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재설계: 디지털 통화 시대, 대한민국이 써야 할 다음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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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둘러싼 민주주의의 과제와 한국의 선택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은 글로벌 경제질서 속에서 뛰어난 적응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제조·수출 강국으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동안 유지되어온 세계 금융·통화 시스템의 안정성과 일관성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전환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더 이상 ‘글로벌 표준’에 순응하는 것만으로는 국가의 경제적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25년 4월, 미국은 한국을 포함한 주요 교역국들에 대해 일방적인 상호주의 관세(Reciprocal Tariff)를 부과하며, 동맹국에조차 경제적 보복을 가할 수 있다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한 무역 갈등을 넘어, 달러 중심의 통화 질서 자체가 외교·안보와 분리될 수 없는 무기화된 구조로 전환되고 있다는 징후로 해석된다. 전통적인 동맹과 다자주의 시스템이 더 이상 경제적 안정의 보증 수단이 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실물경제의 근간이 되는 계층이 흔들리고 있다. 고금리, 소비 위축, 과도한 부채에 의해 생계 기반이 무너지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채무불이행과 폐업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이러한 구조적 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더 이상 기존의 화폐 시스템과 경제 정책이 자신들의 삶을 지탱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 어렵다. 통화에 대한 신뢰, 그리고 국가의 경제적 통치 역량에 대한 신뢰 자체가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이러한 대내외 환경 속에서, 대한민국은 이제 ‘화폐’를 단순한 유통 수단이나 회계 단위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전략적 거버넌스의 핵심 수단이자 국가의 주권적 의사표현 도구로서 재정의해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 이 글은 그러한 관점에서 대한민국이 추진해야 할 화폐 개혁의 방향성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국가가 마주한 구조적 경제위기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명목상으로 볼 때, 한국의 인플레이션 수준은 여전히 OECD 국가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낮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수치의 완만함이 곧 체감의 안정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히 서민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물가 상승의 체감 강도는 통계 수치 이상으로 심각하다. 이는 단순히 일시적인 가격 상승이 아니라, 화폐가 지닌 가치 척도로서의 기능이 점차 왜곡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할 만하다.
최근 수년 간 누적된 생활물가 상승은 임금의 실질 가치를 잠식하고 있으며, 주거비·교육비·식료품비 등 필수 지출 항목에서의 지속적 상승은 중위소득 계층에게도 미래 재무계획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가계부의 압박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국민이 '화폐'를 인지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며, 정책과 제도에 대한 신뢰의 기반을 흔드는 심리적 파열로 이어진다.
특히 현재의 고액권 중심 화폐 단위는 체감 가격과 실물 가치를 인지하는 데 혼선을 유발한다. 예컨대, 10,000원이라는 단위가 점점 체감상 ‘작은 돈’이 되어가면서,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에게 가격 책정, 소비 선택, 경영 판단의 기준점이 흐릿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는 소비심리를 위축시킬 뿐 아니라,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에게는 수익 구조의 계획성과 가격 전략 수립에 있어 실질적인 장애가 된다.
이러한 ‘화폐의 심리적 탈중심화’는 경제학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의 장기적 부작용이자, 거시경제 정책의 미세조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감각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제시하는 “물가 상승률은 안정적이다”라는 설명이 국민의 체감과 괴리를 가질수록, 국민은 화폐와 제도에 대한 신뢰 자체를 점차 철회하게 된다.
결국, 이와 같은 문제는 단순히 금리나 유동성 조절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다. 화폐 단위의 직관성과 신뢰를 회복하고, 국민에게 ‘국가의 경제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상징적 확신을 제공하는 것이 선결 과제가 된다. 이를 위한 방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리디노미네이션’, 즉 화폐 단위의 명목 조정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실질 가치를 바꾸지 않으면서도, 단위 체계를 간소화하고 국민의 직관적 인식을 회복시킬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이다. 성공적으로 추진된다면, 이는 단순한 숫자의 변경을 넘어 국가 경제 거버넌스가 국민의 생활 감각과 다시 맞닿으려는 상징적 노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
대한민국 경제의 중요한 축을 구성해온 자영업은 지금 구조적 붕괴의 갈림길에 서 있다. 과거에는 중산층 진입의 한 형태로 여겨졌던 자영업이 이제는 고용의 불안정성, 사회안전망의 불충분, 산업 구조 재편의 부담이 집중되는 곳이 되었다. 특히 팬데믹 이후 급속한 대출 증가와 플랫폼 기반 유통 질서의 변화, 고금리 기조는 자영업자들에게 과도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
금융당국과 여러 연구기관의 자료에 따르면, 전체 자영업자의 60% 이상이 3개 이상의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고 있으며, 1인당 평균 부채는 4억 원을 상회한다. 이러한 수치는 단순한 유동성 부족을 넘어서, 경제 시스템이 이들의 생존 가능성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다수의 자영업자들이 이미 사실상 상환 불능 상태에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전히 그들에게 "버텨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사업이 지속 가능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정상적인 폐업조차 존엄하게 허용되지 않는 현실에 있다. 폐업은 개인의 실패가 아닌 산업 생태계 변화에 따른 전환 과정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정부 정책 역시 이를 전제로 설계되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자영업자의 '생존 지원'이 아니라, ‘질서 있는 철수(exit)’를 위한 사회적, 제도적 플랫폼 구축이다.
