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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Aug 22. 2018

19금 심청전

19금 심청전

아버지라고 믿은 내가 미친년이지. 어려서 동냥젖으로 나를 키웠다고, 맹인으로 살면서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어린 딸자식을 애지중지 키웠다고, 말귀를 알아들을 때부터 아버지라는 인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잔소리에 자기 자랑을 늘어 놓으면서 부모 은혜를 갚는 자식이 되어야 한다고, 귀에 굳은살이 앉도록 떠드는 꼴을 그때는 몰랐지.

어떤 사기꾼 새끼에게 속아서 쌀 삼백석을 살 만큼의 돈을 뜯기고는 갚을 길이 없으니, 뱃놈들에게 나를 팔아 넘긴 아버지라는 인간을 대체 어째야 한단 말이냐. 사정 모르는 이웃들은 아버지 눈 뜨게 한다고 공양미 삼백석에 인신 공양의 제물이 되었다고 나를 효녀라고 말하지만, 씨발, 효녀는 무슨 개뿔이 효녀냐고. 이제 겨우 열네 살짜리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 청춘이 아버지 눈 뜨게 한다고 내 목숨 바치는 게 효녀냐고! 쌀 삼백석에 눈을 뜰 리도 없지만, 설령 눈을 뜬다 해도 다 늙은 인간이 자식 목숨값으로 눈을 뜨는 것이 그렇게 행복하고 좋겠냐고, 씨발.

중국을 오가는 상선에 개끌려가듯, 형장으로 가는 사형수가 뒷걸음질치듯 끌려가니 뱃놈들이 어린 여자라고 추근거리고,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보시나 하고 가라고 치마 속으로 그 더러운 손을 집어넣질 않나, 썩은내나는 주둥이를 뺨에 대질 않나, 정말 원통하고 기가 막혀서 서러운 눈물만 흐르는구나.

깊은 밤, 이제 곧 죽을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갑판에서 선원들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말인즉슨, 내 아버지 심학규는 봉사가 아니고, 맹인인 척 행세를 하며 살았다는 것이고, 쌀 삼백석은 도박을 하다 빚을 져서 빚대신 나를 팔아 넘겼다는 것이었다. 봉사가 아니면서도 봉사처럼 살았다면, 어려서 동냥젖을 먹일 때도 아녀자들이 젖가슴을 내놓고 젖먹이는 걸 다 봤다는 것이고, 내가 방에서 옷 갈아 입는 것도 다 봤다는 말이 아니냐. 아버지라는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 파렴치하고 야비할 수 있단 말인가.

또 들리는 말이, 내 친엄마는 나를 낳고 죽었다고 했는데, 그것도 지어낸 말이고 이웃 마을에 사는 뺑덕이라는 여자가 내 친엄마라고? 뺑덕이네가 이미 남편이 있는데, 심학규하고 불륜을 저질러 낳은 아이가 바로 나라고? 아이고, 씨팔, 이게 왠 말이냐. 정말 구역질나서 못 듣겠네.

내가 그런 인간을 위해서 열 살부터 새벽에 일어나 남의 집에 품팔이를 하고, 밥을 얻어와 아버지를 섬겼으니, 내가 미친년이구나.

그렇다면 사기를 당했다는 그 쌀 삼백석이 바로 뺑덕이네하고 같이 살려고 나를 팔아 마련한 돈이고, 자식 팔아서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저 심학규하고 뺑덕이 같은 괴물을 부모로 둔 나는 대체 무어란 말이냐. 이제 더 살고 싶지도 않고, 살아봐야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만 있을 뿐이로구나.

어려서부터 밑구녕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품팔이에 동냥에 하루를 넘기기가 괴롭기 이를데 없었는데, 이제 편안히 저 바다에 빠져 죽으면 물고기 밥이라도 되어 좋은 일을 하겠구나. 세상에 태어나 부모 사랑을 이슬 한 방울만큼도 받지 못하고, 지지리 궁상에 뼈저린 노동으로만 십여년을 살다 가니, 내 인생도 가련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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