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본격 리뷰에 앞서 간단하게 아래 글을 써서 페이스북에 올렸다.
어제, 개봉하는 날 아내와 둘이 봤다. '리뷰'는 따로 쓰겠지만, 상영관에는 관객이 거의 앉았고, 영화 중간 중간에 웃음이 여러 번 터졌다.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웃음이지만, 이 영화가 블랙코미디라는 걸 관객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라고 엄숙하고 진지하게만 바라보면서 '깔려고만' 한다면, 이 작품은 얼마든지 재미없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연출을 그렇게 만만하고 호락호락 보면 영화의 재미를 덜 느끼게 되는 건 분명하다.
이 작품은 박찬욱 특유의 미학이 그의 다른 작품들처럼 곳곳에 깨알처럼 박혀 있고, 그걸 찾아내는 재미가 상당하다. 단지 '서사'만을 생각하고 비판하는 건 영화의 절반도 못 보는 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 작품은 원작 소설도 있고,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거장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 '액스 :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가 이미 있는 상태에서 박찬욱 감독이 새로운 형식과 스타일로 연출한 작품인데, 원작에 없는 인물과 이야기가 만드는 재미가 상당하다.
스포일러가 될까 말할 수 없지만, 영화도 아는 만큼 보인다. 박찬욱 감독의 작품 '까는 게' 마치 영화를 잘 아는 것처럼, 비평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잘 만든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걸 먼저 받아들이면 좋겠다.
이런 글을 쓴 이유는, 박찬욱 감독 작품을 악의적으로 폄훼하고, 흥행을 망치려는 소수의 추잡한 의도를 가진 인간을 온라인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박찬욱 감독 작품을 '까는'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걸 드러낸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의 이전 영화들은 좋다고 자락을 깐다. 그러면서 이번 영화는 예전 영화들과는 다르며, 기대했는데 실망스럽다, 박찬욱 특유의 색채가 드러나지 않았다 등등 교묘하게, 그러나 분명한 의도를 갖고 '어쩔수가없다'를 폄훼하는 글을 쓴다.
오늘 '매불쇼'에서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평론가들이 모두 '어쩔수가없다'를 재미있게 봤고, 훌륭한 영화라고 공감하고 동의했다. 그들의 의견을 앞세워 권위를 부여하려는 건 아니지만, 재미 없는 영화였다면 아무리 박찬욱 감독 작품이라도 비판했을 그들이었기에, 내가 영화를 보고 느낀 것과 비슷하게 느꼈고, 영화의 장점을 말하는 걸 보면서, 나도 이 영화를 틀리게 본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쩔수가없다'를 보면서 박찬욱 감독의 예전 작품들과는 분위기나 서사의 흐름이 조금 다르다는 건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건 이미 원작 소설과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가 있기 때문이고, 작품 형식이 '블랙코미디'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르적 특성에 기대고 있어서, 기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쩔수가없다'는 코엔 형제의 작품들과 결이 닮았다. 이렇게 말하면 박찬욱 감독은 기분이 나쁠 수 있지만, 전혀 의식하지 않고 창작한 작품이 다른 작가의 작품과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해서 그걸 문제 삼지는 않듯,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의 특성에서 비롯하는 작품의 '결'은 영화의 본질을 뜻한다.
블랙코미디에서 아이러니와 메타포, 알레고리는 필수 요소다. 즉 알레고리와 아이러니가 빠진 블랙코미디는 성공할 수 없으며, 더 심하게 말하면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없는 영화가 된다. 그런 면에서 블랙코미디의 문법을 가장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감독이 '코엔 형제'다. 이들의 작품은 데뷔작 '블러드 심플'부터 시작해 모든 작품에서 알레고리와 아이러니가 빠지지 않고 드러난다.
블랙코미디 영화 속 인물들은 수 많은 선택을 할 수 있지만, 그들은 필연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사건이 발생하는 선택을 한다. 인물들은 강박적이고, 편협하며, 어리석은데 정작 자신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인물들이 상황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고, 극단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 또는 사건들이 더 큰 사건을 만들거나, 문제를 해결한다.
'어쩔수없다'는 인물들의 서사를 펼쳐가면서 그 사이에 알레고리와 아이러니를 촘촘하게 박아 넣었다. 유만수가 다니는 회사가 제지공장이라는 것, 외국 자본의 침투와 해고, 중년 재취업 문제, 대출금과 이자 문제로 발생하는 부동산(주택) 문제 같은 사회적 맥락은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화 속 컨텍스트인데, 이 영화가 '박찬욱표' 영화라는 걸 드러내는 '시그니처' 같은 장면은 유만수의 딸 리원이 보여주는 행동에 있다. 리원은 영화 처음부터 거의 마지막까지 첼로를 아름답게 켜지 못한다. 리원이 켜는 첼로의 단절적이고 불쾌한 소음은 유만수와 가족이 겪는 불안한 심리를 드러내는 장치로 쓰지만, 실제로는 훨씬 중층적 상징성을 지닌다.
리원은 '오티즘 스펙트럼'이 있지만 누구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 리원을 행동을 향해 '오티즘 스펙트럼'이라고 말했다면, 이 영화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빠졌을 것이다. 리원에게 첼로를 가르치는 과외 선생님도 포기할 만큼 리원의 첼로 실력은 늘지 않는 걸로 보인다. 하지만 전통적 방식으로, 전통적 악보를 가지고 리원을 가르쳤던 선생이 포기하고 떠난 이후, 리원은 스스로 악보를 만들기 시작하고, 그 악보는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암호처럼 보이지만, 리원은 그 악보를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첼로곡을 연주한다.
리원의 이 행동은 영화 초반부터 거의 드러나지 않으면서 변증적으로 진화하는데, 영화의 기본 서사인 유만수가 재취업에 성공할 것인가를 바라보는 관객은 리원이 보여주는 이 변증적 진화, 인지와 행동의 극적 변화를 눈여겨 봐야 한다. 영화 끝부분에서 터지는 극적 충격과 감동은 유만수가 재취업에 성공하는 장면이 아니라, 리원이 보여준 드라마틱한 질적 변화의 장면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만으로도 박찬욱 감독의 작품은 다른 감독들이 따라하기 거의 불가능한 면모를 보였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느 분야든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리고 많이 아는 것보다 예술가와 예술 작품에 애정을 담고 보는 게 더 중요하다. 박찬욱 감독이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최고 감독의 반열에 있어서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많은 건 알지만, 박찬욱을 까내리면서 자신을 돋보이려는 태도는 유치하고, 천박하다. 좋은 작품을 이해할 줄 모르면서 악의를 갖고 무조건 폄훼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은 재미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