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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Oct 13. 2020

아티스트, 나훈아

아티스트, 나훈아

올해 한가위는 텔레비전에서 방송한 나훈아 공연이 가장 큰 화제였다. 무려 160분 공연을 나훈아 혼자 이끌었고, 시청률은 30%에서 순간 최대 70%까지 나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번 공연은 나훈아 씨가 무려 15년 만에 텔레비전에 출연한 것으로, 그에게나 팬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나훈아 씨는 출연료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방송에서 광고를 내보내지 않았고, 공연 기획, 무대, 조명 등 모든 것을 자신의 지휘로 직접 준비했다. 예전에 부천의 한 체육관에서 그의 공연을 직접 본 이후, 그가 단지 노래만 하는 가수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 공연으로 나훈아 씨는 기존의 팬들보다 훨씬 많은 대중에게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냈다.

이번 공중파 공연은 모두 3부로 구성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나훈아의 히트곡들이 앞쪽에 배치되었고, 2부와 3부에서 그의 신곡 가운데 몇 곡이 들어갔다. 나훈아 콘서트는 화려한 퍼포먼스로도 유명한데, 무대 뒤에 수십 명의 합창단은 기본이고, 타악, 국악, 댄스, 사물놀이 등 여러 장르의 음악을 활용해 관객의 귀와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여기에 절묘하게 꺾이는 나훈아의 창법과 상남자의 외모에서 나오는 간드러진 노래, 외모와는 다른 조금은 푼수같은 멘트 등이 대중에게 친근함을 느끼게 한다. 1970년대부터 나훈아, 남진의 경쟁구도를 만든 것은 연예계와 언론이었는데, 대중가요계에서는 투탑으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지만, 이때의 나훈아는 20대 중반의 청년으로, '노래를 잘 하는 가수'로 인기가 많고, 팬덤이 형성된 대중가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70년대는 정치, 사회적으로 엄혹한 시기였다. 독재자 박정희는 영구 집권을 노리고 있었고,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청년들은 청바지, 통기타, 맥주로 대표되는 청년문화를 만들어가면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장르가 새롭게 나타났다. 

한대수, 김민기, 조영남, 송창식, 김도향,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양희은 등 당시 통기타 세대는 청년 문화의 바람을 일으켰고, 정부는 이런 청년 문화를 불순한 것으로 규정해 억압했다.

이들 1세대 통기타 가수들 가운데 한대수, 김민기는 '아티스트'다. '가수'와 '예술가(아티스트)'를 구분하는 것은, 주어진 노래를 부르는 사람과, 자기가 직접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작사, 작곡가가 만든 노래를 대중 앞에서 부르는 건, 노래를 잘 부르는 기교만 있으면 되지만, 자기가 직접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것은 자신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차원이 다르다.

소설가나 시인이 글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이라면, 영화감독은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연출해 만든 영화로 발언한다. 박찬욱, 봉준호 감독이 그렇다. 음악 역시 작사, 작곡, 노래를 자신이 직접 할 때 비로소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대수, 신중현, 김민기, 정태춘, 송창식 등은 수많은 가수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존재들이다. 70년대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 가수들의 노래는 주로 미국의 팝송을 가져와 번안해서 불렀고, 당대 한국의 현실이나 민중의 목소리를 스스로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한대수가 갑자기 나타났다. 한국 가요계는 한대수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한대수의 등장은 한국가요계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작사, 작곡, 노래를 직접 하는 가수의 등장은 곧바로 그 시대 가수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한대수 이후 자기 노래를 하는 가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특징은 미국에서 생활하며 직접 영향을 받았거나(한대수), 미군부대에서 연주, 노래를 하거나(신중현), 당시 독재정권의 집권 상황에서 친일문화와 급격히 들어오는 외래문화(주로 미국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민중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삶과 노래를 일치하려는 노력(김민기, 정태춘, 송창식)이 만든 결실이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트로트 장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트로트가 일본 가요인 '엔카'의 영향을 직접 받은 왜색이 짙은 노래라고 비판했으며, 우리 민족의 정서를 해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청년문화에 직접 영향을 끼친 미국문화에 대한 비판은 적었다. 그럴 것이, 미국에서 일어난 팝, 락음악은 당시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인종차별 반대를 위한 표현 도구로 쓰였고,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청년문화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밥 딜런, 존 디아즈가 통기타 음악의 상징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비틀즈를 비롯해 수 많은 그룹이 기존 음악의 틀을 깨면서 새로운 세대를 열고 있었으며, 이 물결은 한대수에게 직접 영향을 끼쳤고, 한대수의 뒤를 따라 물밀듯이 미국 대중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나훈아는 '트로트 가수'로 출발해 '예술가'가 된 드문 경우에 속한다.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무수한 가수가 노래했고, 인기를 얻었으며, 스타가 되었지만, 그들 가운데 '예술가'로 불린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나훈아는 1968년에 데뷔한 이후, 오래지 않아 동료 가수 남진과 라이벌로 불리며 인기가 절정에 이른다. 라이벌 구도를 만든 것은 두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당시 방송과 언론이 인기가 많은 남진과 나훈아를 라이벌로 엮어 보다 가치가 높은 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의 결과물이었고, 대중은 이런 라이벌 구도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호응했다.

