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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통화, 자유인가 통제인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둘러싼 민주주의의 과제와 한국의 선택

by Maru Kim

이 글은 앞선 칼럼 「화폐는 전략이다: 한국이 새로운 통화 질서를 설계해야 하는 이유」의 연속으로, 디지털 원화와 화폐 개혁의 정치·윤리적 쟁점을 보다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전 글 보기 | 한국이 통화개혁으로 새로운 질서를 설계해야 하는 이유



디지털 전환이 국가의 경제 시스템 전반을 재편하고 있다. 그 최전선에 있는 것이 바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다. 많은 정부와 중앙은행은 CBDC를 결제 효율성, 금융 포용, 그리고 정책 집행의 정밀도를 높이는 차세대 금융 인프라로 주목하고 있으며, 일부 국가는 이미 시범 발행 단계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 새로운 통화가 가져올 변화는 단지 기술적 진보에 머물지 않는다. 디지털 화폐는 통화의 발행과 유통뿐 아니라, 개인의 자산 접근성과 금융 자유, 더 나아가 국가와 시민 사이의 신뢰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깊은 제도적 전환을 예고한다.


무엇보다도 CBDC는 본질적으로 추적 가능하고,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며, 중앙 집중적으로 발행된다는 특성을 갖는다. 이러한 기능은 공공지원금의 효율적 집행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맞춤형 정책 설계에 활용될 수 있는 장점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시민의 소비 자유를 제한하거나 국가의 감시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와 통제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


일부 국가는 이미 그 한계를 실험 중이다.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는 사용 기한이 설정된 화폐, 특정 상점에서만 사용 가능한 목적 제한 화폐 등의 기능을 통해 금융을 통한 사회 통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가 디지털 통화를 설계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따라서 지금 이 시점에서 필요한 질문은 단순히 “CBDC를 도입할 것인가?”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원칙과 제도로 그것을 설계할 것인가?"

CBDC는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술을 어떤 철학으로 통제하고, 어떤 제도적 설계로 한계를 둘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이 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CBDC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자유와 통제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이뤄야 하는지를 논의하고, 특히 한국이 어떤 원칙 아래에서 이 제도를 설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과 실질적인 제안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기술이 아닌 통치의 문제: 디지털 화폐에 대한 우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는 명목상으로는 ‘효율성’을 위한 도구다. 거래 속도를 높이고, 중간 비용을 줄이며, 보다 정확한 재정 정책 집행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정부와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매력적인 시스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로 이 효율성이라는 명분 아래, 디지털 통화는 과도한 권력 집중과 감시의 도구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우려는 화폐의 사용이 실시간으로 추적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물리적 화폐는 익명성이 보장되는 몇 안 되는 결제 수단이며, 시민이 제3자의 개입 없이 자유롭게 자산을 사용하는 마지막 수단이다. 하지만 CBDC는 설계에 따라 모든 거래가 기록되고, 특정 조건 하에서 지출을 제한하거나 심지어 사용 시한을 부여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금융 혁신이 아니라, 돈을 통한 통치권의 확장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는 이러한 우려를 현실화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해당 시스템은 시범 운영 과정에서 사용 기간이 만료되면 소멸되는 디지털 보조금, 특정 업종이나 상점에서만 결제 가능한 조건형 화폐를 도입한 바 있다. 이로써 국가는 정책의 정밀성을 확보했지만, 동시에 개인의 자산 사용 범위를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확보한 셈이다. 이런 사례는 디지털 화폐가 '유연한 정책 수단'을 넘어 행위 규범을 강제하는 권력 장치로 발전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민주주의 국가라 하더라도 CBDC가 잠재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통제 기능은 기술적으로 동일하다. 문제는 사용 여부가 아니라, 어떤 절차와 감시 체계를 통해 이를 통제할 수 있느냐는 제도적 설계에 달려 있다.
가령 "소득이 낮은 계층에게는 특정 품목에만 소비할 수 있도록 조건부 지원금을 지급한다"는 정책이 설계될 경우, 그것은 선택이 아닌 '프로그래밍된 소비'로 전환될 수 있다. 더 나아가,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진 시민이 사회적 불이익을 받는 구조와 결합될 경우, 이는 디지털 시대의 경제적 검열로까지 이어질 위험이 있다.

