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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의 정치, 상실의 시대

극우는 왜 주변에서 자라는가

by Maru Kim
상실의 시대, 감정의 정치로 이동한 시민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급진적 보수주의와 극우 정치의 부상이 이어지고 있다. 유럽의 농촌 지역에서부터 미국의 중산층 붕괴 지대, 그리고 아시아의 도시 외곽에 이르기까지, 변화에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사회적 안전망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느끼는 시민들—이 점점 더 권위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정치 담론에 이끌리고 있다. 단지 경제적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은 실질적 생계 문제보다도, 정체성과 존엄, 사회적 위치에 대한 불안정한 감정에 더 깊이 반응한다.


번영의 붕괴 이후, 신뢰 없는 사회의 귀속 욕망

이 현상은 단순히 ‘극우의 부활’로 보기엔 복합적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약속했던 ‘개인의 번영’과 ‘공정한 경쟁’이 더 이상 실현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미래를 신뢰하지 못하고, 변화에 대한 기대 대신 상실감에 반응하게 된다. 이때 정치는 더 이상 이념이나 정책의 선택이 아니라, 존재와 감정의 귀속 문제로 전환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은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시민을 정치의 장으로 끌어들이는가? 누구의 감정이 공론장에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떤 서사가 공동체의 상상력을 점유하고 있는가?


극우 정치의 부상은 이 질문들에 대답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단지 공포나 분노의 정치가 아니다. 오히려 소외된 이들이 스스로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자신을 다시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제공하는 정치적 언어다. 이 언어는 ‘배제’를 통해 ‘소속’을 제공하고, ‘권위’를 통해 ‘존엄’을 복원한다는 착각을 유도한다.


그러므로 이 현상은 경제적 조건의 산물이자, 정서적 공간의 재구성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진정한 대안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현실뿐 아니라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서사를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단지 ‘더 나은 정책’이 아니라, 더 깊이 있는 경청과 재서사화의 정치를 요구한다.




정치는 감정의 문제다 - 상실감과 정체성의 정치


정치는 더 이상 단순히 정책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공정하게 대우받고 있는지, 사회 속에서 존중받고 있는지를 느끼는 감정을 통해 정치를 이해한다. 특히 경제적 불안정, 고립, 공동체 붕괴 같은 사회적 조건은 ‘상실’의 감정으로 이어지고, 이 상실감은 곧 정치적 선택의 방향을 결정짓는 강력한 기반이 된다.


많은 이들이 느끼는 핵심 정서는 단순히 가난이 아니다. 그것은 잊혀졌다는 감정, 혹은 무시당한다는 인식이다. 자신이 말해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감각, 거대한 구조 속에서 투명 인간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 이러한 감정은 극우 정치가 제공하는 정체성과 귀속의 언어와 결합될 때, 매우 강력한 정치적 충성심으로 전환된다.


이 정치 감정의 핵심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다. 극우는 이에 대해 단순하고도 선명한 답을 제공한다. "우리는 잊혀진 국민이며, 배신당했다"는 서사는 상실감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 공동체적 환상을 형성하고, 배제의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불안은 정체성의 열망으로, 나아가 타인에 대한 분노와 단결의 감정으로 재구성된다.


문제는 이 감정이 사실의 기반보다는 서사의 구조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불안은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길 원하고, 그 해석을 제공하는 이들이 바로 극우 정치인이다. 이들은 복잡한 원인 대신 단순한 책임자—외국인, 진보 세력, 도시 엘리트 등—를 지목하며, “당신은 틀린 것이 아니라 배신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 정치 감정은 정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과 서사, 상실과 복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를 해소하려는 민주주의 역시 감정의 장을 회복하고, 공감 가능한 대안 서사를 제시하지 않는 한,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



극우의 언어 - 단순한 해석, 감정의 설계


극우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은 단순한 ‘혐오’의 조장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정교하게 짜인 서사의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 핵심은 언제나 ‘우리가 아닌 그들’의 구분이다. 이 구조는 세 가지 주요 전략을 통해 힘을 얻는다: 희생양 만들기, 공동체의 환상, 그리고 과거의 영광 회귀.


첫째, 희생양 만들기(scapegoating).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회 불안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식은 외부의 ‘탓’을 하는 것이다. 이민자, 난민, 진보 엘리트, 다문화 정책, 글로벌리즘—이 모든 것은 ‘내 삶이 어려워진 이유’로 간단하게 설명된다. 중요한 건 그 설명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납득 가능한가다. "내가 일자리를 잃은 건 시스템 때문이 아니라 저 사람들 때문"이라는 구조는 직관적으로 매끄럽고 위안이 된다.


