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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Oct 23. 2020

S# 15 제주 디아스포라, 이카이노

- 일본에서 제주인으로 살기 

조지현 사진집 『이카이노』 중

2019년 초 '일본 속의 작은 제주'라는 부제를 단 사진집이 출간되었다. 정식 제목은 '돼지를 키우던 들판'이라는 뜻을 가진 『이카이노猪飼野』다. 이 사진집을 낸 이는 제주에서 태어나 10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이카이노에 살았던 故조지현(1938~2016)이다. 지금 지도에서 이카이노라는 지명은 사라졌다. 1973년 현재 명칭인 모모다니초 이쿠노구生野區로 바뀌었다. 사진집 제목이 이카이노인 까닭은 1965년부터 5년간 이카이노 거리를 프레임에 담았기 때문이다. 사진에 담긴 풍경은 여느 한국의 소도시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한국을 닮았다.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거리를 걷고 시장에는 한글 현수막이 걸려있고 힌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은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이카이노는 한국인 거리였고 2020년 이쿠노로 바뀐 현재 역시 그렇다. 이 거리가 더욱 특별한 이유 중 하나는 해외에서 유일하게 제주민이 모여사는 거주지라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이카이노가 한국의 제주보다 더 '제주스러운' 생활문화를 가졌다고도 한다. 이카이노에 사는 제주민들은 언제, 어떻게 이곳에서 왔으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할까? 왜 유독 이 거리에 제주민들이 모여살게 되었을까?


1922년은 기마가요마루君代丸가 시모노세키를 거쳐 오사카까지 정기 취항을 한 해다. 신문은 한 해 늦은 1923년에 제주도 대판 간 정기선 운항 소식을 알렸다.


濟州 大阪 間 항로 개시 1923년03월 06일 조선일보
제대간 항로 개시(濟大間 航路 開始)
수삼년 이래(數三年 以來) 우리 조선(朝鮮)에도 변천(變遷)이 다유(多有)하야 안일(安逸)을 연상(聯想)하던 일부(一部)인사(人士)들도 노동(勞働)의 신성(神聖)과 노동(勞働)은 인생(人生)의 직분(職分)임을 절실(切實)히 각오(覺悟)하야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도동(渡東)하는 형제(兄弟)가 제주도(濟州島)만 만여명(萬餘名)에 달(達)하나 피땀을 흘이고 저축(貯蓄)한 금전(金錢)은 래왕잡비(來往雜肥)에 대부분(大部分)이 소비(所費)됨으로 일반(一般)유지(有志)는만히 늣기던바 도동(渡東)한 우리 형제(兄弟)를 위(爲)하야 대판(大阪)에 조선인구제회(朝鮮人救濟會)를 조직(組織)하고 만히 노력(勞力)하는 제주도(濟州島) 청년(복年) 김병돈씨(金秉敦氏)는 우리 형제(兄弟)의 피땀이 도로(徒勞)에 불과(不過)함으로 만일(萬一)이라도 구제(救濟)코자 백방(百方)으로 주선(周旋)하던바 대판(大阪)에 본점(本店)을 둔 니기기선부(尼埼汽船部)와 제주도주도(濟州島洲島) 상선주식회사(商船株式會社)의 양해(諒解)를 잇고 제주대판간(濟州大阪間)에 두 회사(會社)가 협력(協力)하야 항로(航路)를 개통(開通)하게 되얏는 일인(一人)의게 대(對)하야 비용상(費用上) 오육원(五六圓)의 이익(利益)이 되겟다하는바 일만명(一萬名)의 승객(乘客)이 잇다하면 제주도상(濟州島上) 오육만원(五六萬圓)의 이익(利益)이 된다더라(濟州)
히라노 강 /조지현 사진집  『이카이노』 중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부터 조선인들이 일본에 가기 시작했다. 대부분 경제적 이유에서다. 특히 홍수 때마다 범람하던 오사카 이카이노 지역의 히라노平野 강에 운하에 건설되며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몰려든다. 일본 입장에선 조선에서 온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다. 운하가 완공된 이후에도 조선 노동자들은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광산이나 건설 일용직, 항만 등에서 일을 계속했다. 엄청난 빚을 지며 일본에 건너왔기 때문에 쉽사리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조선인들이 도일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다. 일제는 그동안 관행적으로 인정되던 토지소유권이나 임차 임대권을 부정했고 이 과정에서 농사 지을 땅을 잃은 농민들은 대거 만주와 일본으로 떠나 노동자가 되었다. 조선 이주노동자의 또 다른 변수가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다. 초창기 일본 도항자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1차 대전으로 호황을 맞이한 일본은 한신공업지대를 중심으로 제조업 번성기를 맞는다. 노동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조선에 노동자 모집 브로커를 파견하면서 도일 노동자의 수는 급격히 증가한다.


