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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誰も知らない

영화를 말하다

by 백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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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誰も知らない


아무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영화보다 실화는 더 끔찍하고 잔혹하다. 영화는 오히려 실화보다 덜 끔찍하지만, 그렇다고 관객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 출연한 어린이들은 전문 배우가 아님에도 연기가 훌륭하다. 연기가 모두 자연스럽고 대사도 어색하지 않다.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이 기막힌 상황을 더욱 안타깝게 드러내고 있다.

장남인 아키라 역의 야기라 유아는 외모에서 풍기는 느낌과 연기가 탁월한데, 이 영화가 데뷔작이면서 칸영화제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연출은 매우 훌륭해서, 아이들의 모습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표정, 손짓, 발짓, 장난감, 대사 등 아이들이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감정을 사물과 클로즈업 카메라로 담아내면서 아이들이 놓여 있는 상황을 침착하게 보여준다.


2시간 20분의 상영시간 내내 우리는 안타까움과 분노와 한숨으로 어린 주인공들을 지켜보게 된다. 아이들은 모두 예쁘고, 귀엽다. 그런 아이들이 부모 없이 방치된 채 스스로 살아가는 모습은 지켜보는 어른들에게 죄책감과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아이를 낳았다고 모두 부모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모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자식을 돌보고, 책임감을 갖고 자식을 양육하지 않는 부모는 진짜 부모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이 부모가 되면 아이들은 불행하다.

이 영화 속 아이들은 모두 불행한 아이들이다. 무책임하고 무지하며 멍청한 부모 때문에 아이들이 불행해지는 것이다. 부모에게 학대당하는 많은 아이들은 무지하고 멍청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죄로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

사회는 그런 부모들과 아이들을 떼어내고, 아이들이 정상으로 자랄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돌봐야 한다. 피를 나눴다고 특별한 권리를 가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혈연이 오히려 가족을 더 학대한다는 통계가 있다.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범죄지만 돌보지 않고 방임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 않은 범죄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가난한 부모들은 돈을 벌기 위해 원하지 않지만 자식을 방임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식을 방에 가두고 자물쇠를 채워 가두고 일을 나갔다가 아이들은 불에 타 죽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부모가 아이들을 학대하는 것도 두 가지로 바라봐야 한다. 부모의 폭력적 성향과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그것이다. 부모가 폭력적 성향의 인간이라면 그것은 개인의 범죄로 한정될 수 있다. 인간의 성향은 다양한 변수에 의해 형성되므로, 폭력적이고 잔인한 성격의 인간은 늘 일정한 비율로 등장하기 마련이고, 그런 인간들이 부모가 되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보다 자기 자식을 해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폭력적인 성향이 강하지 않은 사람도 극심한 가난과 무지의 상태에서 아이를 향해 폭력적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정도 먹고 살 수만 있다면 그런 폭력 성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 말이다.

사회가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고, 아이들의 육아와 교육을 책임질 수 있다면 아동학대는 부쩍 줄어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특히 '경쟁'보다는 '복지'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는 것이 범죄의 발생으로 인한 자원의 낭비를 막고, 긍정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별 세 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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