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에서 갑으로 무엇을 배웠나
마케팅 테크놀로지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사업 전략, 영업, 파트너 관리 업무를 경험하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건 난 영업 관련 직군에 소질이 없었다는 것이고 계약을 따내고 매출을 올리고 인센티브를 받아도 그리 즐겁지 않았다는 것이다. 돈에 초탈해서가 아니라 이 돈을 벌려면 다음에도 ‘영업’이라는 즐겁지 않은 활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불편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갑작스럽게 시작한 개발자 생활 4년에,
멋 모르고 시작한 외국기업 마케팅,
더 큰 회사에 인수되면서 시작한 미들웨어 영업,
이민의 꿈을 안고 영업의 시름을 잊고자 찾아갔던 회사에서 다시 나에게 찾아온 마케팅 소프트웨어 영업,
디지털 마케팅 소프트웨어에 재미를 붙였으나 이제 제발 영업은 그만하고자 찾아낸 최고의 디지털 마케팅 테크놀로지 회사에서의 파트너 매니지먼트,
잘난 사람들의 이기와 정치, 베려 없음에 신물이나 찾아간 디지털 마케팅 구축 컨설팅 에이전시의 사업 총괄...
그러나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최악의 순간이라 여겼던 PM생활이 다음 커리어의 핵심 연결고리가 됨을 후에 깨닫기도 했으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 중소기업의 한계, 작은 회사의 최대 리스크는 대표 리스크라는 교훈을 배우고 성숙한 어른들과 새 꿈을 펼치고자 찾았던 광고회사의 마테크 총괄 부사장.
이니셜만 나열해도 P, B, O, I, A, S, N 등 7군데 회사를 경험했던 을의 생활. 어떻게 보면 영원한 을도 영원한 갑도 없기에 굳이 쳐다보지도 않았던 과거의 고객사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테크놀로지 구매 고객사들의 상황을 분석하고 마켓 트렌드와 타사 및 경쟁사 사례들을 종합하여 필요성과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나름 괜찮은 솔루션 제안을 해왔다고 생각했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지든 받아들여지지 고객이 허용한 접근성의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고 어떤 때는 가격으로 승부가 갈렸다고 생각했고 어떤 때는 고객사 내부 정치적인 구도 때문에, 또 어떤 경우는 솔루션 회사와 기능이 워낙 출중했거나, 간혹 고객 담당이었던 내가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요지는 내가 제안한 내용이 ‘먹혔다’라고 생각했고, 나의 마켓에 대한 이해와 고객 상황에 대한 분석이 적중했다고 여긴 경우가 많았다. 다른 회사가 수주하면 누군가 고객사 내부에 힘 있는 사람이 밀어주었거나, 가격이 엄청나게 쌌거나, 영업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것이라 생각하곤 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내가 구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나, 혹은 우리 회사 사람들이 써야 하는 테크놀로지를 검토하게 되면서 이런 영업의 흐름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고객은 영업의 말에 설득당하지 않는다. 아니 절대 설득당하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 기능을 얘기해도 우리 회사에 맞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몰라서 적용 못하는 게 아니라 적용할 수가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 내부 정책, 현재 프로세스, 다른 시스템과의 연계성, 비용 처리 방식 등 현실 적인 제약이 곳곳에 지뢰처럼 널려있다. 믿고 덜컥 계약했다가는 낭패를 경험하기 딱 좋다. 그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보니, 테크놀로지 영업사원이나 프리세일즈가 하는 말은 기능에 대한 설명 말고는 특별히 건질게 별로 없고 와 닿지도 않는다. 그렇게 숱하게 때론 밥을 새며 노력했던 고객 감동 프레젠테이션이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고객이 되어 테크놀로지 회사의 소개 내용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고객이 선택하고 마음이 가는 것은 영업의 자세한 설명과 트렌드에 대한 이해에 대해 설득당해서가 아니다. 영업은 어차피 고객 내부 상황은 잘 모른다. 어떤 고객도 아무리 친한 영업에게라도 내부의 상황을 다 말해줄 수는 없다. 또한 업체가 선정된 후에 얘기하는 그 후일담은 업체에게 얘기할 수 있는 부분만을 얘기할 뿐이다. 고객사 담당자와 임원의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메커니즘은 영업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고 별도의 논리로 돌아간다.
테크놀로지 회사의 솔루션 소개 발표를 듣고 있으면서 드는 생각은, ‘아 나도 저렇게 얘기했겠구나. 고객이 동의할 포인트가 별로 없네. 다 알거나 잘 안 맞아...’ 순간 나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워졌다. 발표를 잘한다고? 배운 게 많았다고? 개뿔 거짓말이다. 고객이 배운 것은 솔루션 회사의 발표 내용 자체에서 배우고 뭔가 솔루션을 찾았다기보다는 그 발표 내용을 통해 통찰력을 얻어 우리 회사의 환경과 시스템을 돌아보고 방향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과거 솔루션 회사에 근무할 때의 시각은 ‘내가 발표하는 솔루션이 당신 회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이다’라는 교육적이고 자기 확신적인 내용이었다. 고객이 되어보니, 그들의 교육이나 확신과 상관없이 내가 인사이트를 얻고 내가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과정에서 주는 힌트 정도의 역할인 것이다. 즉, 솔루션 회사의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말할 뿐이고, 그중에서 고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고 인사이트를 주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사이트를 얻고 해결책을 찾는 것은 고객사의 몫인 것이다.
한 편으로 돌아보면 많은 고객사는 외부 업체로부터 기업 내부의 문제의 해결책을 얻기를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솔루션을 구매하는 것과 상관없는 학습의 과정일 뿐이었다. ‘아... 테크놀로지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구나. 프로세스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야 하는구나’라는 학습의 과정 말이다.
모든 기업용 소프트웨어는 다루는 프로세스가 있고 배워야 하는 스킬이 있다. 솔루션 벤더가 제공하는 테크놀로지 솔루션은 그 소프트웨어와 기업의 프로세스 사람의 관련 스킬 등이 상호 작용하며 돌아간다. 어떤 경우는 솔루션을 위해 프로세스를 바꾸고 새로운 스킬을 습득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프로세스와 사람의 스킬은 그대로 두고 솔루션을 뜯어고치는 경우도 있다. 어떤 것이 맞다 틀리다기보다 예술적인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기업의 구성요소를 솔루션에 맞추거나 솔루션을 기업 내부 환경에 맞추거나 어떤 경우에든 기업 내부의 현재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추후 바뀌는 부분에 대한 변화관리를 제대로 하는 것이 솔루션 도입을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정리하면, 솔루션을 검토할 때 솔루션 회사에 해답을 기대하지 말고 인사이트를 얻고 해결책을 찾는 건 고객사 기업의 몫이며, 솔루션을 왜 도입하는지, 어떤 프로세스에 적용할 것인지, 무엇을 배우고 바꿔야 하는지를 반드시 살펴야 한다는 것이며, 도입 후에는 새로운 프로세스(솔루션은 프로세스다!)가 도입된 만큼 사람과 프로세스에 대한 변화관리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갑이 되어 솔루션을 도입하는 입장의 되어본 자의 짧은 총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