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준으로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베트남으로 온 내가 우리 집 복도식 아파트에서 처음 본 내 또래 한국 남자아이의 다급한 모습이었다. 그 애는 하노이에서 살고 있는 듯해 보였고 처음 본 우리를 호기심 어린것 반, 눈치 반을 보며 본인이 들고 온 라면 과자를 들고 뻘쭘하게 다른 집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쟤는 누굴까? 딱 내 또래 같은데..'
라는 생각과 함께 10m 정도를 더 걸어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중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참 개구쟁이였다. 아마 학창 시절에는 ADHD를 진단 내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을 법할 정도로 항상 산만하고 학교에서건 학원에서건 시끄럽게 장난을 많이 치던 편으로, 그날 수업이 7교시까지 있으면 일곱 번 맞는 날이고, 8교시까지 있으면 여덟 번 맞는 날이라고 생각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참, 우리 때는 선생님들의 사랑의 매가 당연시되던 때이다.
친구들하고 매일 웃고 떠들며 지내오던 중학생 시절, 아버지가 당시에는 생소하게 들리던 주재원이라는 이름으로 베트남 하노이에서 근무하게 되셨고, 수개월 뒤 나머지 우리 가족 멤버들 모두 뒤따라가게 되었다. 그때가 바로 중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친 시점이다.
당시 거주하던 대우아파트
20여 년 전이라 한국인이 지금처럼은 많지 않았던 때였고, 우리 형제가 다닐 국제학교 또한 수도 하노이에 두 개 밖에 없었다. 하나는 UN 국제기구 산하 관리되는 UN 국제학교(UNIS, 전 세계에 뉴욕 포함 두 개밖에 없다), 나머지 하나는 Hanoi국제학교(HIS). 전자가 조금 더 좋았기에 입학 요건도 까다로웠고, 영어를 전혀 못하면 입학이 불가했기에 하노이에 가자마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한 과외를 급하게 두 달 하고 겨우 턱걸이로 통과했다. UNIS는 미국 학교 커리큘럼을 따라가기에 우리나라 기준으로 2학기 가을이 거기에선 새로운 학년이 시작되는 때였고, 여차하니 반 학년을 꿇고 입학하게 되었다. 학교를 가니 내 윗 학년으로 나랑 동갑인 친구들이 여럿 있었고 그중에 '뿌셔뿌셔맨'도 있었다.
한국인이 20~30% 정도 육박할 정도로 많던 국제학교였지만, 대부분이 외국 아이들이었기에 영어도 잘 못하던 내가 적응하기에는 쉽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문득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그립고 아련해서 버디버디로 소통을 하기도 하며 외로움을 달래 봤지만 언어와 문화 차이로 인해 6개월가량은 참 많이 힘들었다. 외국인 선생님들이 수업 막바지에 숙제에 대해 설명해 줄 때에 못 알아듣고 옆에 있는 한국 아이한테 조용히 물어보다 딱 걸리게 되면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Don't speak in KOREAN!!" 이라며 윽박지르고 고개를 젓곤 했고 아직은 덜 친했던 아이들 무리 속에서 홍당무처럼 얼굴이 빨개지며 '이렇게 대놓고 창피를 당하느니 차라리 한국에서처럼 맞는 게 낫겠다'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이런 시간들도 모이니 우여곡절 끝에 어느덧 1년이란 시간이 지나갔고 슬슬 귀가 트이기 시작하며 나도 자연스레 스며들기 시작했다.
국제학교를 다녔지만, 격주 토요일마다 운영하는 한인학교를 가서 한국 커리큘럼에 맞는 국어와 수학 수업도 들으며 그곳에서 친구들과 많이 어울려 놀았던 것이 그 당시 큰 위안이자 행복이었다. 10평 남짓한 교실에서 10명이 채 되지 않은 인원이 모여 웃고 떠들며 서로를 이해했고, 쉬는 시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근처 매점에 들러 컵라면이나 빵을 사 먹기도 했다. 주일에 가던 한인교회와 UNIS 및 한인학교에서 친해진 친구들이 지금까지도 연락하며 친하게 어울려 지내는 소중하기 그지없는 애들이다.
여하튼, 베트남에서 내 학창 시절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추억이 참 많다. 한국에서의 나라면 꿈도 못 꿔볼 만한 골프도 배워보고 테니스도 2년이나 쳐보고, 외국인 친구들도 사귀고, 프롬이라고 하는 학교 파티도 가보고, 수학여행으로 요즘 신혼여행지로 유행하는 다낭도 가보고, 사파에 가서 소수민족도 보고.
가장 그립고 기억에 남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애들이랑 오토바이를 타고 피시방에 가서 카운터 스트라이크를 하며 바로 옆 식당에서 먹던 끝내주는 분짜다. 우리나라 돈으로 500원만 내면 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다 탄 고기가 들어있는 느억맘 소스에 많은 양의 분짜면을 넣고 후르릅 짭짭했던 그 기억이 아직도 문득문득 내 마음속 제2의 고향처럼 향수병을 도지게 한다.
길거리 분짜
이렇듯 나름 해외에서 국제학교를 다녀 본 경험이 있기에 귀국 후 20대 초반까지는 영어가 꽤 자신 있었다. 공부를 제일 많이 할 청소년 시기에 있었기에 그럴 수 있었고, 마침 폴란드 여자아이와 그 당시엔 꽤 오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1년간 사귀기도 했었기에 이 또한 스피킹에 도움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역시 언어는 많이 써야 는다. 내가 다니던 국제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 같이 있던 학교였는데 그래서 유치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거나 영어를 가르치는 보조역할을 수행하는 기회도 있었다. 그곳에서 느낀 점은 아이들의 성격에 따라 외국어를 배우는 속도가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요즘 바닥인 줄 알았는데 그 밑에 지하까지 있다는 우리나라의 출산율로 인해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한 명만 낳아 가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가장 비싼 교육을 받게끔 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유치원 같은. 아이가 외향적이고 말을 많이 하길 좋아하고 적극적인 성향이라면 어려서 타국의 언어를 배우는 게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모국어와 헷갈릴 수도 있으며 이로 인해 아이는 더욱 혼란스러워 할 수도 있다.
아이의 성격과 성향에 맞는 효율적인 교육을 권하는 마음을 가진 채 오늘은 이만 줄인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러므로 각자의 가정 내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 모든 부모의 의견을 존중하고 존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