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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Oct 11. 2024

전, 란

역성혁명을 꿈꾸다

전, 란


넷플릭스 오리지널. 박찬욱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으니, 이 영화 절반은 박찬욱 작품이라고 봐도 좋겠다. 최근 개봉한 한국 역사(사극) 영화 가운데 앞자리에 설 영화다. 영화 배경은 우리에게 익숙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고, 선조로 대표하는 지배계급과 양반계급인 종려, 양인이었으나 억울하게 노비가 된 천영의 대립이다. 여기에 일본군 대장 겐신이 등장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불과 3년 전, 조선에서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한다. 나중에 '기축옥사'로 이어지는 '정여립 모반 음모'가 발단인데, 현대 역사학자의 해석으로는 정여립이 워낙 강직하고 바른 말을 잘 하는 선비였으며, 그가 율곡의 제자였으나 스승까지도 비판하는 반골 기질이 강한 인물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정여립은 '동인' 계열이어서, '서인'보다는 진보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정여립 모반 음모'는 또 다른 역사의 한 줄기로, 길고 긴 이야기를 남기는데, 핵심만 요약하면, 양반 집안에서 서자로 태어난 '송익필'이 공을 세워 출세하려는 목적으로 동인 계열의 반골 선비였던 정여립을 무고해 정여립 집안은 물론, 정여립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노비로 만든 엄청난 사건이다. 이때 우리에게 시와 시조를 잘 짓는 걸로 알려진 '송강 정철'이 서인의 대표로 동인들을 탄압, 핍박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정여립을 제거한 근본 원인은 동인과 서인의 권력 투쟁에 있었음이 드러났다.


영화 첫 장면에서 정여립이 자결하는 모습은 이런 역사적 맥락이었으며, 이후 3년만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조선 역사는 변곡점을 맞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무신 양반의 자제인 종려의 집에서 노비로 사는 천영의 이야기가 잠깐 등장하는데, 여기서 천영이 양민에서 노비가 된 이유도, 앞선 정여립 모반 사건의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이었음을 암시한다. 

종려는 아버지가 군인(무신)이어서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검술을 익히는데, 천영이 종려를 도와 함께 검술을 익히고, 종려 대신 무과 시험을 치러 종려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장원급제 한다. 계획대로라면 천영은 면천이 되어 노비에서 양민이 되고, 천영의 삶도 달라졌겠으나, 종려의 아버지는 천영을 살해하려 한다.

일본군이 부산을 통해 진격하면서, 다급해진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가는데, 선조를 가까이서 호위하는 인물이 종려다. 이때 민심은 경복궁을 불사르고, 양반을 학살할 정도로 분노가 치솟고 있었고, 왕이 한양을 버리고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하는 걸 보면서, 왕의 절대 권력과 양반 계급의 추악함을 뼈저리게 깨닫고, 양반 계급을 학살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종려는 양반 계급으로, 선조를 보호하느라 죄 없는 백성을 살해하고, 천영은 비록 노비의 신세지만, 왜군과 맞서 싸우며 조선을 지키는 두 장면은 우리 역사를 압축한 훌륭한 장면이다. 역사에서, 외적의 침입으로 왕이 도망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심지어 현대사에서도 한국전쟁 때 이승만은 대전으로 도망가면서, 라디오 녹음을 통해 서울시민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들통났다. 그럼에도 피란갔던 왕과 대통령이 돌아와서는 살아 남은 백성과 국민을 오히려 부역자로 몰아 죽이고, 감옥에 보내고, 고문하는 사례가 생생한 기록으로 있으니, 지배 계급은 역사의 시간만 다를 뿐, 본질에서는 사악하고 추악한 권력의 화신이었다. 


종려의 가족도 노비들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종려는 천영이 자기 가족을 살해했다고 여기고, 천영을 원수로 생각한다. 종려가 왕(선조)의 명령을 받아 행동하는 건, 군신의 도리를 하는 것이면서 한편 개인의 원한을 보복하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지배한다. 천영 역시 자기 신분이 노비에서 양인으로 면천되기를 가장 먼저 바라는 마음에서 의병이 되어 왜군과 싸우지만, 그들이 공을 세우고 한양으로 돌아와 왕 앞에 섰을 때, 왕이 천민은 물론 의병장이면서 양반인 자령까지 역모를 꾀한다는 이유로 목을 베어 광화문 앞에 세워 놓는 걸 보고는, 진심으로 왕과 양반 계급을 없애겠다는 역성 혁명을 꿈꾼다.

'역성 혁명'은 정여립이 말한 것으로, 왕이나 천민이나 모두 같은 사람이며, 왕이 왕 노릇을 올바르게 하지 못하면, 왕을 쫓아낼 수 있다는 공화주의적 생각이다. 16세기에 조선에서 공화주의자가 등장한 건 매우 놀라운 일이지만, 이미 조선의 양반 가운데는 오래 전부터 '역성 혁명'에 관한 책과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여기서는 나오지 않지만, '정감록'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의 내용에는 '이씨 성을 가진 자는 망하고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내용이 있어서, 조선조 왕이 이성계로 시작했으니, 곧 조선 왕이 몰락하고, 정씨 성을 가진 정도전, 정여립 등과 같은 인물이 왕이 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영화는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왕, 양반의 지배 계급과 천민, 노비의 피지배 계급의 대립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종려와 천영의 갈등, 대립을 무술 액션으로 강렬하게 보여준다. 이때 무술은 그 자체로 칼싸움이면서, 또한 조선의 계급 투쟁을 상징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천영은 끈질기게 살아 남는다. 천영의 생존은 곧 민중의 생존이며, 민중은 역사를 만드는 주인이라는 점에서, 선조가 보는 마지막 장면은 백성(민중)의 고난과 수난, 핍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선의 백성은 양인 이하 천민들까지 왜적의 침입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지배 계급 가운데 극히 일부 양반이 의병장이 되어 민중과 함께 싸웠는데, 지금으로보면 이들은 '지식인'들이다. 역사적으로 혁명의 주역들은 대부분 지식인들이 앞장 섰다. '동학혁명'도 전봉준 장군이 앞장 섰는데, 그도 지방의 낮은 계급의 양반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레닌도, '쿠바 혁명'의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도, '공산당 선언'을 쓴 '마르크스', '엥겔스'도 모두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조선에서도 정여립과 같은 진보적 지식인이 썩어가는 조선의 권력을 교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이런 주장은 '역성 혁명'으로, 억압당하는 노비, 천민에게는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물론 배우지 못한 민중들은 보수적이고 어리석어서 진보적인 양반(지식인)의 완전히 다른, 혁명적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해 오히려 지배 계급의 논리에 동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건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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