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치 사회를 꿈꾸는 그들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면서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이미 불을 발견했고, 수렵채집경제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들과 산에서 자라는 곡식을 가져와 벌판에 심고, 개량해 추수하고, 산과 들, 숲에서 나오는 온갖 과일, 채소, 식용 풀과 버섯, 꿀 등을 먹고, 사냥을 위해 덫을 만들거나 새끼를 데려와 길들여 가축으로 기르면서 인류의 먹거리는 풍성하고 다양해졌다.
이 과정에서 잉여농산물이 발생하고, 동시에 노동하지 않는 특별한 사람이 등장했다. 이들은 씨족이나 부족 가운데 연장자로 씨족장, 부족장을 겸하고 있는 노인으로, 경험이 많아 지혜로운 사람으로 불렸다. 이들과 함께 '무당', '주술사' 역할을 하던 사람도 노동하지 않는 특별한 사람에 포함되었다. 이들은 '의사' 역할도 했는데, 부족 가운데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악령을 퇴치하는 역할을 맡았다.
부족장이나 주술사는 부족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잉여 농산물의 일부를 받아 생활했는데, 잉여 생산물은 주로 부족의 노인과 어린이 등 노동력이 없는 사람에게 분배되었다.
씨족과 부족 단위의 공동체는 침략과 전쟁을 통해 통합되었고, 공동체 규모는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노동력도 커지고, 잉여생산물도 커졌다. 전투와 전쟁에서 이긴 부족은 진 부족을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고, 잉여생산물의 대부분은 승리한 부족의 지도자 그룹이 가져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도시국가가 탄생하고, 국가, 제국이 탄생했다. 이들은 노예제를 기반으로 한 경제체제를 구축했고, 지배그룹은 종교와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들은 초기에 부족을 이끄는 지도자이자 제사장을 겸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권력과 제사장, 종교지도자는 분리되어 두 영역으로 나뉘지만, 두 그룹은 강력한 연대를 통해 지배권력을 강화했다.
종교는 초기 인류가 자연현상을 이해하지 못해 발생했다. 토테미즘을 거쳐 각종 미신과 다신이 등장하고, 인류의 모습을 담은 인격신이 나타난 다음, 인간의 욕망과 소망을 해결하기 위한 '절대신', '유일신'이 등장했다. 신과 종교는 인류의 욕망에 의해 진화했으며, 과학이 발달하기 전까지 인간의 미개함을 합리화하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종교는 인민을 정신적으로 지배했고, 정치권력과 함께 지배계급으로 자리잡았다. 중세까지 신정일치의 사회는 인민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유지되었고, 인민은 오로지 왕과 교황의 지배에 순종하며 노예로, 농노로 비참한 삶을 살아왔다.
산업혁명 이후 봉건왕조는 몰락했지만, 종교는 살아남았다. 자본가는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를 교육할 필요를 느꼈고, 교육을 받기 시작한 노동자는 종교가 거짓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식계층에서 노동계급의 입장에 서려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자본가, 부르주아, 교회가 담합해 노동자, 농민, 서민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회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각성한 노동자와 지식계층은 자신을 착취하는 자본가, 부르주아, 교회 권력을 타도하고 계급이 사라진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일부 성공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노동자는 자본의 착취 아래 놓여 있으며, 자본과 부르주아의 이익에 봉사하는 종교 대리인, 교회의 목사와 신부, 절의 중이 하는 말을 믿고 따른다. 노동자는 이중의 모순에서 깨지 못한 채, 임금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자본에 의한 착취의 모순과 종교가 강요하는 미신의 모순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정치권력과 종교집단은 강력한 연대를 유지하며 노동자, 자영업자, 학생, 서민, 어린이, 노인 등 다양한 계급과 계층을 공략하고 있다. 이들의 목적은 가능한 많은 사람을 무지와 정신적 노예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의 이성은 날카롭게 발전했지만, 여전히 다수의 인민은 정신적으로 미개하거나 미숙한 상태에 놓여 있다. 현대는 과학기술문명이 눈부시게 발달했지만, 다수 인민의 이성과 지성은 중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증거는 종교가 여전히 활발하게 성장하거나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2천년 전의 미신을 진실이라고 믿는 미개함은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더디게 발달하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교회권력은 그런 미개한 사람들에게 협박과 거짓, 공포를 주입하는 한편,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 그 안에서 개인의 인정욕구와 자신감을 불어 넣고, 조직 안에서 절대자를 섬기며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끊임없이 세뇌한다.
종교권력은 수많은 개인들이 자의반, 타의반 제공한-노동력과 교환한 가치인-화폐를 모아 거대한 부를 쌓고, 소수의 교회지배자는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다. 이들은 정치권력과 결합하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며, 이것은 정치권력과 교회권력 모두에게 이롭다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교회권력은 필연적으로 보수적이며 자본과 부르주아의 이익과 한편이기에, 인민-노동자, 농민, 서민, 자영업자 등-의 이익과는 반대되는 세계관을 드러낸다. 이들은 혁명, 개혁, 변혁, 변화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현 체제를 옹호, 유지하려 한다.
씨알-인민, 민중, 백성, 시민, 국민,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서민, 자영업자, 학생, 실업자 등 모든 형태의 피지배 계급과 계층-이 깨어나지 않으면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은 끊임없이 씨알의 피를 빨아먹을 것이고, 그들은 배를 불리고, 이 세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피를 빨리는 씨알은 그렇게 말라죽을 것이고, 세상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금고에 금괴와 무기명양도증서와 채권과 현금다발을 쌓아 놓고, 수십억, 수백억 저택에 살며, 한 끼 밥값으로 노동자 한 달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쓰며, 노동자의 하루 임금이 1달러일 때,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피우는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삶을 동경하며 살 것인가, 그들이 자긴 모든 금괴와 무기명양도증서와 채권과 현금은 씨알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임에도 자기의 피땀을 빨아먹는 저 악귀같은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의 발 아래 엎드려 굽신거리며 말라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목을 졸라 가지고 있는 것을 뱉어내도록 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에게 있다. 오로지, 우리의 행동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총칼을 들 것인가, 도끼와 낫을 들 것인가, 아니면 투표를 할 것인가. 우리는 촛불을 들어 세상을 바꿨다. 촛불의 힘도 강력했지만, 투표는 더 강력한 무기다. 우리가 당장 총칼과 도끼와 낫을 들 수 없다면, 차선책은 투표가 유일하다.
하지만, 투표로는 정치권력만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정작 인민을 정신적 노예로 만드는 것은 종교권력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인민의 정신을 썩게 만드는 독극물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많은 인민은 어리석고, 멍청하며, 한심하도록 멍청하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길 바라는 사람들이며, 노예의 상태에 있을 때 안심하고, 행복하며, 안정을 얻는 사람들이다. 이런 좀비같은 정신적 노예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 역시 올바른 교육, 자본의 노예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깨어 있는 씨알의 투쟁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