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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Nov 18. 2020

S# 20 소라이야기

- 성城 또는 통조림

가장자리 둘러싼 곳에 칼날같이 날카로운 성이 있다. 
입구에 하나의 골이 시작되고 있고 안쪽 골 언덕은 험하게 깎여 
날카로운 각을 이루고 있으며 그 끝도 역시 날카롭고
바깥 골 끝 또한 높이 솟아 있다. 
이것을 잘 갈아서 술잔이나 등기(燈器)를 만든다.

          
- 검성라劍城蠃·소라 / 『자산어보玆山魚譜』 정약전 1814년



뿔소라

살짝 데쳐서 썰어 먹으면 솔직히 전복인지 소라인지 가늠 되지 않았다. 맛은 물론 씹는 식감도 엇비슷하다. 제주 토박이가 아닌 다음에야 귀한(?) 전복을 자주 접해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겐 소라나 전복이나 매일반 마찬가지다. 사실 소라는 제주에서 전복의 그늘에 가려져 다소 과소평가된 게 사실이다. 얕은 바다에 들어가면 바위틈 사이에 어김없이 찾을 수 있는 게 소라다. 전복은 드물기도 하지만 어지간한 사람 눈에는 쉽게 보이지도 않는다. 제주바다에는 그만큼 소라가 흔하다.



참소라, 비뚤이소라, 뿔소라 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제주에서 나는 건 거의 뿔소라다. 바닷물이 다소 차가운 늦봄에서 초여름에 산란을 위해 갯바위로 스멀스멀 오른다. 육지에선 보통 삶아먹지만 제주에선 생으로 또는 불턱에 구워 먹기도 한다. 생으로 먹으면 오독오독한 맛이 살아있고 바다의 체취도 진하다. 소설가 한창훈은 '맛이 달고 맑다'라고 했다.



소라는 알맹이는 먹고 껍질은 나전칠기螺鈿漆器의 재료로 쓴다. '나전'을 풀이하면 소라 라螺, 비녀 전鈿이다. 우리말로는 '자개'다. 또한 껍질을 바둑돌이나 단추의 재료로도 쓰는데 서귀포에도 전복과 소라 껍데기로 만드는 '단추공장'이 있었다. 바늘 가는데 실 간다고 소라 속살을 가공하는 통조림 공장 옆에는 단추 공장이 있기 마련이다.



1920년대부터 어선의 동력화가 가속화되면서 전복과 소라의 대량 채취가 가능해졌다. 이들 생산물을 유통하는 해산물 도매상이 탄생했고 부산물인 전복과 소라의 껍데기를 이용한 패각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물론 처음 제주에 이런 공장을 들인 이들은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제주민들도 돈이 되는 사업에 뛰어든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법환 출신 강성익이다. 1918년 4월 약관 26세였던 강성익은 자본금 5,000원으로 전복, 소라 통조림 제조공장을 설립하여 알맹이는 일본에 통조림으로 가공, 수출하고 껍데기는 단추를 만들었다. 일명 조개 단추공장이라 불렸던 자본금 1,000원의 제주도패구주식회사다. 1925년 강성익 통조림 공장은 6명의 노동자로 연간 730상자를 생산 8,430원의 매출을 올렸으며 조개 단추공장은 노동자 20명, 연간 1,760관 생산, 매출액 6,160원에 달했다. 이 사업으로 자본을 축적한 강성익은 운수회사와 전분공장 등 잇달아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산남 일대를 대표하는 근대 사업가로 입지를 굳힌다.



소라 통조림



조선일보 1939년 07월 20일


명산제주도 소라·고동 적극장려책을 연구
= 육은 관제로 각은 단초로 수출, 기술자도 초빙할 계획
조선의 특산이요 명산인 제주도 “소라” “고동”의 통조림과 “조개단초”는 만근수삼년이래로 외국에서 환영하기 시작하야 사업은 갑작히 대발전기에 들게되엇다. 원래 이소라 고동 단초는 일본내지경판지방을 경유하야 외국으로 수출하는 것인데 그중에 특히 단초는 전국생산액의 약사할이 제주도에서 생산하게 되어 이 공장도 상당히 발달되엇던 것이다. 이업은 그 육은 관제품으로 맨들고 그 껌질은 단초를 맨드는 것이니만치 일거양득의 산업이여서 제주도개발에도 일대사업으로 중요시되어잇다 그래서 총독부식산국에서도 이의 장려조장에 연구를 거듭하고 잇고 사업자들도 일대확장계획을 수립하고 매진할 목적이라는데 현하전시경제체제에 잇어서 외국무역진흥이 국력산업발전과 대외위체 균형유지등방면으로 보중대의의를 가지고잇다 함은 누언을 불요하는 바이지마는 원료가 풍부하고 또 제삼국수출품이니만치 사업의 왕성은 자못 주목되고 잇다.



통조림 공장이 제주에 처음 들어온 것은 1912년이다. 성산포와 건입리(제주)에서 통조림 제조를 시작했다. 1923년 『미개未開의 보고 제주도寶庫 濟州島』에서 구로이타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라가 제주 전 연안에서 많이 생산된다.  해녀에 의해 한창 채취된 대는 말려서 육지로 반출하지만 대부분 통조림 업자에게 팔려 통조림 제품으로 내지, 부산방면으로 반출된다. 성산, 한림, 남원 위미 등에 통조림 공장 통조림 공장과 조개 단추공장 등이 있다. 식량 통조림에도 전복, 소라, 삼치, 장어 등의 통조림을 내놓고 있고 공업으로 통조림, 조개 단추, 멸치 찌꺼기 수공업 관물, 조선 빗, 신, 양말, 요업, 죽세공 품을 생산한다.   조개 단추 제조업은 한때 왕성하였으나 무역 부진 때문에 현저히 생산액이 감소되었다. 현재 9개소의 공장이 있는데 연간 45상자를 제조하는데 불과하다, 원료는 주로 소라고 오사카와 와카야마 지방으로 송출한다. 
- 1923년 『미개未開의 보고 제주도寶庫 濟州島』




소라의 성


뜬금없는 소리지만 서귀포에는 소라의 이름을 딴 건축물이 하나 있다.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했다고 알려진 '소라의 성'이다. 소라의 성은 전망대, 식당 등으로 쓰다 제주올레 사무국이 한때 입주했었고 현재는 시에서 운영하는 북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소라의 성은 이름에서부터 미스터리한 점이 많은 건축물이다. 일설에 의하면 1969년 완공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 별장 경호원 실로 지었다는 설도 있고 전망대 또는 식당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원형 구조의 외관을 가졌고 2층으로 올라가는 입구도 1층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나선형 계단을 통해 진입하는 구조를 가졌다. 르 꼬르비쥐에의 제자였던 김중업의 설계라기보다는 차라리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구엘공원이나 까사밀라를 빼어 닳았다. 소라의 성이란 이름도 정식 명칭이라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아마도 2층에 올라가는 계단이 소라의 속처럼 나선 구조로 되어있어 서귀포 사람들 사이에서 소라의 성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건축 명의 정확한 출처를 알고 있는 분은 알려주기 바란다.)


소라의 성은 안전진단 C 등급을 받으면서 철거될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김중업의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의견과 건물의 외형이 가진 예술성, 상징성을 평가받아 철거를 면했다. 그러나 가파른 절벽에 위치해 지반이 불안전하고 건물의 노후화로 인해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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