둘째, 공동체의 환상. 극우 서사는 언제나 ‘진짜 국민’, ‘우리가 지켜야 할 순수한 공동체’를 강조한다. 이는 현실의 다양성과 혼종성에 대한 거부 반응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경제 구조가 불러온 지역 공동체의 해체와 도시의 분절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잃어버린 공동체를 그리워한다. 극우는 그 감정에 "우리는 원래 하나였다"는 과잉된 동질성의 서사로 응답한다. 이것은 현실의 갈등을 조정하는 대신, 일종의 문화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신화적 이야기다.


셋째, 과거의 영광 회귀. “그때가 좋았지”라는 감성은 불안한 현재를 견디는 방식이다. 트럼프의 “Make America Great Again”은 그 대표적 구호이며, 세계 각국의 극우 세력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과거를 신화화한다. 이 회귀는 항상 선택적이고 편의적인 해석에 기반하지만, 사람들에게는 현재의 불확실성보다 기억된 과거의 확실성이 더 강한 정서적 기반을 제공한다.


이러한 서사의 구조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정치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감정의 프레임이다. 즉, 사람들은 이 서사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결정짓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극우의 확산은 단지 분노의 정치가 아니라, 해석의 정치이자 귀속의 정치다.



시장이 남긴 공백 속에 자라난 정치적 정체성


1980년대 이후 세계 각국은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시장의 자율성과 민간의 효율성을 강조하며 공공 영역을 축소해왔다. 이는 복지국가의 약화로 이어졌고, 특히 하위 계층과 주변부 지역은 이 변화의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이러한 복지의 공백은 단순한 재정 문제를 넘어서 존재적 위기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더 이상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정치적 상상력은 경제가 아닌 정체성으로 이동한다.


정체성의 정치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내가 안전하지 않다는 감각은, 그 원인을 ‘다른 존재’에서 찾게 만든다. 그리고 극우는 바로 그 ‘다름’을 정밀하게 표적화한다. 이민자, 성소수자, 비주류 엘리트, 글로벌 기업, 지식인. 이들은 ‘진짜 국민’이 아닌 ‘외부자’로 규정되며, 불안과 분노의 표적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자유주의가 강조한 자유 경쟁과 개인 책임은 결국 사람들을 고립시켰고, 이 고립은 집단 소속감에 대한 갈망을 증폭시켰다.


이 틈을 극우 정치는 감정적 언어로 메운다. “당신은 잊히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우리입니다.” 이 메시지는 복잡한 사회문제를 단순한 이야기로 바꿔주며, 공동체 상실의 공허함을 채워준다. 이러한 정체성 정치는 경제적 해법을 대체하는 정치적 위안이다.


한편, 기존의 진보 정치는 이 정서적 접근에 취약했다. 데이터, 정책, 이념에 집중하느라 사람들의 삶의 언어와 감정의 구조를 놓쳤기 때문이다. 그 결과, 좌파는 “공정한 분배”를 말할 때조차도, 그 말이 누구의 삶에 어떤 상처를 건드리는지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이후의 정치적 진공 상태는 단순한 좌우의 대결이 아니라, 정책의 언어와 감정의 언어 중 어느 쪽이 사람들의 ‘내면의 현실’을 포착하는가의 싸움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감정을 먼저 건드리는 극우의 서사가 더 많은 사람을 끌어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고리즘과 분노 - 감정의 정치가 승리하는 이유


극우 정치가 대중과 감정적으로 결속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현대 미디어 환경이 만들어낸 정보의 감각화에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실’보다 ‘인상’을 중심으로 세상을 인식하며, 이 인상은 짧은 영상, 자극적인 뉴스 제목, 알고리즘 기반의 추천 시스템 등을 통해 강화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도덕성에 대한 이중적 감수성이 형성된다. 예컨대 보수 정치인의 부패나 비도덕성은 ‘예상된 일’, 혹은 ‘현실 정치의 일부’로 관용되기 쉬운 반면, 진보 정치인이 도덕적 기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그 실망감은 배신의 감정으로 확대된다.


이는 도덕의 기준이 행동이 아닌 정체성과 감정에 의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유권자는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인물이 ‘실수’를 하더라도 이해하려 들지만, 정치적으로 반대 진영의 인물에게는 훨씬 더 엄격한 기준을 들이민다.


