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건우 Jan 18. 2020

블랙 매스

영화를 말하다

블랙 매스

현실은 영화보다 더 잔혹하고 드라마틱하다. 영화는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었고, 원작 다큐멘터리는 딕 레어와 제럴드 오닐이 썼다. 1975년부터 약 10년 사이에 발생했던 사건이 중심이지만, 주범인 화이트 벌저가 잡힐 때까지는 2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남부 보스턴의 지역 깡패에 불과했던 화이트 벌저는 1970년대 중반부터 마피아 조직처럼 커지면서 범죄로 돈을 쓸어모은다. 이 시기에 벌저의 형은 상원의원이었고, 같은 동네에서 자란 동생뻘 되는 존 코널리는 FBI가 되어 나타난다. 

거래는 존 코널리가 먼저 제안하는데, 이웃 지역의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을 깨기 위해 벌저에게 정보원이 되어 달라고 말한다. 벌저 역시 경쟁 조직을 없애고, 지역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존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도 벌저의 조직이 하는 일에는 일종의 면죄부를 달라고 역으로 제안한다.

화이트 벌저가 이끄는 조직은 단숨에 지역을 장악하고, 보호비 명복으로 상가에서 돈을 갈취하며, 마약을 팔아 돈을 번다. 게다가 잔혹한 인간 벌저는 조금만 의심스러운 동료나 부하를 살해하면서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 공포의 존재가 된다.

벌저처럼 쏘시오패스에 잔인한 인간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모습은 영화에서 인지부조화를 일으킨다. 한 사람의 태도와 행동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를 보면서 관객은 믿기 어렵다. 벌저가 더 잔혹해지는 건 그의 아들이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사망하고 나서부터다. 그는 어쩌면 죽은 아들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과 분노로 삶을 포기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벌저의 행동은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벌저의 측근들이 모두 FBI에게 붙잡혀 플리바게닝을 하면서 벌저에 대한 범죄를 깨끗하게 털어놓고, 보스톤글로브에서는 이들 증언을 토대로 벌저가 1975년부터 FBI의 정보원 노릇을 했다는 특종을 보도한다. 이제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잡히기 직전이던 벌저는 혼자 조용히 사라진다.

벌저의 형이자 상원의원은 벌저와 통화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의원직 사퇴를 하고 메사추세츠 총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잘 나가던 인생이 끝난 것이다. 벌저의 동네 동생이자 FBI요원이었던 존 코널리는 끝까지 벌저를 감싸고 돌다 40년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벌저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도 존 코널리 덕분이었고, 벌저가 준 정보로 존 코널리 역시 승진했기 때문에 이 둘은 분명 공범이다.

벌저는 분명 사악한 인간이자 범죄자다. 그는 최소 11건의 살인을 직접 저질렀으며 수십 건의 살인을 교사했다. 형제 사이에서 한 명은 상원의원을 할 정도로 엘리트였는데, 한 명은 최악의 범죄자로 살아갔다는 것이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현실은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벌저는 타고난 범죄자라 쳐도, 같은 동네에서 자라 FBI가 된 존 코널리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들은 동네 선후배이면서 같은 아일랜드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연대감이 강했다. 그렇다해도 범죄자와 손을 잡은 존 코널리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파멸로 내몰았다. 그의 아내가 여러 번 경고하고, 지적했음에도 존 코널리는 벌저를 감싸고 돌았다. 벌저가 준 정보로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을 일망타진한 것이 결정적 수훈이었는데, 이것이 존에게는 약이 아니라 독이 되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고 우울하다. 실화에 충실해서인지 드물게 나오는 유머도 웃기는 내용이 아니고 살벌하다. 두목 벌저를 비롯해 그의 부하들이 입는 옷, 음식, 살고 있는 집도 지극히 평범하고 과장이 없다. 영화에서 마피아는 비싼 수트를 빼입고 쿠바산 시거를 입에 물고, 클래식자동차를 끌고 다니지만, 현실의 조폭은 중하류층처럼 보이는 허름한 옷을 입고 낡은 차를 타고 다니며 평범한 주택에서 산다. 벌저는 돈을 많이 벌지만 그만큼 많은 돈을 경찰, 법원 등에 상납하고 있었고, 이렇게 상납한 덕분에 십여 년을 범죄를 저질러도 잡혀가지 않았던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80년대 중반까지였던 것으로 보면, 미국은 이때까지도 사법기관의 공무원들이 공공연히 뇌물을 받아 먹었던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부러웠던 것은,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모두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벌저와 공범이었던 FBI요원 존 코널리는 수사에 협조하지 않아서 40년 징역형을 받았다. 수사에 적극 협조한 벌저의 측근들도 짧게는 5년, 길게는 12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벌저는 도망다니다 12년 뒤에 플로리다에서 체포되었는데, 그는 두 번의 무기징역형과 5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는데, 이건 어떤 경우에도 바깥으로 풀려날 수 없다는 걸 뜻한다.

한국의 법원이 시민들에게 욕을 먹는 이유는, 정의롭지 못한 선고 때문이다. 라면을 훔친 사람보다 수백억 횡령을 한 사람의 형량이 더 낮거나 오히려 감옥에 가지 않는 걸 보면서, 법이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만 지켜주고,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더 무겁게 적용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법이 공평하고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 사회는 불신과 불만이 쌓이면서 사회를 불안하게 만든다. 불평등으로 당장 이익을 보는 것이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겠지만, 불안과 불만이 쌓이면 그것을 터뜨리는 억눌린 자들의 목표는 특권층을 향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드웨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