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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텔 Feb 16. 2023

시인의 눈

<시> 목적 없는 투명한 눈으로 세상도 사랑도

※ 잡설이 많은 것이 아무래도 영화 리뷰와는 거리가 먼 듯 합니다.

* 스포일러 주의 *




컴퓨터에게 눈을 달아주는 일을 한다. 엄밀히 말하면 직업으로서의 일은 아니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걸 돈 써가며 공부하고 있다는 건 나도 초라해서 차마 말 못 하겠으니 일단은 일이라 하겠다. 아닌 게 아니라 난 이 일을 여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게 한 발 남은 총을 쥐여 준다면 고민 없이 그래픽카드를 겨누겠다. 누군가 왜 이 일을 싫어하냐 묻는다면, 고개를 들어 '대학원생 표준영정'이라 불러도 무방할 나의 얼굴을 보라 한다. 눈은 지난 23년간 축적해 온 값비싼 데이터셋을 바탕으로 주변 객체를 탐지하느라 벌겋게 충혈되었고, 귀는 직전 0.5초간의 주파수 스펙트로그램을 던질 신경망 코드를 짜느라 스택오버플로우를 미친 듯이 뒤지는...... 차갑고 딱딱한 양철 사이보그인 내가 어느새 모니터에 있었다. 왜 그런 일을 여태껏 하고 있냐 묻는다면, 그게 실은 나도 궁금하다 답할 수밖에 없겠다.


간략하게나마 대학에서 여러 머신 러닝 기법을 공부하는 동안 세상이 모종의 쇠파이프들로 뒤덮여가는 환영을 자주 보았다. 파이프는 방향과 목적을 가진다. 한쪽 끝은 입력, 반대쪽은 출력. 이 파이프는 말을 보고, 저 파이프는 거리를 인식한다. 세상은 분명한 목적을 가진 시선을 통해 분석되고 조직화된다. 음성도, 언어도, 미술과 음악마저도 몇 억 개의 가중치를 거쳐 생산되는 공산품이 되어간다. 실은 나 또한 인공지능처럼 무수한 객관성의 바늘로 세상을 진단하고 있겠지, 마음이 투명해졌다. 겹겹이 쌓인 비밀을 잃고 전결합층마냥 납작해진 세상은 더 이상 신비롭지 않았다. 조각난 세상이 참 별 것 없다 싶었다.


요즘 내내 '과연 인공지능이 시를 쓸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한다. ChatGPT가 특정 래퍼의 스타일로 랩 가사도 대신 써 주는 판국에, 앞으로 10년이면 안 그래도 돈 못 버는 직업 최상위권을 당당히 지키고 있는 시인의 밥벌이가 아주 끊기고 마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분명 시작법의 기술적 측면이나 다양한 언어 구사력에 있어서는 학습 속도가 월등히 빠른 인공지능을 인간이 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극히 고리타분하고 이상적이라 나조차도 듣기 싫어하던 주장이긴 하지만, 인간의 시선만이 진정한 시를 완성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시인은 직업이 아닌 자세이며, 그 순수한 태도에는 어떠한 목적성도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와 이창동의 시론을 잠시 빌려, 인공지능의 공업적 시작법이 예술의 영역에 도달하지 못하는 바로 이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파이팅 지피티! 멋지다 피티야!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은 ‘존재의 회복'이라는 시적 언어의 역할에 대해 탐구한다. 정확한 해석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비전공자의 시각에서 피상적으로나마 이해한 바를 옮겨보겠다. 근대과학이 발달한 이래 서양 문명은 자연과 세상을 탐구하고 분석하며 끝내는 정복해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자연과 기술이 상호작용할 때, 자연은 그 존재 자체로 존중받지 못하며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에너지의 자원으로만 인식된다. '개별과학은 존재자를 '타자를 위한 기능'으로서 고찰하는 것이며 이와 함께 존재자를 그것 자체로부터 소외시킨다.' (박찬국, p.22) 유물론의 안경을 쓴 지성이 존재자의 외형과 기능만을 좇는 사이, 정작 존재자를 진정으로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빛은 존재자에게서 달아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망각의 사회를 ‘세계는 황폐해졌고, 신들은 떠나버렸으며, 대지는 파괴되고, 인간들은 정체성과 인격을 상실한 채 대중의 일원으로 전락해 버린’ ‘궁핍한 시대’라 일컫는다.