결국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다. 디지털 화폐의 구조와 기능을 어떤 정치적·제도적 원칙 아래 설계하느냐가 핵심이다.


CBDC는 그 가능성만큼이나 통제력을 내포한 플랫폼이다. 이 플랫폼이 국민의 자유를 확장하는 수단이 될지, 국가 권력이 사적인 삶까지 개입하는 경로가 될지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CBDC는 하나가 아니다: 설계에 따라 달라지는 미래

CBDC에 대한 논의가 공론장에서 확대될수록, 그것이 마치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등장할 것이라는 오해도 함께 커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CBDC는 단일한 기술이 아니라, 수많은 제도적 선택과 설계의 조합으로 구현되는 플랫폼이다. 그 구조와 기능은 도입 국가의 정치 체제, 법적 문화, 시민권 개념, 그리고 통화 철학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예컨대 어떤 국가는 중앙은행이 국민의 계좌를 직접 관리하는 1계층 구조(direct model)를 채택할 수도 있다. 이는 기술적으로 단순하고 비용 효율성이 높지만, 중앙집중적 통제 구조를 초래할 수 있다. 반면 유럽연합, 일본, 스웨덴 등은 2계층 구조(two-tier architecture)를 기본 설계로 채택하고 있다. 이 모델은 중앙은행이 CBDC를 발행하되, 국민과의 접점은 민간은행이나 지급결제사업자가 맡는 방식이다. 이 구조는 제도적 권한의 분산과 시장 다양성, 책임의 다원화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일부 국가는 프라이버시 보호 기능을 설계 단계에서 명시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은 10만 유로 이하의 소액 거래는 익명성 또는 비식별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기술적 구조를 연구 중이며, 스웨덴 역시 디지털 크로나 설계에 개인정보 보호 알고리즘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이 아닌, 시민의 권리와 국가의 접근 권한 사이의 경계선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제도적 의지를 반영하는 예시다.


이처럼 CBDC는 통제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신뢰의 기반이 될 수도 있다.
그 차이는 '가능성'이 아닌 '설계'에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의 발전 속도가 아니라, 그 기술을 다루는 사회의 철학과 헌법적 기준이다.
어떤 제약을 둘 것인가, 어떤 기능을 제한할 것인가, 어떤 경우에만 사용 허가를 내릴 것인가—이 모든 선택은 정치의 문제이자 시민 참여의 문제다. CBDC는 기술 이전에 제도이며, 제도 이전에 사회계약이다.


민주주의를 위한 CBDC 설계 원칙: 신뢰 기반의 구조 만들기

CBDC가 진정으로 민주주의적 가치를 반영하는 제도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 설계 과정에서부터 자유와 신뢰를 보호하는 구조적 원칙이 내재되어야 한다. 통화 시스템은 단순한 기술 집합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과 맺는 계약의 형식이다. 따라서 그 설계는 기능 중심이 아닌 철학 중심의 접근을 필요로 한다.


첫째, 프라이버시는 기본값이어야 하며, 예외적으로만 제한 가능해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도, 소액 거래에 대한 익명성은 보호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소비의 자유가 아니라, 감시 없는 공간을 유지하는 민주사회적 권리다. 고액 거래나 불법 가능성이 있는 특수 거래에만 법률상 근거에 따라 제한적 추적이 가능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프라이버시는 국가의 허락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여야 한다.