조선총독부는 3.1 독립운동으로 조선인의 도일을 엄격하게 제한했음에도 일본 이주노동자는 꾸준히 증가한다. 근본적인 원인은 산업화, 공업화 단계에 진입한 일본의 값싼 노동력 수요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1920년대 일제는 조선인의 일본도항을 제한하거나 허용하기를 반복했다. 조선 이주 노동자로 인한 일본내 실업과 치안문제가 발생해 조선 총독부가 규제도 나섰으나 소극적이었다. 한편 조선 노동자의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대부분 소작농 출신이었던 조선 노동자들은 특별한 기술도 없었고 일본어를 할 줄도 몰랐기에 광산노동자나 도로공사, 일용잡부 등 값싼 노동에 종사했다. 조선인은 같은 일은 하는 일본인 노동자의 임금의 60~70% 심하면 50%에 불과한 임금을 받았다.

조지현 사진집  『이카이노』 중                                

1920년 4,500명이던 조선인들은 1929년 65,000명으로 늘어났다. 1930년대에는 더 가파르게 증가하며 1935년 오사카에만 202,311명이, 1942년에는 그 수가 두 배 가까이 늘어 412,748명에 달했다.(金贊汀, 1985, 《異邦人は君が代丸に乘って》, 東京 : 岩波書店)특히 오사카는 제주도로의 유입으로 1924년 오사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60%가 제주민이었다. 1931년 일본도항자 30,822명 중 28,342명이 제주도민이었고 그중 22,847명이 제대 정기 운항선을 이용했다.(桑田芳夫 1996) 당시 제주인구가 20만인 것을 감안하면 도민의 30%가 일본을 오간 것으로 볼 수 있다. 


1922년 제주에서 일본 오사카로 가는 아마가사키 기선회사가 직통항로가 개설된 이후 조선우선과 동아통항조합까지 가세해 배운임이 3엔까지 떨어지는 등 과열 양상을 보였다. 1931년 동아통항조합이 운항정지를 당하고 6엔 50전으로, 1936년에는 8엔, 16엔으로 오른다.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약 5만원에서 10만원에 해당하지만 당시 숙련 기술자의 임금 수준이 현재의 15% 수준이기 때문에 체감 액수는 훨씬 크다.


1934년 4월 조사에 결과 제주출신 이주노동자의 연령별 인원은 아래와 같다. 

15세~20세    7,728명 

21세~25세    10,206명

26세~30세    9,244명

31세~35세    6,923명

36세~40세    4,783명

15세~40세에 이르는 청장년의 수가 38,884명으로 전체 이주 노동자의 78%를 점유했다.  직업별로는 방직공 6,623명, 고무공 5,934명, 철공3,991명, 유리공 2,927명, 자유노동 3,263명이며 여성은 방적공, 고무공, 재봉공과 해녀가 추가되었다.  


