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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Sep 20. 2015

숙주나물 공장에서의 사흘

취중진담을 말하다_007

숙주나물 공장에서의 사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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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을 앞두고 형제같이 지내는 동무의 부탁으로 숙주나물 공장에서 일했다. 명절(추석, 설) 앞이면 늘 많은 물량을 내보내야 하기 때문에 일손이 부족하다고 한다. 단 사흘만 일하기 때문에 일손을 쉽게 구하지 못하는 점도 있을 듯 하다.

첫 날, 아침에 두 동무를 만나 개군면에 있는 순대국집에서 식사를 하고, 양평에서 약 30분 정도 달려 이천의 어느 한적한 마을 외곽에 자리잡은 숙주나물 공장에 도착했다. 판넬로 만든, 근처의 여느 공장들과 똑같이 생긴 푸른지붕의 공장은 그리 크지 않았고, 콘크리트가 깔린 마당은 깨끗했다.

숙주나물 공장의 사장이 동무의 친구였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같은 나이의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장화로 갈아 신고, 장갑을 낀 다음-작업복을 갈아 입거나 하지 않고-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우리가 처음 한 일은, 박스로 포장된 숙주나물을 공장 바깥에 쌓았다가 트럭에 옮겨 싣는 일이었고, 이 일이 끝자자 공장 안으로 들어가 각자 주어진 일을 했는데, 나는 첫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거의 대부분 숙주나물을 큰 통에 싣는 작업을 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숙주나물 공장의 구조를 먼저 살펴보면, 공장 내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가장 넓게 자리를 차지한 곳은 숙주나물이 자라는 공간이다. 가운데 작업 공간의 양쪽이 모두 숙주나물이 자라는 창고 같은 공간인데, 왼쪽에 두 곳, 오른쪽에 한 곳이 있고, 한 곳의 넓이는 약 50평 정도 되어 보였다.

설날 전에는 모든 공간에서 숙주가 자란다고 하는데, 추석 때는 두 곳에서만 숙주가 자라고 있었고, 예전보다 물량이 줄었다고 한다. 숙주는 녹두로 만든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녹두는 거의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원산지 표기가 되어 있다.

녹두를 먼저 살균 소독한 다음 배양하는데, 바닥에 놓인 녹두가 콩나물처럼 자라기 시작하면, 계속 위로 솟아올라 수 십 층의 두께로 쌓인다고 한다. 숙주가 자라는 공간은 어둡고, 사람 머리 위의 높이에서 자동으로 물을 뿌리는 장치가 되어 있어, 계속 물을 뿌려주기 때문에 숙주는 밤낮으로 자라게 된다.

이렇게 자란 숙주나물을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아 밖으로 가져오면, 스테인레스로 만든 수조에 넣는다. 숙주나물을 가공하는 기계 설비는 매우 간단하게 되어 있다. 이 공장에서는 ㄱ자 모양으로 꺾인 기계 설비였는데, 이와 비슷한 콩나물 공장에 가보니, 더 간단한 일자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숙주나물을 물 속에 담가 녹두 껍질을 제거하는데, 이때 계속 많은 물이 수조로 들어간다. 즉 지하수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다. 수조에서 숙주를 풀어헤치면 녹두 껍질이 먼저 가라앉고, 풀어진 녹두는 두 개의 철망을 지나면서 이물질을 털어낸다. 그리고 물기를 털어내는 바이브레이터를 지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일정한 중량이 되면 비닐 봉투에 담기는데, 나는 바로 이곳, 비닐 봉투에 담기는 곳 옆에 서서 숙주 나물이 담긴 비닐 봉투를 다시 옆의 큰 통에 담아 놓는 일을 했다.

중량대로 담긴 숙주나물 비닐 봉투는 박스 포장을 하는 곳으로 이동하고, 박스에 담긴 다음 곧바로 납품을 하게 된다. 숙주나물을 비닐 봉투에 담는 작업은 상품을 '찍어 내는' 과정과 전혀 다르지 않다. 숙주 나물이 농산물(1차 상품)이긴 하지만, 공장에서 생산되는 순간, 더 이상 '1차 상품으로서의 농산물'이 아닌, 대량 생산되는 '2차 상품'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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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주 나물을 생산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곳은 숙주 나물을 비닐 봉투에 담는 곳이다. 이곳은 매일 아침마다 하루의 물량표가 붙어 있고, 그 물량에 따라 일정한 용량-1, 2, 3.5, 4, 5, 6, 8, 10kg-을 비닐 봉투에 담는 작업이다. 용량이 작은 것은 약 3초마다 하나씩 상품이 나오고, 용량이 커도 15초면 하나의 상품이 나온다. 