둘째, 중앙은행은 계좌 관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CBDC의 발행 주체는 중앙은행이지만, 국민의 계좌를 직접 운영하거나 실시간으로 개입할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 민간 금융기관 또는 허가받은 지급결제 인프라가 사용자 접근을 관리해야 하며, 이를 통해 데이터와 권력의 중앙집중을 방지해야 한다. 이는 기술보다 더 본질적인 민주주의 원칙에 관한 문제다.


셋째, 프로그래머블 머니의 기능은 철저히 제한되어야 한다.

CBDC의 특징 중 하나는 지출 용도, 사용 기한 등을 지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긴급 재난지원금, 복지 지원금 등 한정된 정책 상황에서는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능이 일상적인 소비에까지 확대될 경우, 개인의 경제적 자율성이 훼손된다. 따라서 이 기능은 법적 근거와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하며, 한시적이고 목적 한정적으로만 허용되어야 한다.


넷째, CBDC 거버넌스는 기술관료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감사 기능이 독립적으로 작동해야 하며, 정기적인 국회 심사, 시민사회 참여, 공공 피드백 채널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 시스템은 단지 어떻게 작동하느냐보다, 누가 그것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투명성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의 문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디지털만을 유일한 선택지로 삼지 않아야 한다.
현금과의 공존은 선택권의 문제이자, 경제적 다양성의 문제다.
노년층, 저소득층, 디지털 취약 계층에게 디지털 통화만을 강요하는 것은 새로운 금융 소외를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CBDC는 기존의 물리적 화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수단으로 설계되어야 하며, ‘현금 없는 사회’가 아니라 ‘현금도 있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요컨대, 민주주의를 위한 CBDC는 단지 기능적으로 안전한 화폐가 아니라, 제도적으로 안전하고, 시민적으로 수용 가능한 화폐여야 한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을 얼마나 신뢰하는지를 드러내는 장치이며, 국민이 국가를 다시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회적 인프라다.


한국의 선택: 통제를 수출할 것인가, 신뢰를 설계할 것인가

지금 세계는 단순히 새로운 화폐 기술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질서를 누구의 방식으로 설계할 것인가를 두고 경쟁하고 있다. 미국이 여전히 달러 기반의 기존 금융 패권을 유지하는 한편,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통해 국가 중심의 통제형 금융 생태계를 해외로 확장하려 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통화 경쟁이 아닌, 금융 주권의 양식에 관한 충돌이다.


그 사이에서 한국은 매우 독특한 위치에 서 있다. 기술 인프라와 디지털 역량에서는 선도국이며, 동시에 투명한 법치 체계와 민주주의라는 제도적 신뢰를 갖춘 국가다. 이는 한국이 단지 기술을 수출하는 국가가 아니라, 디지털 금융 질서의 설계자로서 국제 사회에 새로운 모델을 제안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음을 의미한다.


한국이 디지털 원화를 단순한 효율적 결제 수단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신뢰 가능한 통화 시스템으로 설계할 수 있다면, 이는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다양한 신흥국들에게도 강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중국의 CBDC가 정치적 우려로 확산에 제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정치적 중립성과 제도적 투명성을 결합한 '중견국형 통화 질서'를 제시할 수 있다. 이는 디지털 위안과 달러 체제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하는 다수의 국가에게 매우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더불어, 디지털 원화의 대외적 확장은 단지 금융기술 수출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한국형 통치 철학의 수출이자, 신뢰 기반 플랫폼을 공유하려는 전략적 연대다.
이를 통해 한국은 단기적 수익이 아닌, 장기적 제도 리더십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회는 자동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기술이 있으니 주도하자’는 접근은 충분치 않다. 필요한 것은 철학의 선명함과 제도적 일관성, 그리고 무엇보다 시민적 공감에 기반한 설계 구조다. 한국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기술을 앞세운 통제형 모델을 모방할 것인가, 아니면 신뢰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질서를 먼저 설계하고 제안할 것인가.


디지털 시대의 통화는 ‘강한 나라’가 아니라, 신뢰받는 나라가 만든 규칙을 따른다.
이제는 우리가 그 신뢰를 설계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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