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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May 29. 2023

미키7

미키7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이후 작품으로 선정했다고 크게 알려진 원작 소설. 작가 애드워드 애슈턴은 나에게는 낯선데, SF소설 분야에서도 유명한 작가는 아닌 걸로 안다. 이 작품 '미키7'은 그가 쓴 최초의 장편소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봉준호 감독의 손에 들어가고, 영화로 만드는 결정을 하는 과정에는 브래드 피트가 제작자로 있는 '플랜B'의 에이전트 제레미 클레이너와 애드워드 애슈턴의 작품을 관리하는 에이전시의 연결 고리가 있었다.

초고인 상태에서 번역 원고를 봉준호 감독이 받았고, 작품을 읽은 봉준호 감독은 저자 애드워드 애슈턴에게 직접 연락해 이 작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니 봉준호 감독은 '미키7'의 작품 세계는 물론, 작가의 창작 의도까지 명확하게 알고 있으며, 작가의 생각보다 한발 더 나간 세계관을 부여할 수 있고, 창작의 공간을 확장할 수 있었다.

영화는 원작 소설보다 더 많은 '미키'가 등장할 걸로 알려졌는데, 그건 영화가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서사를 가졌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설국열차'도 원작 그래픽노블보다 영화가 훨씬 강렬하고 뛰어난 서사를 보여준 걸 보면, 봉준호 감독이 다른 작가의 작품을 선뜻 선택하지 않을텐데, 이 작품에서 '영화'로 구현할 수 있는 매력을 찾은 걸로 보인다.


'미키7'에서 줄거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미키'는 스스로 '익스펜더블'이 되기로 결정한다. '익스펜더블'은 '소모 인간'으로, 임무를 수행하다 언제든 죽을 수 있으며, 바이오 카피를 통해 똑같은 사람으로 재생할 수 있는 존재다. 유전자 복제를 통해 똑같은 인물을 무한 복제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이미 오래 전에 나왔고, 구현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다만, '미키7'에서는 서버에 인간의 기억까지 업로드해, 복제한 인간에게 서버에 저장한 기억을 다운로드함으로써, '동일한 존재'라고 인식시키는 과정이 추가되었다.

이런 기술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남는 건 철학적 질문이다. 작가 애드워드 애슈턴도 '미키7'의 줄거리보다는 '미키'가 겪는 일련의 과정과 '미키'의 복제를 통한 불멸의 삶을 철학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질문하려 했다.


우연한 사건으로 '미키7'은 생존하고, '미키7'이 죽었다고 판단한 본부에서는 곧바로 '미키8'을 복제한다. 그렇게 '미키7'과 '미키8'이 공존하면서, 식량이 부족한 기지에서의 문제는 물론, 동료들과의 관계, '미키' 자신의 존재에 관한 고민과 동일한 자아를 가진 두 명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제기한다.

인간 복제는 인간 존재에 관한 윤리적, 도덕적 질문을 수반한다. 생체 복제는 과연 옳은 행위인가? 기술이 가능하다고 그것을 모두 허용하는 게 윤리적, 도덕적으로 바람직한가? 생체 복제를 허용하면, 그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으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무한 복제는 '인간' 한 명의 존재를 물리적, 공간적 확장을 통해 영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하며, 시간의 의미를 사상하는 효과를 갖는데, 이럴 경우, 인간의 '존엄성'과 '고유성'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는가?

'개인'으로서 생체 복제는 자아의 분열과 곧바로 연결되는데, '나'는 오로지 고유한 '하나'의 존재였던 과거와 달리, 둘 이상일 수 있는가? '나'와 복제한 '나'는 경쟁 관계가 될 수 있는가,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 서로를 살해할 수 있는가 등등 존재론적 질문을 하게 된다.


'미키7'에서 복제되는 '미키'는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미키'의 또 다른 자아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자아에게 물리적 형체를 부여하면, 동일한 '나'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다른 의미로 '다중 인격'과도 같다. 하나의 '나'는 물리적으로 하나의 육체에서 서로 다른 여러 개의 '자아'를 만들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자아가 발언하고, 행동할 때는 물리적 육체까지도 그 자아에게 통제된다.