즉,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 내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숙주 나물이 봉투에 담겨 나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하루 약 9시간 정도 꾸준히 나온다. 모든 과정은 지극히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어서 머리를 쓸 이유도, 필요도 없다.

1kg짜리 숙주 나물 100개, 3.5kg짜리 숙주 나물 50개, 10kg짜리 숙주 나물 80개... 무게는 자주 바뀌고, 그것을 세팅하고 숙주 나물을 비닐 봉투에 담는 작업을 체구가 작은 베트남 여성 노동자가 맡아 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생산된 다양한 비닐봉투를 커다란 통에 담는 일을 했는데, 나오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통에 담는 것도 몸을 빠르게 놀려야 했다. 통이 가득 차면 박스에 담는 곳에서 통을 가져간다. 비닐 봉투를 박스에 담는 작업은 베트남 남성 노동자가 맡아서 했는데, 박스를 접는 손이 매우 빨랐다. 박스 작업은 밴딩 기계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박스를 접고 비닐 봉투를 넣은 다음 곧바로 밴딩 기계에서 밴딩을 한 다음 수동 컨베어벨트 위로 밀어 놓으면 박스를 쌓는 사람들이 출입구 쪽에 박스를 쌓아두게 된다.

박스 작업은 속도가 매우 빨라서, 봉투에 넣는 작업이 박스 작업을 따라가지 못한다. 작업 과정에서 조금씩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던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에 개입해 이러저러한 일들을 끊임없이 한다.

공장 청소도 매우 중요한데, 식품을 다루는 공장이라서 깨끗하긴 하지만, 일을 하다보면 숙주 나물의 잔해와 박스, 포장끈 등 지저분한 것들이 생긴다. 작업하는 중간 중간, 이런 쓰레기들을 빠르게 처리하면서 공장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이 빠질 수 없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일이 힘들다기 보다는 무엇보다 단순 반복의 지루함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집에 있을 때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서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였는데, 공장에서 일을 하니, 한 시간, 아니 십 분이 지나가는 것도 아주 길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이 공장에서는 일을 늦게 시작하고 늦게 끝냈다. 아침 9시가 넘어서야 일을 시작하고, 11시 조금 지나면 간식 시간을 주었다. 빵, 토스트, 음료수, 과일 등이 매일 조금씩 바뀌면서 나왔고, 간식과 매 끼니 식사는 사장의 부인이 직접 만들어 주었다.

간식을 먹고 나서 점심은 오후 2시에 먹었다. 일의 성격을 보면, 이런 방식의 시간 배치가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너무 단순하고 반복적이어서 노동자들이 몹시 지루하게 시간을 느끼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기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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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모두 베트남 노동자들이다. 모두 네 명. 한국 노동자는 한 명. 현장에서 고정으로 일하는 사람은 이렇게 다섯 명이고, 그외 시간에 관계 없이 나타나서 일하는 사람이 두어 명 있었고, 상품(박스)을 물류 회사로 실어가는 트럭 기사가 있다.

즉, 생산을 맡은 노동자는 베트남에서 온 젊은 노동자들이 전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들은 이곳 공장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생활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쉬는 날이 있다고 하는데, 명절처럼 바쁜 날이 아니면 통상 오전 9시부터 저녁 7시 또는 6시까지 노동한다.

이들과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주변에서 들리는 말을 간간이 들어보면, 이들은 회사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급으로 약 120만원에서 150만원 사이를 받는 듯 하다. 베트남 노동자의 신분은 '산업연수생'이라는 공식 명칭이 있고, 정부에서 정해 준 월급의 기준이 있는 듯 하다. 

월급 120만원이라면, 한국에서 최저 생활을 유지하기에도 급급하겠지만, 먹여주고, 재워주는 비용을 감안하면, 이들이 받는 임금 수준이 터무니 없이 낮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절대 임금 기준으로 보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영세자본가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 노동자에게 지급하는 임금보다는 낮게 유지할 수 있으므로, '산업연수생'을 고용하는 것은 분명 자본가에게 유리하다.

