사람이나 존재에게 사랑을 말하기에도 어려워서 이곳을 찾아왔는데 심지어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시도해 보라는 상담사의 이야기에 애정을 강요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사랑…. 받아 마땅한."
"사람이야."
"사람, 일까요?"
영인은 자신 있게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또다시 상담사에게 질문을 하며 말을 넘겼다. 그리고 혹시라도 말장난을 한다고 느껴 상담사가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상담사는 화를 내기는커녕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으로 영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요. 사랑받을 수 있는 걸 넘어서 사랑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래도 장난은 그만 치시고요. 아시겠죠? 이번에는 처음부터 이어서 말합니다."
"어려울 거 같아요. 저는 다른 걸 사랑할 수는 있어도 저를 사랑해보기는 해 본 적이 없어서요."
"영인님. 지난번에 이야기했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우선으로 해요. 누구를 위해서 혹은 어떤 희생을 하는 행동도 결국에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그렇게 자신을 사랑해요."
상담사의 진지한 표정과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영인은 여전히 공감할 수 없어 시선을 피하고 대답했다.
"저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렇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해 주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 줄 테니깐요."
"거꾸로 영인님은 그럴 수 있어도 모든 세상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아시죠? 그리고 지금 당장 꼭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오늘은 말이라도 해봐요. 그러니깐 꼭 따라 하세요. 제가 먼저 말합니다."
영인은 여전히 혼자서는 말을 꺼내볼 자신이 들지 않아 상담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눈짓을 보낸다.
"영인아, 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