오사카에는 제주 일본 이주노동자를 돕기 위한 공제회가 설립되었다. 주로 일자리 소개, 숙박 등 주거 편의시설 알선, 저축 장려, 위생의식 보급 등의 사업을 펼쳤다. 일보능로 이주 노동을 하기 위해서는 공제회 조합원 가입이 허가 사항이었다. 농한기인 1월에서 4월 기간에 도일 노동자가 집중되었고 9월 추석 때는 귀향자가 증가했다. 1933년 제주 이주노동자의 송금 액수는 86만엔에 달했고 1928년에는 130만엔으로 최고 송금을 기록했다. 직접 현금을 들고 귀향하는 액수까지 합산하면 그 액수는 엄청날 것으로 추측된다. 제주 내 통화의 90%가 이들이 유입한 일본 화폐로 유통되었다.  단적인 예로 경성과 같은 대도시에서도 1백엔짜리 지폐가 흔치 않은데 제주의 웬만한 가게에는 손이 베일 듯한 1백엔 짜리 새 지폐가 흔했다고 한다.   


일본으로 이주한 제주민들은 주로 히라노강平野川 인근의 이카이노에 모여 살았다. 츠루하시 시장 남동쪽 지역으로 현재 이쿠노구다. 다른 지역민도 있었지만 제주민이 절대적 다수로 제주민 거리라고도 한다. 제주도 출신은 매우 긴밀한 사적 조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지연 결합체인 이 조직은 새로운 이주민의 일본 생활 적응에 도움을 주었다. 재일 제주민 1세의 경우 '촌친목회'라는 지연결속체에 속한다. 같은 마을 출신이란 의미는 일본에 오기 전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부터 알고 지낸 매우 가까운 인간관계임을 뜻한다. 1세들은 촌친목회를 통해 제주민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유지했다. 친목회는 심지어 혈연관계인 종씨집단 보다 우위라는 주장도 있다. 친족회의 요구는 응하지 않아도 신세를 진 친목회의 부름에는 반드시 따르면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高鮮徽, 1998,《20世紀の滯日濟州道人: その生活過程と意識》, 東京 : 明石書店)


고선휘에 따르면 일본에서 태어난 제주민 2,3세 또한 친목회에 대한 태도가 1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이들은 마을 친목회원들 사이의 관계는 선조대로부터 계속되어 온 친척 또는 친척과 유사한 것으로서‘ 미우치身內’나 ‘도모다치友達’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제주도민들은 친목회 유지를 위해 오랜 기간 무상봉사도 하며 상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조지현 사진집  『이카이노』 중

한반도 내에서 제주민은 각종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일본의 조선인 사회에서도 이방인이었다, 오사카에사는 육지 출신들과 자주 충돌을 빚었다. 육지 사람들의 제주도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이 이유였다. 관습과 생활문화가 다르고 특히 소통조차 어려운 사투리로 배타적 관계로 회피하거나 서로 차별했다. 오사카에 정착한 제주민들은 그럴수록 치밀한 상호부조 조직을 형성에 이중적 차별에 맞섰다. 특히 가족 내에서 여성의 여성의 역할은 타 지역과 뚜렸히 구분되었다. 제주 여성들은 독립적이며 남성과 대등한 경제적 위치를 가졌다. 그 밖에도 제사관행, 식생활, 남녀관계, 친족용어 등이 매우 달랐다. 이쿠노의 중심인 츠루하시鶴橋역 근처 츠루하시 시장이나 조선시장에는 지금도 길거리 행상들이 한국과 관련된 상품들을 거래하고 있다. 이 시장의 유래 또한 제주 여성들이 길거리 행상을 하며 시작되었다고 한다. (Ryang, Sonia, 2000a, “Osaka's Transnational Town: An Ethnography," In Sonia Ryang ed. Koreans in Japan: New Dimensions of Hybrid and Diverse Communities. Korean and Korean American Studies Bulletin Vol. 11, No. 1.)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 노동에 종사한 조선인노동자들은 사회적으로도 심한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 되었고 일본의 언론은 이를 조장하였다.조선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적 태도는 1923년 관동대지진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조선인이 방화하였다”거나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 퍼뜨리며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적대감을 배설했다. 핑계거리를 찾던 일본인 자경단원들은 약 약 6천~2만명의 무고한 조선인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일본정부는 방조와 방관으로 일관했다. 억압된 일본 사회에 팽배한 분노의 대상은 이주 노동자였던 조선인이 되었다. 조지현은 사진집에서 일제 식민지 시절 기미가요마루는 ‘노예선’이었다고 정의한다. ‘자이니치’라는 하층민으로 살며 일본 주류사회에 결코 편입할 수 없는 신분제적 차별을 받았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8년 4월에 “국가총동원령”을 내렸고 1939년 7월에는 “국민징병령”을 발표하였다. 이른바 “조선인 노동자 모집 및 도항 취급 요강”을 발표하여(1939년 9월) 광산 노등 등을 위한 ‘모집연행’이 시작되었다. 조선인의 저항을 우려하여 ‘모집’이라는 형식을 취하였을 뿐이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동원인원을 할당하는 등 조직적인 강제연행에 나섰다. 심지어 시장에 가거나 들에서 일을 하는 사람을 끌고 가거나 심야에 면직원이 경찰을 앞세우고 집에서 잠자던 사람을 끌어가는 ‘선인鮮人 사냥’도 서슴치 않았다. 이렇게 강제연행된 인원은 1939년부터 1945년 까지의 기간 중 대략 72만 5천명 이상이었다. 그 중에서 57%에 달하는 41만명이 석탄광산과 금속광산에 배치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사고와 질병으로 죽어갔다. 물론 강제 노역에 대한 정당한 비용도 지불하지 않았다. 일본은 또한 1944년부터 조선인을 군인과 군속으로 본격적으로 ‘징용’하였는데 1945년까지 군인이 약 23만명, 군속이 14만 5천명으로 합계 37만 5천명에 달한다. 군인․ 군속과 강제연행자의 총합계는 최소한 1백만 명을 넘으며 그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조선 여성이 군대위안부로 끌려갔다.

