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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Jul 26. 2020

씬 레드 라인 - 테렌스 맬릭

씬 레드 라인 the thin led line - 테렌스 멜릭


'천국의 나날들'을 연출하고 무려 20년의 시간이 지나서 맬릭 감독은 새로운 영화 '씬 레드 라인'을 공개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후 서너 번을 더 봤다. 처음 보고 쓴 리뷰는 아래 있으니, 이번에 새로 보면서 느낀 부분을 정리해보자.

영화에서 '물'은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물은 곧 '생명'이다. 영화의 시작, 중간 부분의 전투, 영화의 끝에서 물이 등장한다.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바다는 만물의 생명이 탄생하는 근원으로 보인다. 평화로운 남태평양의 섬에 주민들이 살아가고,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물에서 헤엄치며 행복하게 놀고 있다. 이 평화 속에서 군인인 주인공은 주민들이 군인을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화로운 바다에서 나와 숲속으로 들어가면서 전투가 벌어지고, 병사들은 물이 부족해 힘들어 한다. 고지를 점령하기 전에도, 고지를 점령하고도 지휘관은 계속 물을 보급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물'은 갈증을 해갈하는 물질로써의 '물'이기도 하지만, '물' 그 자체가 생명을 상징한다.

여러 명의 주인공 시점으로 발화하는 나레이션은 그 상황에 맞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들의 독백처럼 들리는 이 나레이션은 영화를 끌어가는 힘이기도 하다. 주인공 각자가 놓여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내면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객관적 상황 - 전과의 전투 - 속에서 이질적이지만 근본적인 질문들이다.

이 영화가 다른 전쟁, 전투영화와 다른 점은, 전투를 '액션'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쟁, 전투'라는 소재를 다루면서 멜릭 감독은 이 영화가 '전쟁 액션, 전투 액션' 영화가 되지 않도록 의도한다. 그렇다고 전투 장면이 적거나 대충 찍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전투 영화보다 뛰어난 장면들이 많고, 생생하며, 실감나는 전투 장면은 관객이 몰입하게 되는 힘이 있다.

그럼에도 전투의 사실성을 드러내면서도 관념화 하지 않으려는 장치를 곳곳에 넣고 있다. 총이나 폭탄에 맞아 죽거나 다치는 병사들의 비명이 거의 들리지 않고, 하반신이 사라진 군인의 처참한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의 모습을 희화화하지 않고 있다.

전투에서 이긴 쪽이나 진 쪽 모두 피해를 입었으며, 미군이나 일본군이나 군인의 생명은 다르지 않고, 누군가의 총과 폭탄에 죽어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것이 정의인지 묻는다. 이 회의적 태도는 전쟁을 객관으로 바라보려는 것이며, 개인에게 생명은 오로지 단 한 번이라는 것에서, 전쟁이 인간을 소모품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고든 대령은 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장군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병사들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직업군인이다. 제임스 대위는 중대장으로서 자기 중대의 병사들이 적군의 총탄에 죽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 하고, 고든 대령과 대립한다. 이때 군인으로서 논리적인 주장은 고든 대령이 승리한다. 결국 눈앞에 있는 적과 싸워야 하고, 고지를 점령해야 하는 지상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터무니없는 공격 명령에는 따를 수 없다는 것이 제임스 대위의 생각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에서 지휘관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어떤가를 보여줌으로써, 전쟁 또는 전투를 지휘하는 고위 장교들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들은 승진에 관심을 두고, 병사의 죽음을 외면하며,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 반발하거나 회의하는 지휘관은 제임스 대위처럼 중간에 군복을 벗어야 한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위트 일병은 6년 동안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음에도 계급은 일병이다. 그는 여러 번 근무지 이탈을 했고, 징계를 받아 진급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위트 일병의 태도는 관조적이고 집착과 욕망을 버린 초탈한 인물이다. 무엇이 그를 무심한 인간으로 만들었을까. 오랜 전투를 통해 위트는 삶과 죽음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을 수 있다. 그는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자청한다. 그는 자신이 살아돌아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거나, 살아남는 걸 포기했는지 모른다. 그는 가장 위험한 전투에서 살아남았지만, 정찰을 나가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사살당한다.

위트 일병의 죽음으로 이 영화가 '영웅'을 만들 의지가 없다는 걸 분명히 하고 있다. 전쟁에서는 누구나 죽을 수 있으며, 살아남는 것은 오로지 '운'이 좋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즉, 전쟁, 전투에서 총알이나 폭탄은 우연한 작용이며, 그것은 개인의 의지, 희망, 계획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의미 없는가를 말한다. 인간의 주관적 의지는 마치 바다의 물방울처럼 거대한 파도의 한 부분일 뿐이어서, 외부의 조건 즉, 시대와 역사, 시간과 공간의 어느 순간에 놓여 있는 인간은 그 한계를 절대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제목이 늘 궁금했다. '씬 레드 라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무슨 뜻일까. 얇고 붉은 선이라니.

'나무위키'에서 설명한 것을 보니, '크림 전쟁' 때 영국군의 붉은 군복을 빗댄 별명이라고 한다.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두줄로 가늘고 길게 늘어서 승리를 했고, 이 전투를 본 종군기자가  "A thin red streak tipped with a line of steel"이라고 쓴 데서 이 단어가 나왔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사용된 제목의 의미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일 수도 있고, '이성과 광기의 경계선'을 상징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테렌스 멜릭 감독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상징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매우 잘 만든 전쟁영화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전쟁을 통한 인간의 광기와 성찰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원작이 있는 책을 바탕으로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과 주인공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을 느리지만 깊이 있게 보여주는 이 영화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어떤 전쟁영화와 비교해도 결이 다르다. 

