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 2시간 69분짜리 셔젤 쇼
* 스포일러 주의 *
종교는 쾌락을 경계한다. 욕망을 충족한 인간에게 더 이상 신전은 필요하지 않다. 신전을 부수고 스스로에게 경배하며 지금 경험하는 세계를 곧 천국으로 인식한다. 오만은 오래가지 못한다. 무너져 내린 바벨 탑을 보며 누군가는 신의 천벌에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몽롱한 화양연화를 추억한다. 그럼에도 가장 빛났던 순간, 다시 돌아간대도 아담과 이브의 후손은 같은 선택을 한다.
고대 문명이 증명한 쾌락과 종말의 인과관계는 예술의 목마 속에 숨어든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음악 혐오>에서 음악의 기원에 위치한 폭력과 공포에 대해 고발한 바 있다. 아폴론이 당긴 활시위의 울림은 리라가 되었고, 피 묻은 복수의 절규는 세이렌의 노랫소리가 되었다. 베드로를 꾸짖는 수탉의 울음과도 같이, 엄습하는 죽음의 공포는 소리의 형태로 고지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음악을 ‘발명’한다. 공포를 잊기 위하여, 혹은 심장 깊숙이 새기기 위하여. 예술은 폭력과 죽음의 광기를 감싸는 아주 얇은 천과 같다는 것을, 그래서 예술이 인간에게 그리 달콤함을 깨닫는다.
기술과 자본의 발전과 함께 태동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그 어느 시대의 예술보다 쾌락의 목적에 충실하다. 적당히 재밌고 꽤나 중독적이며 과도하게 비판적이지 않은 화두를 던지는 상업예술은 사회의 부품들에게 자신이 자유롭게 사유하고 소비하는 현시대의 주체라는 착각을 주기에 최적의 장치이다. 노동자들의 잉여 시간을 충실히 침묵시켜 줄 것을 요구받은 영화는 두 시간 남짓이라는 최적의 러닝 타임을 찾아냈다. 최근 세 시간을 넘는 영화들이 종종 등장했지만, 시간 부르주아가 아닌 이상 과소비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유튜브 쇼츠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돈을 내고 피로감을 사고 싶지 않다. 또 세 시간이냐, 한숨을 앞세워 들어간 상영관에서, <바빌론>이 포효한다. 세 시간이 넘는 영화를 정 만들겠다면 이렇게 하라고.
<바빌론>의 호불호의 쟁점, 부정적 비평의 주요 타깃 - 시끄럽다, 어지럽다, 정신없다, 산만하다, 불쾌하다, 차라리 서커스를 만들어라…… 모든 비판을 감내할 가치가 있을 만큼 이 카오스적 광기는 <바빌론>의 가장 큰 매력이자 핵심 제재다. 시작하자마자 굳이 코끼리를 높은 산 위로 끌어올리는 에너지 보존 법칙의 시각에서 상당한 사치를 부리더니, 주지육림이 밤새 펼쳐진다. 해가 뜨자마자 인물들이 향하는 촬영장은 파티의 연속이라 해도 믿을 만큼 여전히 시끄럽고 잔인하다. 에덴동산의 뱀도 절레절레할 24시간이 겨우 끝나고 나서야 큼지막한 글씨로 <바빌론>이 등장한다. 온몸을 때리는 정적 후에야 겨우 숨을 몰아쉬며 몇 가지를 깨닫게 된다. 지금껏 배경음악이 거의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는 것. 키냐르가 일찍이 간파했던 것처럼,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는 것. 아이러니하게도 무성영화이기에 용인되었던 수많은 소음은 녹음기술의 고발과 함께, 적어도 카메라가 도는 와중에는 자취를 감춘다는 것.
파티장에서의 장면과 촬영장에서의 이야기가 영화 전반에 병렬 배치되어 있지만, 둘 사이의 경계선은 희미하다. 할리우드의 낮을 빛내는 인물들은 모두 밤의 광기에도 깊게 발 담그고 있다. 잭 콘래드는 파티에서나 촬영장에서나 잔뜩 취한 채로 산업의 열악한 환경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가족을 떠올릴 때면 눈물이 난다는 넬리 르로이는 바로 그 지긋지긋한 아버지를 독사의 이빨 앞에 내던진다. 때로는 촬영장의 부도덕이 환락가의 그것을 압도하기도 한다. 날아온 투창에 꽂힌 엑스트라는 그야말로 망가진 소품으로 소비되고, 카메라 부스에서는 촬영감독의 몸이 익어간다. 영화 밖 사건이지만, 영화사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권력형 성범죄를 떠올리면 약쟁이의 난교 파티는 오히려 신실하다. 용인을 넘어 폭력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할리우드 산업은 거대한 바쿠스의 신전처럼 보인다.