이 과정에서 화폐개혁, 특히 디지털 원화 기반의 정교한 정책 설계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디지털 화폐를 기반으로 한 공공정책 집행은 폐업 지원금, 재기 바우처, 채무조정 인센티브 등의 집행을 목적별·조건별로 프로그래밍 가능하게 만들며, 자원의 낭비 없이 정확한 대상에게 도달할 수 있다. 이로써 자영업자는 ‘도산 후 파산’이 아닌 ‘철수 후 복귀’의 경로를 선택할 수 있다.
또한 디지털 화폐를 활용한 폐업 지원은 단순한 단기 보전에 그치지 않고, 노동시장 재편과 사회 안전망 확장이라는 국가적 과제와도 연동될 수 있다. 자영업에서 퇴장하는 시민이 재취업, 재교육, 혹은 새로운 경제 활동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체계는 국가 생산성의 유지를 위한 투자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자영업자의 위기는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니라, 화폐 시스템이 사회 구성원의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지속 가능하지 않은 생존’이 아닌, ‘복귀 가능한 폐업’이 제도화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경제 회복의 출발점이다.
디지털 전환이 경제 전반에 걸쳐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화폐 역시 단순한 디지털화(digitalization)를 넘어, 통화 시스템 그 자체의 재설계(digital transformation)라는 차원으로 논의의 지평이 확장되고 있다. 디지털 원화(CBDC)는 이 같은 흐름 속에서 단순한 결제 수단의 진화가 아니라, 경제정책의 정밀성과 유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국가 거버넌스 도구로 주목받고 있다.
기존의 화폐 체계는 재정 정책과 통화 정책이 개별적으로 작동하며, 경기 대응이나 복지 전달 과정에서 시간과 비용, 행정적 마찰을 수반한다. 반면, 디지털 원화는 국가가 설정한 조건에 따라 사용 용도, 유효 기간, 수혜 대상 등을 프로그래밍할 수 있어, 정책의 목적과 실행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다. 이는 복지·소득 지원·폐업 보조·재기 교육 등의 공공정책이 전례 없는 정밀도로 구현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자영업자에게 지급되는 ‘사업정리 보조금’이 디지털 원화 기반으로 집행될 경우, 해당 자금은 임대료 정산, 고용인 퇴직금, 잔여 세금 납부 등으로만 사용되도록 설정할 수 있다. 혹은 디지털 채널을 통해 퇴직 후 일정 기간 이내 재교육 프로그램을 수강한 자에 한해 추가 인센티브가 자동 지급되는 방식도 가능하다. 이러한 설계는 정책의 정당성과 수용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구조를 가능케 한다.