주인공과 그의 전우들, 중대장 스타로스 대위, 연대장 고든 대령으로 대표되는 인물은 이 전쟁을 바라보는 중요한 시각을 반영한다. 실제 전쟁의 상황으로만 봐도 미군이 과달카날 섬을 점령하지 않고, 지속적인 함포사격과 비행기 폭격만으로도 얼마든지 일본군을 전멸시킬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에게 선제 공격을 했지만, 그것이 미국을 이기겠다는 전술이 아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지기위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유럽에서는 독일이 유럽연합군에 의해 패퇴를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쏘련과 독일의 전쟁으로 이미 승패는 어느 정도 결정된 상황이었다. 

독일과 일본은 추축국이었지만 그들끼리 연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리적으로 연합이 불가능했고, 미국이 초기에는 전쟁 군수물자를 엄청나게 유럽으로 보내면서, 초기에 독일에게 밀리던 유럽의 연합국은 군수품의 압도적인 우위로 인해 독일을 밀어내기 시작한다.


좀 의아하겠지만, 미국은 쏘련에도 군수물자를 퍼부어 주었다. 미군이 비행기로 떨어뜨린 많은 군수물자가 독일군 진영으로 떨어지는 웃지 못할 일도 많이 발생했지만, 어떻든 쏘련군은 미국이 보내 준 다양한 군수품으로 인해 전투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병력 손실도 상당부분 막을 수 있었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가운데 사상 최대의 피해를 입는다. 이 영화에서도 미군의 피해가 막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휘관의 무능과 탐욕이었다는 것을 감독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는 고든 대령이 자신의 진급을 위해 끊임없이 중대장을 몰아부치지만, 사실 지휘부는 고든 대령 위에 있는 똥별들이다.

그들에게 병사들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은 애국심을 내세우지만, 정작 자신들은 가장 안전한 곳에서 지도 위에 빨간선을 그리는 것으로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 전쟁터는 참혹한 장면들 뿐이고, 똥별과 똑같은 생명이 죽어가고 있지만, 전쟁의 논리는 지배자의 논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주인공 위트 일병은 전쟁터에 나온 군인이지만 그는 종종 무단으로 병영을 뛰쳐나와 혼자 돌아다니거나 원주민들과 어울린다. 보통의 경우 이런 병사는 당연히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영창에 가게 되지만, 그를 이해하는 웰쉬 상사 덕분에 큰 문제 없이 군대생활을 하고 있다. 다만 진급을 못하는 것이 유일한 벌이다.

하지만 위트가 바라보는 전쟁터는 총탄과 대포가 날아다니고 군인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거나 터져나가는 참혹한 현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풍경과 싱그러운 바람과 구름과 따가운 햇살과 아름다운 원주민들과 고요한 바다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전쟁터의 가운데에서 오히려 평화와 고요를 느끼며 시간을 보낸다. 역설적이다.


전쟁영화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전투장면이 있는데, 처음 이 장면을 볼 때, 내 심장 박동이 쿵쿵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실제 전투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테렌스 멜릭 감독의 연출은 탁월하다. 이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는 전쟁영화의 걸작으로 남을 수 있을 테지만, 이 영화를 빛내는 장면들은 전투 장면보다는 전투와 전투 사이에 보여주는 위트 일병의 일탈과 풍경들이다.

역시 전쟁영화 가운데 명장면의 하나인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 마지막 장면이 평화로운 새소리와 함께 소리 없이 날아 온 총탄이었음을 떠올린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보여주는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풍경은 전투를 겪는 군인이 가장 원하는 평화로운 풍경이며, 그것은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비현실의 풍경이라는 점에서 위트 일병의 환상일 수 있다.


과달카날 전투는 많은 미군이 사망한 격렬한 전투였고, 이 섬을 탈환하면서 남태평양에서 일본까지의 제공권과 제해권을 미군이 장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영화에서는 미군의 희생도 중요하게 다루지만, 적군인 일본군의 참혹한 상태도 보여주고 있다. 적군이니까 당연히 죽여도 좋다는 심리적 동조를 테렌스 멜릭 감독은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

일본군의 악명은 당대에도 이미 유명했지만, 그들 역시 전쟁의 피해자이자 소모품으로 전락한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참혹한 장면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군은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기 전에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또한 참호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는 일본군의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이것은 일본군 개개인을 세뇌하고 강제한 일본 군국주의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이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예상보다 훨씬 강렬하게 저항하는 것은, 미군들이 포로가 된 일본군의 피부를 산 채로 벗긴다는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군인 개개인의 전쟁범죄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강제였든, 세뇌였든, 빗나간 애국심이었든 자유로운 개인이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책임을 방기한 것은 분명 잘못한 것이다. 그 당시 많은 일본 군인들은 잘못된 애국심으로 군국주의를 받아들였고, 군국주의의 체제를 내면화했다. 그것은 히틀러를 선택한 독일 국민의 정서와 결코 다르지 않으며, 국가의 범죄에 동조하고, 힘을 실어주었다는 점에서 단죄를 면할 수 없는 심각한 범죄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군국주의, 집단체제에 맞서는 개인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미군과 일본의 군대 조직은 개인의 의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위트 일병의 일탈은 이런 집단에 맞서는 개인의 항의이며, 폭력을 만들어 내는 집단(그것이 미군이든 일본이든 상관 없다)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위트 일병이 보았던 아름다운 풍경과 평화로운 사람들은 그가 바라던 세상의 모습이었지만, 그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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