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경우
제목은 작품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상징한다. 하나의 삶은 불행하다. 하지만 그 불행은 그녀의 삶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본질적 불행이다. 그의 가족사는 경우와 나눈 짧은 대화에 잠깐 등장하지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로 가족 모두가 불행한 삶을 살았고, 어린 시절부터 하나의 삶은 폭력의 내면화, 불행의 내면화가 깊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하나의 선택은 결국 '아버지를 닮은'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였고, 그건 '미워하면서 닮는' 불안정한 심리에서 비롯한 불행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근원으로 올라가면 하나의 불행은 온전히 그 자신이 짊어져야 할 '프로메테우스의 바위'와 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남편이 저지른 폭력과 폭행이 정당화 되진 않는다. 하나의 불행이 그녀 자신에게서 시작되었다면, 하나의 남편 박선생의 폭력 역시 그 자신에게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선생은 학교에서 동료 교사는 물론 학생들에게도 '이상한 인간'으로 인식된 인물이다.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만 그건 오직 아내인 하나에게만 그럴 뿐,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 감정을 억누르는 비겁하고 야비한 인간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감정을 억누르다 만만한 하나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비겁한 인간이기에 그는 결국 받아야 할 벌을 받는다.
하나와 그녀의 남편 박선생 사이에 우연히 끼어들게 된 경우는 어떨까. 경우에게는 결혼을 앞둔 애인이 있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마치 안개가 드리운 듯 불투명한 미래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경우는 대학 때 알았던 - 어쩌면 짝사랑했던 - 하나를 우연히 만난다. 경우는 하나의 현재 삶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을 느끼고, 오래 전에 품었던 연정이 연민으로 뒤섞여 나타난다.
하나는 자신을 폭행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결국 똑같은 방식으로 남편 박선생을 물리적으로 파괴한다. 박선생은 자기 악행의 인과응보로 흐지부지 무대에서 사라지고, 하나는 경우의 삶으로 들어오려 한다. 경우는 결혼을 앞두었고, 그동안 불행한 삶을 살았던 하나에게 느낀 감정이 사랑인가를 회의한다. 경우가 하나를 밀어내는 감정의 밑바닥에는 기회주의적 비겁함이 있고, 그걸 경우도 잘 알지만 눈앞의 현실을 포기하지 못한다.
결혼을 앞둔 경우는 현재 애인과 하나를 두고 저울질한다. 이런 경우의 태도 자체가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이며 '사랑'을 하나의 수단, 매개로 인식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행태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처럼, 거리를 두고 연애하는 경우는 가까이 있는 하나의 존재가 더 커 보인다. 더구나 하나는 오래 전 연모하던 수 많은 경쟁자들 가운데 자신도 한 명이었다는 사실, 이루지 못한 짝사랑에 대한 환상까지 겹쳐 하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 또는 왜곡된 감정이었다.
하나가 경우를 향해 선택을 강요할 때, 경우는 그제서야 자신의 위치를 자각한다. 학원을 차려주겠다는 예비 장인의 배려도 있고, 학생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한 짧은 기간제 교사의 경험으로 경우는 '교사'의 꿈을 접는다. 그가 학교와 학생을 포기하는 건, 하나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신의 삶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 대상을 회피하고 그곳에서 벗어나려 한다. 경우에게 하나는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로 인식된다.
하나는 딜레마에 놓인다. 그는 폭행피해자, 가정폭력의 희생자이면서 남편을 살해한 가해자, 전과자로 살아가야 한다. 그는 자신을 이해할 줄 알았던 경우가 등을 돌리고, 다른 세계로 떠난다고 말할 때, 한 가닥 희망의 끈이 끊어지는 절망을 느낀다.
작품 속에 작은 에피소드로 나타나는 학교 폭력과 동성애 코드는 이동은*정이용의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단편 '캠프'에서도 청소년 동성애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경우는 학교 폭력의 피해 학생을 돕지만, 그 학생이 찍은 사진으로 학교에서 곤란한 입장에 놓이고, 결국 학교를 포기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학교 폭력의 이면에 동성애가 있다는 설정은 납득하겠지만, 그들이 결국 죽음을 선택하는 장면은 하나와 경우의 이야기에서 꼭 필요한 설정이었을까 의문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김한조 작가의 '기억의 촉감'이 떠올랐다. 한 노인이 임종을 앞두고 회상하는 장면으로, 자신이 젊었을 때 동거했던 여인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 평생을 살았지만, 죽음을 앞두고 한때 사랑했고, 함께 살았던 여성을 버렸다는 자책과 회한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 노인의 젊을 때 모습이 경우라고 하기엔 지나치지만, 죽기 전에 깊이 후회할 과거가 있는 삶은 어떨까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