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건우 Sep 20. 2020

003-건설공사장에서 만난 두 형

내가 만난 사람들

003-건설공사장에서 만난 두 형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매형을 따라 건설공사장에 처음 나간 날, 1976년 2월 6일. 종점에서 버스를 타고 노량진에서 내려 여의도까지 샛강을 걸어서 건너야 했다. 공사장은 아침 7시에 작업을 시작하고, 저녁 7시에 작업이 끝났다. 하루 12시간 노동이다. 여기에 출퇴근 시간이 왕복 3시간 정도.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집에 오면 저녁 먹고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여러 곳의 영세한 공장을 다니며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았다. 가내수공업으로 낚시대 만드는 공장, 압핀공장, 유리병공장 등을 다녔고, 건설공사장을 다니기 직전에는 청량리 시장 안에 있는 식당에서 일했다. 음식 배달도 하고, 청소, 서빙, 냉면 내리기 등 식당의 잡일은 모두 했다. 월급은 거의 없었고, 유일한 장점이자 즐거움은 음식을 배불리, 실컷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식당은 백반, 순대국, 냉면 따위를 다 만드는 일종의 음식백화점 같은 곳이어서 식재료가 항상 풍성했다. 그때 함께 일하던 형이 있었는데, 둘이 다락방을 썼다. 다락방은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했으며, 요강에서는 항상 지린내가 났다. 식당이 영업을 마친 저녁에 우리는 순대를 길게 끊어서 다락방에서 먹었다. 

하지만 식당 일도 오래 하지 못했고, 결국 일당이 조금 많은 건설공사장으로 가는 것은 필연이었다. 이미 매형이 배관공으로 일을 하고 있어서, 조금 편하게 건설노동자가 될 수 있었다. 일 시작하면서 받은 일당은 600원, 조금씩 올라서 800원이 되었고, 몇 달 지나서 서울이 아닌, 지방으로 일하러 갈 기회가 생겼다. 지방 공사는 그동안 좁은 울타리에만 살았던 내게 새로운 눈을 뜨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길고 지루한 출퇴근 시간이 사라졌고, 더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졌으며, 일도 한결 편했다. 여기에 일당이 서울에서 다닐 때보다 더 많았다. 우리 팀은 주로 연초제조창에서 일을 많이 했는데, 광주연초제조창, 신탄진연초제조창에서 일할 때의 기억이 특별하다. 일하러 다닌 곳도 광주, 마산, 창원, 울산 등 그때 처음 생기기 시작한 공업단지의 기숙사 건물이 많았고, 설악산 아래 설악동을 처음 지을 때는 한겨울에 따뜻한 물이 없어 찬물로 머리를 감아야 했다.

그렇게 지방을 전전하며 공사장에서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 팀의 사장은 공사장 근처에 하숙집을 잡아서 묵게 해주었는데, 하루 세 끼의 식사가 마냥 행복했다.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고, 하루 12시간 일과만 마치면 자유시간이 많았다.

서울에서 함께 내려간 팀원 가운데 두 명의 형이 내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 우연히 그 두 사람은 모두 서울토박이였고, 나도 서울에서 태어났으니 우리는 동질감을 갖고 있었다. 원범이 형은 유한공고를 졸업하고 잠시 공사장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신탄진 하숙집 아주머니가 중매를 서 신탄진에서 결혼을 했다. 

나는 어릴 때 노동자가 된 이후, 배운 것이 없었다. 삼중당문고는 꾸준히 읽었지만, 세상 물정도 몰랐고, 사람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내게 사회생활의 기본을 알려준 사람이 두 형이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가르쳐 준 형과, 다정다감하고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해 준 다른 형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성장 배경이 사뭇 달랐지만, 내게는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그때 바느질도 배우고, 기타 치는 법도 배웠으며, 무슨 일이든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요령을 배웠다. 그때 공사장에서 만난 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나는 그들보다는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고, 또 스스로 배우려는 의지는 분명했다.

나는 술, 담배를 배우지 않았고, 체질도 맞지 않아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건설노동자의 대부분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셨다. 내게 영향을 준 두 형 모두 술과 담배를 하지 않거나 아주 적게 한 것도 분명 영향이 있었다.

그렇게 좋은 영향을 끼친 두 형과도 시나브로 만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선화예고 공사장에서 먹고 자며 일하고 있었는데, 그 전후로 독서회를 알게 되었다. 독서회를 만나게 된 것은 내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 사건이었고, 두 형과도 이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002-내 친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