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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텔 Apr 29. 2023

낭만부록

파리, 20230408

14:52

3월 30일, 파리에 도착했다. 죽도록 기깔나는 이틀을 보냈다.


4월 1일, 스트라스부르로 향했다. 여행이 한참이나 남았지만 그리 신나지만은 않았다. 파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시린 강바람도, 암모니아와 메탄가스 냄새 자욱한 지하철도, 한 시간 가까이 내 발을 묶은 소나기도 덮어버린 지독한 향수 속에서 이틀은 짧았다. 그새 나는 파리를 그리워하는 몸이 되었다.


자기주장이 강한 도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런던이나 빈 같은. 전통 양식을 보존한 건물들과 분명한 개성을 띤 그들만의 기호체계 속에 있다 보면 이곳에서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더 뼈저리게 느껴지고, 쉽게 외로워진다. 전통이 눈에 밟히지 않고 한 번쯤은 완벽히 리셋된 적이 있는, 자유롭기에 더 몰개성한 도시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서울, 도쿄, 베를린 - 회색 인간들이 각자의 추레함을 덮고 멀쩡한 체 살아갈 수 있는 회색 대도시, 내 알파값을 0으로 맞추고 아주 투명히 자유로울 수 있는 메마른 빌딩 숲.


파리는 전자에 가깝다. 세상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곳이라는 낭만의 도시에서 나는 그럼에도 편안했다.


4월 8일,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낸 후 막차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려면 새벽 5시에 뮌헨에서 출발해야 했다. 만하임에서 경유할 때는 너무 피곤해서 그냥 빨리 집에나 가고 싶었는데, 열차 스크린에 파리 동역이 뜨자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도는 듯했다. 아마 평생 내게는 여행지로만 남을 파리, 그래서 평생 벗겨지지 않을 동경의 콩깍지. 나는 마드무아젤 빠히와 아주 오래 썸을 탈 작정이다. 일단 오늘은 아쉬운 대로 다섯 시간 정도, 알찬 데이트를 다짐하며. 이거 뭔가 되게 로맨틱 - 첫글자는 소문자로.


15:21

파리 북역 코인락커에 캐리어를 맡기고 나오는 길이었다. 쓰레기통에 누가 연막탄인지 뭔지 터트려놓은 모양이었다. 놀랍지 않게도 나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이 장면을 상상했던 적 있다. 북역 앞, 자욱한 안개, 아무 말 없이 앞만 보고 걷는 사람들... 내 머릿속을 읽히고 있는 듯한 느낌, 트루먼 쇼일까? 소문과는 다르게 어쩐지 내게 유난히 우호적이었던 이 도시. 내가 너무 의심 없이 껴안아버린 건 아닌지, 그 어떤 호의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오래된 열등감을 느끼며 광장을 빠져나왔다.


15:35

전날부터 계속해서 들었다. 스무 살 이래 기억에 깊게 남은 순간들에는 모두 잔나비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오래 기억에 남기고 싶은 순간 앞에 잔나비의 곡을 고르는 내가 있었다.


"잃어버린 것들은 잃어버린 그 자리에". 최정훈은 우리 너무 뒤로만 걷지는 말자고, 가끔만 뒤를 돌아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 곡을 썼다고 말했다. 나는 꽤 오래 뒤로 걷고 있다. 어쩐지 내게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는 빨리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세상에는 어떻게든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을 성장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자리에서 몸만 커버려 어쩔 줄 몰라하는 나무도 있다.


16:02

3월 말과는 달리 날씨가 너무 좋았다. 그냥 자랑하고 싶었다!


16:23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프레데리크 쇼팽과 그의 마지막 연인인 소설가 조르주 상드. 남장을 하고 담배를 태우며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상드와 예민하고 병약한 쇼팽의 사랑은 연애와 모성 사이 무언가의 형태를 띤 채 채 두 예술가에게 끝없는 영감을 불어넣었다. 이 커플의 위태롭고 아름다운 9년간의 서사에 작년 겨울의 나는 깊게 사로잡혀 있었다. 한동안 내게 쇼팽과 상드는 낭만의, 파리의 다른 이름이었다. 하강하는 베이스 노트로 계속해서 돌아오는 쇼팽의 왼손과 소설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상드의 오른손, 비슷한 왕복운동을 하는 두 사람의 손이 분명 닮았을 것이라는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곤 했다.


두 사람의 손을 본뜬 모형이 있다는 몽마르트 근처의 낭만주의 박물관(MUSÉE DE LA VIE ROMANTIQUE)은 제일 먼저 여행 계획에 넣었던 곳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여행의 마지막 날을 위해 아껴둔 하이라이트처럼 방문하게 되었다. 여행 첫날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오는 유로스타에서는 상드의 <남과 여>를 읽었다. 상드의 전 연인인 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와의 연애담을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에서 미화한 소설인데, 쇼팽과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 취향 안 변하더라는 또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으로 뜯어보려다, 뭐든지 내 멋대로 오독하려는 나쁜 버릇이 또 고개를 드는 것 같아 별생각 없이 읽기로 했다.


