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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설계하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AI가 만든 아름다움이 왜 점점 감동을 줄 수 없는가

by Maru Kim

생성형 AI는 이제 도시의 얼굴을 꾸미고, 기관의 목소리를 대신하며, 감정까지 흉내 내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예쁘지만 공허한’ 감정에 피로감을 느낀다. 이 글은 감정 피로의 심리학, 진정성의 본능, Z세대의 감정 공간 소비, 그리고 공공 감정 표현에서의 윤리적 기준 부재를 다룬다. 감정을 자동화할 수 있는 시대, 우리는 감정의 주체가 누구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




감정은 더 이상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슬픔의 색감을 계산하고, 향수를 자극하는 구도를 자동 생성하는 시대. 우리는 이제 기계가 '느끼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술 속에 살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까지도 AI를 이용해 감성적인 이미지를 만들고, 시민에게 ‘좋은 느낌’을 전달하려는 시도가 급격히 늘었다. 도시의 브랜딩 영상, 지역명소 홍보물, 포스터 이미지, 심지어 인스타그램용 콘텐츠까지—감정은 점점 더 설계되고 있다.


그런데 그 ‘감정적인 이미지’를 마주한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과 다르다.
“예쁜데, 이상하게 공허해.”
“감동적이지만, 누가 만든 건지 모르겠어.”


이런 반응은 단순한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진정성(authenticity)이라는 감각이 결여되었을 때 인간이 보이는 심리적 반응이다. 심리학자 브렌 브라운(Brené Brown)은 "진정성은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신호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관계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감정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감지하는 건,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존 본능 중 하나다.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 이 메시지는 나를 향한 것인가, 저 사람은 정말 그렇게 느끼고 있는가—이런 질문들은 정치적 수사, 광고, 공공 캠페인, 예술 등 우리가 마주하는 거의 모든 감정적 콘텐츠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동한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점점 더 많은 ‘감정적 메시지’를 기계가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소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공공기관처럼 우리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조직에서 나올 때, 사람들은 점점 정서적 거리감을 느낀다.


감정을 설계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왜 점점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가?
우리는 어떤 감정에는 공감하고, 어떤 감정에는 본능적으로 피로를 느끼는가?
그리고, 감정을 대신 설계하는 도구가 신뢰를 대신할 수 있을까?


아름다움에 무뎌지는 뇌 — 감정 피로의 심리학


우리는 매일 감동받도록 설계된 콘텐츠 속에 살고 있다.


SNS 피드에는 하늘, 바다, 아이, 고양이, 자연, 감성 문구, 애니메이션풍 이미지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도시나 공공기관의 홍보 이미지도 그 흐름을 따라간다. 기분 좋은 색상, 익숙한 따뜻함, 조용한 음악과 함께 "이곳에 오세요"라는 감정을 정교하게 설계한 콘텐츠들.


그런데 이런 콘텐츠를 오래 보고 나면 이상한 피로가 남는다.
왜 우리는 ‘좋은 감정’을 유도하는 콘텐츠 앞에서 점점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감정을 반복하면 감정이 사라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정서적 습관화(emotional habituation)’라고 부른다.
미국의 심리학자 폴 로잔스키(Paul Rozin)는 ‘쾌락적 적응(hedonic adaptation)’ 이론을 통해, 인간의 뇌는 반복되는 긍정 자극에 점차 반응하지 않게 된다고 설명했다.


한 번 본 감동적인 광고가 두 번째엔 덜 감동적인 이유, 같은 노래가 반복될수록 지루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정은 익숙해질수록 감동을 줄인다.

특히 AI 이미지가 가진 매끄러운 아름다움은 인간의 뇌를 빠르게 지치게 한다.

예측 가능한 감성, 결이 없는 질감, 표준화된 스타일. 마치 ‘감정을 느끼는 듯한 인상’은 주지만, 거기에는 아무런 서사나 맥락이 없다.


결국 뇌는 이렇게 판단한다.
"이건 가짜야."


감정은 연출이 아니라 맥락이다

감정은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다. 감정은 맥락의 산물이다.
같은 장면이라도,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그 안에 어떤 ‘인간의 감정적 투자’가 있었는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예를 들어, 같은 ‘울고 있는 소녀’ 이미지라도, 전쟁 사진기자가 찍은 것과 AI가 생성한 것 사이에는 믿음의 온도 차이가 존재한다.
그 차이는 ‘표면’이 아니라 ‘기원’에 있다. 느끼고, 선택하고, 전달하려 한 누군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기술이 감정을 만들수록, 우리는 감정을 의심한다

여기서 중요한 심리적 전환이 일어난다.
우리는 감정 표현이 너무 능숙해질수록 그 진정성을 의심하게 된다.


‘너무 감동적이면 가짜 같다’는 표현은 농담이 아니다.
미국 미디어 심리학자 타냐 바이스(Tania Bice)는 “과잉된 감정 표현은 오히려 신뢰를 무너뜨리는 역효과를 낳는다”고 말한다.