결국 예술이란 분장한 광기에 다름없다. 예술이 진보한다면, 광기도 함께 진보한다. 돈을 위해 쥐를 산 채로 잡아먹는 괴인 앞에서 경악하는 매니에게 위화감이 느껴지는 이유다. 영화가 점점 대중화되고 할리우드 산업이 커질수록 본질은 더 큰 어둠 속에서 힘을 키운다. 이는 예술과 광기의 분리가 아니다. 도리어 광기의 보편화이며 문화를 통해 희석된 광기를 대중이 나누어 투여받는 과정이다. 예술의 발전이 구시대의 정신보다 더 짙은 어둠을 마주하고 그 힘 앞에 굴복하는 과정이라면, 자신의 연기를 비웃는 관객들을 바라보는 잭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통해 영화의 발전을 증명하는 자이다. 대중이 잭을 죽였다. 지금도 그러하듯이.
그럼에도 추악한 민낯이 영화의 황홀한 낭만을 모두 지우지는 못한다. 구시대의 아이콘인 잭은 대중예술인으로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입센과 같은 전통예술의 상아탑을 거부하며 끊임없이 ‘관객들이 좋아할', 서민과 일반 대중들에게 '의미가 될 수 있는' 작품을 추구한다. 앞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해 자조 섞인 비난을 쏟아부었지만, 결국 가장 인간적인 가치는 사회가 어떻고 진실이 어떻든 간에 고단한 하루의 끝에서 손을 잡아주는 데에 있지 않을까. 영화는 힘든 삶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잠시나마 합법적으로 미쳐있을 수 있는 시공간을 제공한다. 그 본성이 무엇이든, 개 같은 세상 엿이나 먹으라며 웃으며 어깨동무를 해 주는 친구를 싫어할 수는 없다. 귀족적 교태에 구토로 응수하는 넬리도, 블랙페이스를 지우고 재즈클럽으로 돌아간 시드니 팔머도 마찬가지다. 예술이 모두의 곁으로 내려온 시대, 가벼운 광기야말로 인간성의 일부임을, 그렇기에 희석된 마취제는 오히려 삶의 구원이 됨을 분명히 확인한다.
2시간 69분의 서커스. 상업예술의 본래 목적처럼 <바빌론>은 관객의 시간을 만족스럽게 먹어치운다. 동시에 셔젤 감독의 모든 것을 쏟아내기에는 오히려 부족해 보이는 시간이었다. 셔젤은 이전부터 공공연하게 <바빌론>을 자신의 영화 인생의 시작점이자 목표였다고 밝혔다. 본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 <위플래시>, <라라랜드> 등의 대작을 ‘먼저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하는 그가 얄밉기까지 했다. 자신의 야심을 증명이라도 하듯 셔젤은 모든 분 모든 초에 본인의 예술관과 영화에 대한 헌사를 가득 채워 넣는다.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엔딩 시퀀스 - 이 시점에서 영화는 매니의 세계를 떠나, 현시대의 우리에게 영화의 의미를 논한다. 어느 시네파일들은 2023년의 매니가 되어 눈물을 흘리기도, 나를 포함한 대다수는 이 생뚱맞은 엔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며, 다만 저스틴 허위츠의 음악에는 압도되어 숨죽였을 장면. 그럼에도 나에게 있어서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사랑할 수 있는 게 존재한다면 바로 이 장면이지 않을까 싶다. 창작자로서 자신이 평생 표현하고 싶었던 무언가를 원 없이 쏟아낼 수 있다는 커다란 행운, 그 호사를 누린 자를 어찌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모두가 혹평을 쏟아내더라도, 어느 예술가의 꿈이 이루어지는 찰나를 어떻게든 변호하고 싶은 주제넘은 광기에 난 여태껏 사로잡혀있다.
인용 출처: 음악 혐오 (파스칼 키냐르 저 / 김유진 역)
사진 출처: 위키백과, Paramount Pictu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