'미키7'은 여기에 미래의 과학 기술을 도입해, 실제 똑같은 인간을 생체 복제할 수 있다고 설정했다. 생체 복제가 가능한 사회는 생물학적 관계-부모와 자식, 친인척 등-의 의미가 사라진다. 정자와 난자는 인공수정을 통해 배아를 만들 수 있으며, 인공자궁에서 태아를 기르고 출산한다. 성인이 되면 바이오 복제를 통해 무한 재생할 수 있으므로 '개체'는 영원한 시간과 공간에서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권력과 계급의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바이오 복제를 하는 대상을 두고, 누가 결정할 수 있는지,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지가 매우 중요하며, 이때 '결정'의 권한을 갖는 권력이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된다.

현재(2023년)의 시점에서 이미 인공지능의 수준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고 있는 걸 보면, 미래에서 바이오 복제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권한이 '인공지능'에게 주어졌을 때를 상상할 수 있다.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문제를 인공지능이 판단할 때, 인간의 목적과 인공지능의 목적은 엄연히 다를 수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이익에 복무한다고 100% 확신할 수 없고, 인공지능이 이미 인간의 지능과 판단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어,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한 경우, 인간은 인공지능이 결정한 내용을 판단할 능력도, 기준도 갖지 못할 것이다.


바이오 복제의 시작부터 끝까지 오로지 인간의 판단만으로 복제 인간을 만든다 해도, 이미 존재하는 계급구조와 권력에 의해 선택되는 사람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 즉, 바이오 복제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지배 계급과 바이오 복제로 단지 '소모품'으로 전락하게 되는 노동 계급이 그렇다.

미래 세계에서 인간이 시간을 통제할 수 있고, 영원한 삶을 산다는 가정으로 만든 영화 '인 타임'에서는 계급의 문제는 곧 '시간'의 문제가 된다. 시간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수명이 결정된다는 가정은,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서 재화의 소유를 비틀어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바이오 복제 역시 복제를 결정하는 일련의 집단, 세력이 존재하고, 그들은 자신을 최소 둘 이상 동시에 존재시켜 죽음에 대비하고,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지만, 바이오 복제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중단되는 노동 계급은 말 그대로 소모품으로 전락하게 된다.


바이오 복제는 '로봇'과도 경쟁하는데, 로봇이 인간에 가까울수록 바이오 복제의 존재는 특별해지고, 바이오 복제를 통한 영원한 삶은 극소수 권력자, 자본가, 부르주아,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과학자, 예술가 등)의 특권으로 바뀌게 되면서, 사회 갈등의 원인이 된다.

기술의 보편화는 대중에게도 선택의 기회가 오지만, 지배 계급은 이런 특수한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불법화한다. 한번 시작한 기술의 대중화는 합법, 불법을 가릴 수 없게 되고, 바이오 복제는 지하 시장에서 퍼지기 시작해 걷잡을 수 없게 되고, '인간'의 기준, 인간이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윤리와 도덕도 사라진다. '나'는 둘 이상, 심지어 수십, 수백 명을 복제할 수 있으며, 동시에 존재하게 되어 '나'의 집단화, '나'의 동시다발화가 사회를 혼란시키고, '인간'의 고유성, 유일성이 사라지면서 생명의 가치와 의미 역시 사라져 사회는 아비규환으로 폭발한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는 미래에서도 바이오 복제가 아닌, 인간 형태의 로봇을 과거로 보내지만, 바이오 복제가 실현되면, 오히려 로봇보다 제작비가 싸게 드는 바이오 복제가 로봇을 대치할 가능성이 높다. '미키7'에서는 바이오 복제의 초기 단계이자,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소 생산을 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시간이 흘러 바이오 복제 기술이 대중화 되었을 때를 상정하면,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고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초기 진화에서 불과 200만 년만에 현재에 이르렀고, 기술의 발전은 가속도가 붙어 불과 200년만에 유전자를 조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런 속도라면 한 두 세대 안에 바이오 복제가 현실이 될 수 있고, 인류의 미래는 예측할 수 없는 경계를 넘을 걸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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