AI가 만든 감동이 사람들에게 와닿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 감정은 잘 만들어졌지만, 누구의 감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완벽한 것은 믿기 어렵다 — 진정성 본능


“너무 완벽하면 오히려 믿기지 않아.”

이 말은 단순한 감상평이 아니다. 인간의 뇌는 실제로 불완전함 속에서 진짜를 찾는다.


다듬어진 문장보다 말이 꼬인 대화에 더 공감하고, 고화질 광고보다 친구가 찍은 흔들린 사진에서 더 따뜻함을 느낀다. 이는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인 방어 메커니즘이자 진정성(authenticity)을 판단하는 본능에 가깝다.


진정성은 결점 속에서 보인다

심리학자 브렌 브라운(Brené Brown)은 진정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진정성이란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감수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용기다.”


우리는 메시지의 완성도보다 ‘얼마나 솔직하게 표현되었는가’, ‘그 감정이 실제로 존재했는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름카메라 사진, 손글씨, 실시간 라이브 영상 같은 ‘덜 정제된 것들’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다. 그 안에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흔적, 실수의 가능성, 노력과 의도의 서사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AI가 만든 감동은, 누구의 감동도 아니다

반대로, AI가 만든 감정 콘텐츠는 결함이 없다.
색상은 완벽하게 조율되어 있고, 구도는 불안하지 않으며, 문장은 어느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다.


하지만 문제는 그 '감정 표현'의 기원이 누구인지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만들었는가? 왜 만들었는가? 그 감정은 정말 존재했는가?


심리학에서는 이를 감정적 진위 평가(emotional authenticity appraisal)라고 부른다.
미국 심리학자 제임스 러셀(James Russell)은 "인간은 메시지의 내용보다, 감정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더 먼저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즉, 사람들은 감정 그 자체보다 그 감정을 '누가 느꼈는가'를 먼저 본다.


결국, 우리는 사람이 만든 것을 믿는다

진정성은 기술로 대체할 수 없다.
AI는 이미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그리며, 사람처럼 스토리를 만든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서 빠져 있는 단 하나는 바로 ‘사람 그 자체’다.


우리는 여전히 감정의 출처를 중요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감정은 단순히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을 전제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교한 이미지도, 그 안에 누군가의 흔들림과 망설임이 없으면
우리의 감정은 반응하지 않는다.


힙한 공간은 왜 낡아야 하는가 — Z세대와 감정의 장소성

요즘 사람들은 ‘예쁘다’는 말보다 ‘느낌 있다’는 말에 더 반응한다.

특히 Z세대는 더 이상 반듯하고 새것 같은 공간을 힙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된 공장, 낡은 벽돌 건물, 층간이 낮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상가 건물을 카페나 전시 공간으로 선택한다. 그 안에 정리되지 않은 정서, 시간이 켜켜이 쌓인 감각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트렌디한 곳은 늘 많지만, 정서적으로 머물고 싶은 공간은 적다.


실제로 요즘 인기 있는 공간들의 공통점은 조금은 불편하고, 조금은 촌스럽고, 조금은 어딘가 이상한 곳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 곳이 이상하리만치 따뜻하다.
어딘가 부서진 모서리, 오래된 간판, 흐릿해진 색감, 낡은 냉장고가 자리한 공간.
그런 것들이 오히려 ‘사람이 있었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은 이 현상을 ‘정서적 장소성(emotional placehood)’이라 부르기도 한다.
디자인이 아닌 기억, 구조가 아닌 이야기, 기능이 아닌 기억의 흔적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완벽한 공간보다, 시간의 오류와 인간의 손길이 남아 있는 장소에 더 정서적으로 끌리는 이유.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점점 더 ‘시뮬레이션된 감정’에 둘러싸여 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알고 있다. 조금 낡은 것만이 진짜라는 역설.


감정의 발화자는 누구인가 — 공공 신뢰의 위기


감정은 누구나 표현할 수 있지만, 아무나 믿을 수는 없다.

특히 그것이 공공의 이름으로, 도시나 정부라는 집단 주체를 대신해 발화될 때, 감정은 단지 기분이나 분위기를 넘어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는 기제가 된다.


우리는 시장의 연설에 감동하거나, 도시의 슬로건에 공감하거나, 거리의 벽화에 위로받는다. 왜일까?


그 감정의 표현 너머에 ‘누가’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주체가 사라질 때, 사람들은 듣지 않는다

공공기관이 AI로 이미지나 문장을 만들어낼 때, 시민들은 그것이 ‘누가’ 말하는지 잘 모른다.
실제로 지자체가 만든 감성 홍보 영상이 “잘 만들었지만, 누가 만든 건지 모르겠다”는 평을 듣는 일은 흔하다.

이건 단순한 브랜드 문제를 넘어서는 감정의 문제다.


감정을 표현하는 주체가 느껴지지 않을 때, 시민은 더 이상 그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감정이 아무리 설득력 있어도, “나를 향해 발화된 것”이라는 느낌이 사라지면 신뢰는 무너진다.