이주 노동자나 외국인 '산업연수생'을 고용하도록 만드는 것은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려는 영세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모든 자본가)의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실업률이 높아지고, 노동시장에 뛰어 드는 노동자들이 3D 직장을 싫어한다는 언론의 보도나 방송이 자주 나오는데, 노동시장을 왜곡하는 것은 정작 자본가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노동자라 하더라도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 임금 120만원이면 일하려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생각인데, 내가 너무 순진한 걸까? 저임금 노동시장에 뛰어드는 한국 노동자가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의 최저임금이 150만원이 안 되는 상황에서 하루 세 끼의 식사와 잠자리가 무상으로 제공된다면, 그 노동시장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본'은 국적이 없다. 따라서 '민족'이나 '인종'과 같은 경계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노동자'는 '인종'과 '언어'에 의해 그 장벽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노동자는 높은 임금을 쫓아 국경을 넘는다. 멕시코 노동자가 미국으로 이동하고, 아시아의 노동자들이 한국과 일본 등으로 이주하는 것이 그렇다.

이주 노동자의 활용은,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노동자들의 경쟁을 부추겨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고, 노동시장을 통제하는 효과가 있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경쟁자가 늘어나서 임금이 낮아지고 노동의 강도가 높아지는 불안한 상황이 조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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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 자본가.

자본가 역시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국적'과 '인종'에 관계 없이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면, 자본가는 자본가들끼리 이윤을 놓고 경쟁한다. 

특히 소규모 영세 자본가의 경우, 그들은 안팎으로 압박에 시달린다.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의 노동으로 상품을 생산하도록 모든 기반 시설을 마련해야 하며, 임금, 복지, 사고 등 다양한 변수에 대비해야 한다.

밖으로는 같은 영세 자본가와 경쟁해 시장을 확보, 확대, 유지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고, 최대의 이윤을 위한 적정한 상품 가격과 품질을 유지하는 것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숙주 나물 공장의 예를 들면, 공장을 마련하고, 생산 설비를 갖추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즉 누구나 '영세 자본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상품을 판매할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고, 그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데, 영세 자본가에게 '안정'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규모가 크던 작던, 자본가는 위험을 감수하고 사업을 한다. 자본주의가 '이윤'을 토대로, '경쟁'을 매개로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며, '자본가'에게도 적용되는 시스템이다. 물론, 경쟁에서 살아남은 1%의 자본가는 이런 시스템이 마음에 들 것이고, 만족스러울 것이다. 결국 우리는 1%의 '자본가'들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1차 농산물인 숙주 나물을 한 명의 자본가가 생산하는 것이 몹시 낯설고 이상하게 보인다. 이런 농산물이라면 오히려 시골의 마을에서 '협동조합'을 만들어 생산하는 것이 훨씬 사회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텐데, 자본의 힘이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우 많은 부분을 '협동조합'이나 '공동체' 생산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음에도, '영세 자본가'가 더 자주, 더 많이 출현하는 것은 '자본'이 주는 매력이 위험(리스크)을 뛰어 넘기 때문이다.

이 공장의 사장도, 자신이 공장을 운영하면서 얻는 이익이 위험보다 크기 때문에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공장을 운영하는 것일테다. 하지만 외부 환경의 변화-정부의 정책, 시장의 변동, 거래처의 상황 등-에 의해 영세 자본가는 한 순간에 실업자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럼에도 창업을 하는 영세 자본가는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위험을 극복하고 얻는 열매가 더 크고 달콤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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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사흘 노동을 하고 나서, 근육통과 두통으로 조금 고생했다. 덕분에 몸무게도 조금 빠졌고, 사용하지 않던 근육들을 많이 사용해서 저절로 운동을 했다. 하루 9시간을 꼬박 서서 일하고, 단순 반복 작업으로 지루함에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가장 끔찍하다.

사람은 기계의 부품이 아니다. 마치 기계 부품처럼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인간의 역할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초기부터 하루 16시간 노동부터 아동노동-심지어 4살짜리까지-과 위험한 노동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다.

인간의 노동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노동'이 인간의 존재를 억압하는 도구가 되어서도 안 된다. 단순 반복의 지루한 노동일수록 노동 시간을 짧게 해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하지 않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이 하는 노동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하며, 인간의 삶에 기여해야 하며, 인간의 존재를 빛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노동'의 의미이자 가치인 것을 우리는 잊고 살아간다.

나는 줄곧 주4일 노동과 하루 6시간 노동을 주장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가능하다. 주5일 노동이 현실인 사회에서 이런 논의가 활발하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지금은 자본의 위세에 눌려 노동자가 위축되어 있는 상황임에 틀림 없지만,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열악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주4일 노동, 하루 6시간 노동을 주장해야 한다. '노동'의 주체가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똑같은 노동 시간을 일했지만, 한국 사람인 나는, 베트남 노동자보다 약 2배의 임금을 받았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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