특히 젊은 세대는 공정성과 일관성에 민감한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현실 정치에서 진보 진영이 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위선적 태도를 보일 경우, 이들 세대는 실망과 함께 ‘감정적 전환’을 겪으며 정치적 보수화로 기울게 된다. 이러한 심리적 거리감은 사실의 문제보다 인식의 문제다.


결국 미디어와 감정이 결합한 현대 정치의 무대에서, 진보와 보수는 서사의 설득력과 감정의 일관성을 두고 경쟁하고 있으며, 극우 정치 세력은 이 감정의 구조를 누구보다 정교하게 파고들고 있다.



시스템의 균열, 세계는 왜 극우를 선택하는가


극우 정치의 부상은 단지 특정 국가나 정치 체계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불러온 불균형, 민주주의 제도의 피로, 세계화로 인한 상실감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 글로벌한 현상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우리는 유사한 흐름을 목격한다. 미국의 트럼프, 프랑스의 마린 르펜, 이탈리아의 멜로니, 헝가리의 오르반까지. 이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며, 복잡한 정책 대신 간명한 메시지로 대중의 분노를 정치적 자산으로 전환해 왔다.


그렇다면 왜 지금, 세계는 극우를 선택하고 있는가?

첫째, 경제 시스템의 실패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분명히 일부 국가의 GDP를 성장시켰지만, 그 과실은 극소수에게 집중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다. 노동은 유연화되었고, 정규직은 줄었으며, 불안정한 삶이 일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노력하면 보상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렸다. 이런 좌절감은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이 바로 극우 정치다.


둘째, 제도 정치의 무기력이다. 기존의 민주주의 제도는 복잡하고 느리며, 당파적 갈등 속에서 어떤 문제도 신속히 해결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극우 정치인은 강력한 리더십과 ‘즉각적 행동’을 약속하며, 기성 정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의 불만을 흡수한다.


셋째, 정체성의 위기다. 세계화는 사람들에게 낯선 문화, 다른 인종, 다양한 생활 방식을 강제로 끌어들였지만, 그에 따른 정서적, 문화적 충격은 거의 방치되었다. 극우 정치 세력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어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이 우리의 고유한 가치인가’를 되묻는다. 이는 단지 이민자나 다양성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불안에서 기인한 반응이기도 하다.


결국, 극우 정치의 세계적 확산은 경제적 불평등, 제도의 신뢰 상실, 문화적 불안정이라는 세 가지 요인이 교차하며 형성된 ‘시대의 증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현대 시스템이 스스로를 유지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구조적 위기의 결과다.



민주주의는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가


극우 정치의 확산은 단지 "가난해서", 혹은 "무지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존엄을 위협받을 때,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반응이다. 우리는 이제 '왜 그들이 그렇게 투표하는가'를 묻기 전에,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경제적 안정성과 생활의 예측 가능성이 회복되어야 한다. 불안정한 고용과 급변하는 물가 속에서 사람들은 '내일'을 설계할 수 없으며, 그럴 때 극단적 서사는 더욱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둘째, 정책은 숫자가 아니라 감정의 언어로 전달되어야 한다. 진보 정치는 이제 ‘복지’나 ‘재분배’ 같은 용어보다, ‘존중’, ‘회복’, ‘공존’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정체성의 정치는 감정을 다루는 정치이며, 그 감정을 치유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대안은 등장하지 않는다.


셋째, 지역과 일상의 관점에서 정치가 재구성되어야 한다. 글로벌 담론과 데이터 중심 정책이 아닌, 동네의 작은 식당, 노인들의 경로당, 청년들의 카페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에서 정치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극우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온 이유는 그들이 가장 가까이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공공의 언어가 회복되어야 한다. 시장의 언어는 개별성과 성과를 강조하지만, 공공의 언어는 연대와 책임을 말한다. 사람들은 ‘내가 혼자가 아니다’는 확신이 들 때, 더 멀리 보고 더 너그럽게 생각할 수 있다. 극우 정치의 언어가 분노와 배제를 품고 있다면, 진짜 대안은 연결과 포용의 서사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단지 정치적 갈등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언어로, 어떤 감정으로, 어떤 윤리로 공동체를 다시 만들 것인가를 묻는 거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극우는 그 물음에 대한 한 가지 ‘즉각적이고 강한’ 대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섬세하고 깊은 대답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더 인간적인 대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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