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건우 Mar 05. 2019

엄마들

그래픽노블

제목 : 엄마들

작가 : 마영신

출판 : 휴머니스트


표지가 기막히다. 작가가 자기 작품의 의도를 드러내는 가장 분명하고 좋은 방법은 표지 그림인데,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한국적'인 표지그림은 이 작품이 아마도 최초가 아닐까. 표지 그림은 그 자체로 역설이다. '엄마들'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있는 '엄마'라는 따뜻하고 편안하며 행복한 이미지의 추상이지만, 그 아래 두 중년 여성이 서로 머리칼을 움켜쥐고 악을 쓰는 모습은 '엄마'라는 기존의 추상적 이미지를 산산히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바탕의 빨강색은 중년들이 좋아하는 색깔로 알려졌는데, 빨강의 강렬한 색감과 흑백의 인물이 강조되면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드라마틱한 사연을 풀어놓을 거라는 기대를 준다.

이 만화를 그린 작가 마영신은 엄마의 생활을 지켜보다 엄마에게 노트와 펜을 주고 엄마의 이야기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엄마는 자기와 친구 이야기를 솔직하게 썼고, 작가는 엄마가 쓴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그러니 스토리 작가는 마영신 작가의 엄마인 셈이다.


작품 속 주인공은 이소연이다. 중년의 여성이고, 아직 독립하지 않은 아들과 함께 사는데, 자기 이름으로 남은 유일한 재산은 연립주택 가운데 한 채다. 소연은 스무살에 중매로 남편을 만났고, 아이를 셋이나 낳아 길렀지만 남편이 도박에 빠져 집안을 망치고 빚만 늘어나자 소연은 빚을 갚기 위해 평생 가난과 노동에 허덕였다. 그러다 결국 이혼을 하고 지금은 건물 청소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소연에게는 애인 종석이 있는데 술집 웨이터로 일하는 남자다. 종석의 아내는 다단계에 빠져 빚이 많은데다 종석의 동창하고 불륜 관계여서 사실상 이혼한 상태로 생각하고 있다. 

소연의 친구인 연순, 경아, 연정, 명옥이 등장학고, 이들은 각자 나름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연순은 남자가 자주 바뀌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간, 쓸개를 다 빼주는 속없는 여자라고 친구들에게 욕을 먹지만, 연순은 순정이 있는 여자다. 연정은 남편이 성불구여서 늘 불만이 가득한데, 애인을 쉽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헬스장에서 만난 남자는 알고 보니 게이였다.

소연은 애인인 종석이 3년 전부터 꽃집 여자를 만난다는 말을 듣고는 종석에게 욕을 하며 헤어지지만 이들의 삼각관계는 이어진다. 꽃집 여자 명희는 소연에게 종석과 헤어지라고 말하고, 소연은 '내 남자와 연락하지 말라'고 카톡을 하다 새벽에 길거리에서 만나 육탄전을 벌인다.

작품 속 엄마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자들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진 그녀들의 모습은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사회적 약자, 가부장제, 남성우월주의 체제 속에서 억눌린 채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피억압자의 모습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엄마들은 대개 부자도 아니지만 많이 배우지 못한 여성들이어서 자기들의 삶이 왜, 어떻게 망가져 왔는지 깊은 성찰을 할 능력은 없다. 남자(남편을 포함한 애인까지)들이 저지른 일을 뒤치닥거리하느라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지면서도 자신보다 남자, 자식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던 여성이 바로 '엄마'다. 

하지만 '엄마'도 나이 들면서 자기 욕망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오랜 시간 너무나 많이 참았고, 남자와 아이들에게 시달렸고, 자신의 행복을 유예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춤을 배우고, 나이트클럽과 콜라텍에서 낯선 남자들과 춤을 추고, 애인을 사귀고, 삼각관계에서 질투와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들'의 다른 모습은 '여성노동자'다. 그것도 비정규직의 불안한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한다. 소연은 빌딩 청소를 하는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그곳에는 소연과 비슷한 나이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함께 일하고 있고, 일자리가 불안정한 용역업체의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빌딩에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고, 사무실에는 책상에 앉아 일하는 정규직 사무노동자들이 있지만, 빌딩 청소를 하는 중년의 여성노동자들은 그들에게 거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용역업체에서 나온 관리자의 눈치도 봐야 하고, 같은 처지에 있지만 '반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동료 노동자의 눈치도 봐야 하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여성노동자들도 모두 '엄마'들이다. 이들은 밥도 화장실에서 먹어야 하고, 편히 쉴 장소가 없어 계단이나 비품창고 같은 구석에서 쉬어야 한다.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해 달라고 소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한 옥자언니는 성추행을 당하고 해고된다. 옥자언니는 여성가족부도 찾아가고 노동운동을 하는 여성도 찾아가지만 실질적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이 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용역업체 소장은 반장을 시켜 어용노조를 만들도록 하고, 16명 가운데 12명이 어용노조에 가입하고, 4명이 된 소연과 동료들은 따돌림을 당한다. 소연은 라디오 방송에 나가 일하는 회사에서 부당 노동행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고발한다. 라디오 방송의 파급 효과가 있어 소장은 소연을 비롯해 모두 해고될 거라고 협박하지만 결과는 용역업체와 소장이 바뀌고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남았는데, 소연과 연정언니는 해고된다. 소연은 옥자언니와 다른 업체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 예전 업체에서 반장을 했던 사람이 들어온다. 떡값을 빼돌리다 들통나서 해고되자 우연히 소연이 일하는 곳으로 취업한 것이다. 

소연은 삼각관계였던 명희와 친구가 되고, 연순은 만남 어플로 연하의 남자를 만나고, 명옥이는 기자 애인과 계속 만나고, 연정은 마트에서 일을 시작하고, 경아의 남편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모두들 여전히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50대와 60대 가난한 여성의 삶은 그렇게 구질구질하면서도 끈끈하고, 현실에 충실한 나날을 보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