1997년 12월 24일, 강제징용 피해자 여운택, 신천수는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무려 20년을 끌어왔던 소송은 2018년 10월 30일 판결났다. 대한민국 대법원은 신일본제철(신일철주금)이 강제징용 피해자 4명에게 1인당 1억 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원고 4명 중에서 3명은 사망했다. 휠체어를 타고 온 유일한 생존자 이춘식은 98세였다. 현재까지도 일본은 강제징용을 부정하고 적반하장으로 경제보복으로 맞섰다.


조지현 사진집  『이카이노』 중

1995년 타니 도미오谷富夫는 조사를 통해 상대적으로 이카이노에 제주민을 비롯한 재일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거주해왔으나 일본 사회와의 관계는 거의 존재치 않았다고 밝힌다. 즉 두 집단은 같은 지역에 살고 있으면서도 서로 거의 아무런 교통이나 접촉이 없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이 지역에 유서깊은 축제인 '단지리'에 참여하는 한인이 조사 당시 단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 타니 도미오는 이같은 일본사회와 이카이노의 재일 한국인 사회의 관계를 '박탈적 관계'라 칭한다.


1945년 해방 직전 일본에 거주했던 조선인은 200만에 달했다. 해방 후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고 약 55만의 조선인이 일본에 남았다. 이들은 올래된 일본 생활로 경제적 기반이 일본에 있었고 국내에는 삶의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귀향을 원하는 자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단돈 1천엔만 수중에 쥐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도 이들의 귀국을 가로막은 원인이 되었다. 문제는 일본에 남은 재일 조선인의 법적지위다. 종전 후 주어진 '정주 외국인'이라는 법적 지위는 각종 제도적 차별의 근거가 된다. 일본 패전 이전까지 일본제국의 황국신민으로 살 것을 강요당하던 조선이주민들은 졸지에 국적을 박탈당하고 외국인으로 분류된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대부분의 재일 한국인은 조선국적을 갖고 있었으나 조약 이후 남과 북을 지지하는 두 집단으로 나뉘었고 그나마 '남조선'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조선국적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들은 국적도 없는 외국인되었고 고향조차 갈 수 없었다. 제주 이주민의 경우 이같은 갈등은 더 중첩된다.


조선인 학교를 다니는 여학생/ 조지현 사진집  『이카이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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