둘의 손은 그닥 닮지 않았다. <남과 여>는 그닥 재밌지 않았다. 낭만이 낭만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16:57

정말 우연이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몽마르트 중턱의 서점에서 이런 전리품을 챙겨 나올 줄이야. 그것도 때마침 듣고 있던 곡과 같은 이름의... 첫 이틀간 파리 시내를 이 잡듯이 뒤져도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는데. 살 때가 되면 나타나게 되어있다는 나의 쇼핑 뚝심이 빛을 발하는 순간... 이라기보다는 그냥 아는 책을 보니 반가웠다. 올해 초 비행기에서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읽으며, 삶의 부조리를 마주하는 첫 순간을 갓 스물을 넘긴 작가가 어찌 이리 섬세하게 잡아낼 수 있을까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전부 풍화된 후에야 비릿하게 올라오는, 끝에 다다라서야 자각할 수 있기에 언제나 작별밖에 할 수 없는 애수를 세실은 오히려 한 발 나아가 맞이한다. 스무 살은 절대 쓸 수 없을, 하지만 스무 살이어야만 쓸 수 있는 그런 이야기.


슬픔과의 조우는 분명한 변곡점이다. 사람은 이때를 기점으로 뒷걸음질을 배우게 된다. 시간을 되돌려 순결한 세계의 십자가를 다시 세우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불타는 나의 성전 앞에서 더 선명한 인증샷을 남기고 싶다는 마조히즘적인 충동에서.


한 시절이 저무는 바다에서, 곧 찾아올 밤에게 세실처럼 제대로 인사를 할 수 있었다면 나도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사진은 서점이 아니라 내 방 책장이다. 서점에서는 사진 찍을 생각도 못 했다. 항상 그랬다. 가장 반가운 시간은 가장 우연해서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17:15

몽마르트 언덕에 올랐다. 날씨가 정말 좋았고, 날씨가 정말 좋았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17:50

언덕 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모노레일 옆 중턱에 자리를 잡았다. 여전히 사강과 잔나비를 생각하며.


상드를 읽으며 파리에 왔고, 사르트르와 쇼팽의 발자국을 따라 파리를 걸었고, 보들레르의 무덤에 기차표를 올려놓으며 파리를 떠났고, 프루스트를 읽으며 파리에 돌아왔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내가 직접 본 건 과연 얼마나 될까. 누군가의 렌즈에 비추어 바라본 세상의 얼마만큼만 내 것일까. 여행이란 삶의 일반적인 방향과 반대로 걷는 일인데,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사람들의 템포에 맞춰 걷는 것에서 진정한 여행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까. 훔쳐온 낭만, 훔쳐온 사유로 지탱하는 삶의 어디까지가 표절일까. 진정한 의미의 창작이란 없고 오직 끝없는 재해석만이 있을 뿐이라 믿지만, 도대체 내 삶 속 무엇을 온전히 나의 것이라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지 쉽게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지금 내 삶에는, 지나온 1막의 플롯 속에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1막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2막의 엔딩을 생각한다. 나에게는 상드와 쇼팽에 빠져 있던 그 겨울에 썼던, 무척이나 아끼는 곡이 하나 있다. 연애의 작은 속삭임들이 어째서 시간이 지나면 거대한 낭만으로 남는지, 도대체 무엇이 일상의 확률적 우연성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만드는지 같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때였다. 이날 파리의 풍경에는 내가 상상했던 상드와 쇼팽의 사소한 다툼도, 음악과 소설로 남은 그들의 낭만주의 정신도 모두 있었다. 1년 2개월간 조용히 잉태했던 그 곡의 세계가 완결되는 순간이었다. 언제가 될지, 가능은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는 때가 분명 내 2막의 피날레일 테다. 그때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2막의 세계는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요즘은 정말 가끔만 뒤를 돌아본다고.


기차가 출발하려면 두 시간 정도 남았지만 여기서 여행의 별책부록 같았던 파리의 낮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21:43

킹스크로스에 도착하자마자 기분이 나빠졌다. 사진에서도 느껴진다. 이놈의 영국은 도저히 정이 들지 않는다. 졸업해서도 절대 나는 이곳을 그리워하지 않을 거라고, 지금까지 수백 번 다짐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이미 졸업한 친구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나도 이때를 낭만으로 떠올리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애증도 결국에는 로맨틱 - 첫글자는 대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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