감정 없는 감정표현은 신뢰를 해친다

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은 『Against Empathy』에서 “인간은 감정 그 자체보다, 감정을 가진 주체에 더 반응한다”고 말한다.
누가 말했는지 모르는 위로는 위로가 아니고, 누가 기뻐했는지 모르는 축제는 공허하다.

AI는 감정을 표현하지만, 그 감정이 누구의 것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따뜻한 이미지’를 보면서도, 마음 한켠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시뮬레이션된 감정은 시민의 언어가 될 수 없다

공공 감정은 단순한 미적 전략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맺기다.

우리는 그 메시지 안에 누군가의 고민과 판단, 서투름과 노력, 그 도시의 정체성을 느껴야 공감한다.

AI가 감정을 대신할수록, 시민은 점점 그 도시가 자신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정책 불신보다 더 무서운, 정서적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


규제가 비어 있는 곳에서 감정이 왜곡된다


지금 이 순간, 여러 지자체와 공공기관들이 생성형 AI를 도입해
지역 브랜딩, 도시 홍보, 관광 마케팅, 문화 콘텐츠 제작에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도구가 '감정'을 표현하는 단계까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 감정 표현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에 대한 기준도 없다는 것이다.


기술은 앞서가고, 제도는 따라오지 못한다

한국 정부는 2021년 'AI 윤리 기준'을 수립했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개발자나 플랫폼 사업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방정부나 공공기관이 시민을 대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부재하다.

즉, ‘공공의 이름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있지만,
그 감정이 어떤 맥락에서, 누구를 향해, 어떤 방식으로 쓰여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적 장치는 없는 셈이다.


국제 사례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반면 해외에서는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미시간 대학교 STPP는 2024년, 지역정부 대상 AI 가이드북을 발간하며

공공기관이 감정을 포함한 콘텐츠를 생성할 때 고려해야 할 윤리적 요건을 제시했다.


뉴욕주 의회는 2025년부터, 정부 기관이 AI로 생성한 콘텐츠를 사용할 경우

출처와 의도, 생성 방식 공개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유럽의 일부 지방정부는 AI 생성 콘텐츠에 대해

“공감의 진정성(authentic empathy)”을 평가 항목으로 포함하는 정책 초안을 논의 중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묻는다.


“기계가 감정을 말할 수 있을 때,
과연 그 감정은 공공의 것이 될 수 있는가?”


감정도 공공의 자산이다

우리는 감정을 너무 사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도시의 분위기, 시민의 정체성, 정부의 톤앤매너 모두

사실은 공공의 감정 언어로 작동한다.

따라서 공공기관이 감정을 표현할 권리를 가질 때,
그 감정이 시민에게 신뢰와 소속감을 주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사회적 논의와 제도적 틀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한다.


감정을 관리하는 민주주의 — 정서적 거버넌스의 필요


민주주의는 단지 제도나 표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질서이기도 하다.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말에 공감하고,
슬픔을 표현하는 기관에 위로받고,
축하를 나누는 도시에서 소속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감정을 표현하는 존재가 ‘기계’일 때, 우리는 여전히 그 감정을 믿을 수 있을까?


감정은 공공의 언어다

감정은 언제나 공동체의 언어였다.
우리는 국가의 추모 영상에서 슬퍼하고, 도시의 축제 이미지에서 기쁨을 느끼며,
지자체의 정책 브리핑 속 문장에서 위로를 받기도 한다.

이처럼 감정은 공공의 영역에서도 실제적인 사회적 작용을 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공공 책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기술이 감정을 흉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감정을 다르게 다루어야 한다

이제 문제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기술이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에 있다.


이제 공공 감정도 윤리, 절제, 맥락, 책임이라는 기준 안에서
관리되어야 할 시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서적 거버넌스’라 부를 수 있다.


정서적 거버넌스란,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서 출발한다.

공공기관은 어떤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감정을 표현할 때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지는 반드시 밝혀야 하는가?


시민은 공공 감정에 대해 반응하고, 피드백을 제시할 권리가 있는가?


가짜 감정, 시뮬레이션된 공감, 과잉된 감성표현에 대한 규범은 필요한가?


감정을 관리한다는 것은, 기술을 억제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기술을 막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기술을 공감과 연결, 공동체 구축의 도구로 쓰기 위해 필요한 기준에 가깝다.


지금 우리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책임지는 사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감정은 아직 사람의 것이다


감정은 기술이 가장 빨리 모방했지만,
동시에 가장 끝까지 따라잡지 못할 영역이다.


우리는 ‘표현’만으로는 감동받지 않는다.
누가, 왜, 어떤 맥락에서 그 감정을 꺼냈는지를
알고 싶어 하고, 느끼고 싶어 한다.


생성형 AI는 이제 감정의 색감도 조절하고, 스토리의 구조도 짜고, 사람처럼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미지와 문장 앞에서 놀라고, 감탄하고, 공유한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하다. 감정이 있는데, 그 감정이 머물 자리가 없다.
아무도 울지 않았고, 아무도 웃지 않았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우리는 점점 더 ‘감정적으로 설계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감정은 설계가 아니라 관계로서 살아 있는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진짜 감동은 결국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것.


감정은 아직 사람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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