더 나아가, 디지털 원화는 금융 포용성(financial inclusion) 측면에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전통적인 금융 인프라에 접근이 제한적인 고령층, 저신용 계층, 비정규·자영업자 등도 디지털 기반의 공공 금융 채널을 통해 기초적인 경제 참여자이자 정책 수혜자로 포섭될 수 있다. 이는 국민 누구도 제도의 사각지대에 남지 않도록 하는 포용적 경제의 기반이 된다.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디지털 원화는 단순한 국내 혁신을 넘어 대한민국의 통화적 주권을 강화하고, 외교적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전략 자산이 된다. 기존의 글로벌 금융 질서가 미국 달러화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는 가운데,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통해 독자적인 금융 생태계를 구축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플랫폼들은 각기 정치적 신뢰성, 기술적 투명성, 법적 안정성에 대한 한계를 안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은 민주주의 기반의 법치와 기술력을 갖춘 중견국가로서, 정치적 중립성과 기술적 신뢰를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디지털 통화 인프라 설계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디지털 원화를 통해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동·아프리카 등과의 양자결제 협력, 기술 표준 공유, 규제 협약 체결 등 새로운 외교적 지평을 개척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디지털 원화를 단순한 기술적 프로젝트가 아닌, 국가 전략 체계 내 핵심 거버넌스 자산으로 인식하고 설계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법제도적 기반, 프라이버시 보호, 금융기관과의 조율, 국민적 수용성 등을 고려한 다층적 설계 전략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지난 수십 년간 글로벌 금융질서의 틀 안에서 규범을 따르고 제도를 모방하며, ‘정상국가화’를 지향하는 모범적인 수용국(rule-taker)으로서 성장해왔다. 이러한 태도는 산업화와 세계화 초창기에는 효과적이었고, 국제사회의 신뢰를 쌓는 데에 기여했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는 그러한 수동적 접근만으로는 더 이상 국가의 경제적 주권을 지킬 수 없는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특히 글로벌 통화 질서는 미국의 달러화 체제와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 플랫폼이라는 양대 구도로 재편되고 있다. 전자는 금융제재·관세·외환통제 등으로 무기화되고 있으며, 후자는 기술적 선진성에도 불구하고 투명성과 법적 안정성, 정치적 신뢰 측면에서 여전히 국제사회의 우려를 받고 있다. 이 사이의 간극, 즉 ‘신뢰할 수 있으면서도 과잉지배적이지 않은 통화 질서’의 공백이야말로 한국이 전략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한국은 기술력, 제도적 투명성, 민주주의, 규제 인프라 등에서 국제적 신뢰 기반을 갖춘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이러한 조건은 디지털 통화 시대에 '패권국’이 아니더라도 ‘규칙 설계자(rule-setter)’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자산이다. 디지털 원화를 기반으로 한 국제결제 협력, 정책 기술 표준화, 다자 플랫폼 구축 등은 한국이 경제·외교 영역에서 소프트 파워를 실질적 구조로 전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중동 및 아프리카 등 중소국과의 디지털 통화 결제 네트워크 구축, 양자 혹은 다자 CBDC 연동 협정, K-핀테크 생태계 수출과 결합된 통화 인프라 제공 등이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 수출을 넘어, 한국이 ‘공정하고 신뢰 가능한 디지털 통화 질서’를 선도하는 국가로 자리잡는 전략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환은 자연스럽게 발생하지 않는다. 의식적이고 전략적인 정책 전환, 정부 간 협의, 민관 파트너십, 그리고 국제사회와의 제도적 연계 설계가 수반되어야 한다. 특히 통화 관련 거버넌스를 외교 정책 및 개발 협력 전략과 유기적으로 연결하려는 통합적 정책 시각이 요구된다.
결국, 디지털 통화 시대의 리더십은 과거처럼 금 보유량이나 군사력에 기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책 설계의 정교함, 기술의 투명성, 사회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 모든 측면에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이제는 자신 있게 새로운 룰을 제안하고, 그 룰을 사용하는 국가들을 연결할 수 있는 능동적 국가로 탈바꿈할 차례다.
화폐는 단순한 교환 수단이나 회계 장치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사회와 시민에게 말하는 언어이며, 신뢰를 매개로 한 통치의 도구이자, 세계를 향한 주권적 선언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의 단위, 구조, 방식에는 국가가 무엇을 보호하고, 누구를 위하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는지가 담겨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그 화폐 언어를 다시 써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인플레이션의 압박과 불투명한 가격 체계는 국민들의 경제 감각을 흐리게 하고 있으며, 자영업을 포함한 취약 계층은 생계 유지와 제도 신뢰 사이의 균열 속에서 고립되고 있다. 기존의 화폐 구조는 더 이상 이들의 현실을 담아낼 수 없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화폐 개혁, 즉 리디노미네이션과 디지털 원화의 도입은 단순한 기술적 조정이나 외형적 상징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국민과의 심리적 신뢰를 재건하고, 경제 정책의 정밀도를 높이며, 글로벌 통화 질서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전략적 구조 설계의 시작이다.
우리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기존 질서 속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우리만의 통화 체계, 정책 설계, 가치 기반 디지털 질서를 먼저 제안함으로써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 국가가 될 것인가. 대한민국은 기술력과 제도적 기반, 그리고 국제적 신뢰를 갖춘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며, 이는 결코 작지 않은 자산이다.
화폐는 더 이상 가치의 수단이 아니라, 신뢰의 설계이고, 국가 전략의 언어다.
이제 대한민국은, 그 언어로 다음 문장을 써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따라가지 않는다. 우리는 설계한다.”
다음 칼럼에서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둘러싼 민주주의의 과제와, 디지털 통화가 자유를 확장할 수 있을지 혹은 통제로 이어질지를 중심으로 한국의 선택지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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