하이데거는 (...) 서양의 형이상학이, 존재 자체를 인간의 정신 내지 이성과 동일시하면서 객관을 주관에 포섭시키는 방식으로 존재자들을 개념적으로 장악하려고 하는 주관성의 철학으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본다. 또한 이러한 주관성의 철학은 결국 모든 존재자를 인간이 임의로 조작하고 지배할 수 있는 물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기술문명으로 종결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 박찬국, <하이데거 읽기>, p. 11


하이데거는 자연에 귀 기울이는 것을 통해서만 사물의 진정한 존재를 체험할 수 있고, 이러한 존재를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시적 언어라 역설한다. 자연은 어떠한 인공적 장치도 가해지지 않은, 순수하게 모든 존재들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겸허하고 영원한 환경이다. 이러한 불멸의 섭리를 마주할 때 인간, 즉 죽음이 예정된 자는 '불안'으로 특정되는 근본기분 속에서 마침내 존재 자체의 경이로움을 체험하게 된다. 이때 말을 걸어오는 존재와의 대화가 바로 시이다. 특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반적인 정보언어와 구별되는 시적 언어는 존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존재의 아름다움을 환기하는 힘을 가진다. 다시 말해, 시적 언어는 어떠한 발화자의 목적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히 대상의 존재만을 품은 '존재의 집'이다. '시는 진실을 드러내는 예술이며 존재 본연의 모습이 깃들어있는 존재자에 붙어진 이름이다.' (Pattison, p.169)


시는 철학이 아니며, 활자도 아니다. 시는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반신(demi-god)의 역할을 하는, 존재와의 대화 그 자체이다. 하이데거는 역으로 모든 언어는 근본적으로 시적 언어라 주장한다. 본질적으로는 존재와의 대화의 창구를 열어주는 언어가 인간의 세속적 의도를 전달하는 목적을 갖게 되면서부터 시적 언어의 특권이 말소된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결국 존재를 존재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것은 인간이 들이대는 목적의 잣대이다. 언어를 소유하고 욕망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방식은 진정한 시인의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 (반성한다...) 하물며 인공지능이 다루는 언어는 어떠하랴. 주변 단어들과의 관계성을 통해 특정 단어의 뜻과 문법적 기능을 파악하고, 인터넷상에 떠도는 문장들의 패턴을 학습하여 일종의 낱말 맞추기 게임을 하는 과정 중 어느 지점에도 그 말들이 지칭하는 대상과의 상호작용은 없다. 그야말로 납작한 활자의 층위에 갇힌 죽은 언어이다. 어떠한 목적과 욕망도 없이 순수한 자연 그 자체를 감상할 때만 우리는 진정한 존재의 경이를 체험할 수 있고, 그러한 체험의 기록은 시가 된다.



시를 쓰기 위한 자세에 대해 고찰하는 영화 <시>에서 시적 경이가 달성되는 지점도 이와 비슷하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불편하다. <밀양>의 전도연도, <버닝>의 유아인도, 불쾌함과 어색함을 넘어 불가해하다 느껴지는 부조리한 무대에 내던져진다. <시>의 윤정희에게도 예외는 없다. 어떠한 시선과 영혼에 시적 감상이 깃들 수 있는지를 형상화하기 위해 이창동 감독은 마치 욥을 시험하는 하느님의 자세로 미자에게 온갖 돌을 던진다. 분명한 목적을 가진 폭력이다. 온갖 추악한 욕망과 목적으로 뒤덮인 세상에게 린치 당하는 미자는 그 어디에서도 시상을 찾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또한 시를 쓰겠다는 피상적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단지 기능적 측면에서 관찰할 뿐이다. 미자에게로 향하는 외부적 목적과 세상을 바라보는 미자 내면의 목적은 충돌하여 상쇄되지 않고, 오히려 합심하여 일상적 폭력으로 정당화된다.


놀랍지 않게도, 미자를 괴롭히는 외부적 목적은 전부 남성에게서 기인하여 미자의 순수한 여성성을 끊임없이 겁탈하려 시도한다. 플롯 전체를 지배하는 성욕의 원초적 목적은 남성의 관성적 오만과 합심하여 힘없는 여성, 즉 아네스라는 세례명의 자살한 소녀와 미자를 동일한 난간에 등 떠민다. 가해 학생의 아버지들은 자식의 미래를 위해 피해자의 가족과 합의를 시도하며, 사회적 약자인 미자를 무시함과 동시에 같은 여성끼리 말이 통할 것이라며 설득에 이용하기도 한다. 동시에 미자 또한 손자 종욱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적 목적을 가지고 타인을 대하는 관찰-가해자에 위치에 편입되기 시작한다. 그 무엇보다 맹목적인 사랑인 혈육에 대한 내리사랑이 미자에게 목적성의 칼을 쥐여주게 되는 아이러니인 것이다. 꽃을 사랑하고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순수한 소녀 같은 미자는 종욱이 존재하는 한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결국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회장의 욕망 앞에 미자는 돈을 목적으로 무릎을 꿇는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젠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에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 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 양미자, '아네스의 노래', 이창동 <시> 발췌


미자가 시인이 되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종욱의 죄를 인정하고 동시에 자신의 죄 또한 인정하는 것 - 시를 쓰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 모든 이해관계를 소멸시키는 용단을 내린 후에야 아네스를 바라보는 미자의 시선은 순수해질 수 있다. 어릴 적 다정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언니, 미자는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기억과 아네스를 병치해 바라봤을 것이다. 아네스라는 존재자 속 아름다운 소녀의 존재와 대화를 나눈다. 그녀의 고통을 끌어안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단순히 속죄를 위한 속죄가 아닌 진정한 이해와 교감을 이어간다. 시상은 이렇게 준비된 자만에게 깃드는 것이다. 시 강좌에서 김용탁 시인이 말했듯,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마음을 먹는 것이 어렵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꿈꾸기 시작한 미자만이 시를 완성한다. 하이데거식으로 표현하자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발견하고 결정하는 '현존재'로 거듭난 셈이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고들 한다. 미자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알츠하이머는 미자를 서서히 현실의 역학관계에서 떼어내며 시인의 눈을 되찾게 한다. 언어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존재를 앉힐 집을 잃는 것이지만 동시에 집이란 그저 껍데기일 뿐이다. 기억을 잃고 태초의 상태로 돌아가는 인간은 모든 존재의 충만함과 신비로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가 되어간다. 자신 생의 가장 진실된 순간을 스스로 바라볼 수 없는 슬프고 아름다운 병. 이창동 감독은 미자의 퇴장을 통해 사회에 내재된 폭력과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의 구원을 모색한다. 세상과 강제로 단절되어야만 겨우 고향을 근사할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진정한 시인의 눈을 얻을 수 있을까. 모니터 너머 컴퓨터의 그것을 닮아가는 나의 욕심 가득한 눈으로 가당키나 할까. 그래도 일단은, 망각의 운명을 비웃듯 제 눈으로 시를 써낸 미자의 용기가 부럽다. 일단은 추한 나를 비추는 거울로부터라도 멀리멀리 도망쳐야겠다 마음먹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떤 인간 존재도 다른 사람에게 전원시를 선물할 수 없다. 오로지 동물만이 할 수 있는데, 동물만이 천국에서 추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개 사이의 사랑은 전원적이다. 갈등이나 가슴이 메이는 장면, 진화 같은 것이 없는 사랑이다. 카레닌은 토마시와 테레자 주위로 반복에 근거한 삶의 원을 그었고 두 사람도 그에게 같은 일을 해 주길 기대했다.

카레닌이 개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면 틀림없이 테레자에게 오래전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 매일같이 입에 크루아상을 물고 다니는 게 이제 재미없어. 뭔가 다른 것을 찾아 줄 수 있겠어?” 이 말에는 인간에 대한 모든 심판이 담겨 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492


오래전부터 마음속 깊이 담아놓은 쿤데라의 구절이다. 존재의 광채 주변을 한없이 서성이는 시인의 마음처럼, 사랑은 맹목적이고 비자발적이며 그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재미를 탐내길래 모든 것에 목적을 달아주고자 안간힘 쓰나. 키재고 분류하고 줄세우고 값매기고 조작하고, 그렇게 허우적대며 앞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나. 사실 난 너와의 여느 일상으로도 충분한데, 세상에 사랑보다 재미난 게 어딨다구...


영원한 시로 남은 배우 윤정희를 추모하며.




인용 및 참고 문헌: 하이데거 읽기 (박찬국 저 / 페이지넘버 e-book 기준),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박찬국 저), Routledge Philosophy Guidebook to the Later Heidegger (George Pattison 저), 시 (이창동 감독 영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저 / 이재룡 역)

사진 출처: 한국일보, 시사프라임, 동아일보,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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