나훈아가 '예술가'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건 그가 데뷔하고 10년이 조금 지났을 때부터 드러난다. 1981년, KBS에서 나훈아 100분쇼 스페셜을 방송했는데, 이때 나훈아는 자신의 노래는 물론, 전통 트로트를 부르는 한편, 우리 민요(양산도, 사발가, 닐리리야)를 구성지게 부른다. 100분 동안 혼자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말하며 끌고 가는 힘이 대단하고, 무엇보다 노래를 맛깔나게 불러 보는 사람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나훈아가 민요를 부르는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어려서 엄마를 따라 국악 공연을 자주 보러 다녔고, 직접 민요를 배우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외항선 선원으로 집에 거의 없었고, 엄마는 나훈아의 손을 잡고 주로 국악 공연을 보러 다녔는데, 나훈아도 그때 국악을 배워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를 다루는 것을 엄마가 보면서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미 나훈아는 어려서 음악의 기초를 국악으로 쌓아왔다.

나훈아가 가수로 데뷔한 것도 우연한 기회였고, 그는 공부를 잘 하는 수재였다. 나훈아의 아버지는 아들이 의사나 판사가 되기를 강력히 바랐고, 가수가 된 나훈아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부도 잘 하고, 노래도 잘 하는 나훈아는 목청이 이미 타고난 가수였으며, 그는 한때 성악을 할 생각도 진지하게 가졌다고 했다.

나훈아가 부르는 트로트에서 특유의 '꺾기'는 트로트 창법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꺾기와는 조금 다른데, 나훈아 스스로 밝혔듯, 트로트와 민요를 결합한 창법이 나훈아 창법이다. 성량이 풍부하고, 국악을 일찍부터 배워 트로트를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한 것이 지금의 창법이 된 것이다.

국악으로 시작해 스타가 된 경우가 또 있는데, 경연대회를 거치며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송가인이 그렇다. 송가인도 엄마가 소리를 하는 분이고, 어려서 판소리를 배웠으며, 스스로 트로트를 독학으로 배워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며 스타가 되었다. 송가인 역시 어떤 노래든 잘 부르고 폭넓은 성량을 자랑하는 것은 타고난 면도 있지만, 판소리로 기초를 탄탄히 다졌기 때문이다.

나훈아가 텔레비전에 자주 나온 시기는 데뷔 이후 1980년대 말까지였다. 그는 이 시기에 텔레비전 가요 방송에서 '10대 가수', '최고 가수상' 등을 모두 받았으며, 단독 공연을 비롯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70년대 라이벌이었던 남진이 가수협회장을 하고, 방송에 자주 출연해 대중에게 모습을 보인 반면, 나훈아는 텔레비전 출연이 거의 사라졌다. 대신 그는 전국의 공연장을 돌며 콘서트를 열었는데, 이때부터 나훈아는 텔레비전에서 소비되는 대중가수와는 다른 길을 가기로 선택했다. 텔레비전에 출연하면 높은 인지도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신선함이 사라지고, 상품으로의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그 사이에 나훈아 개인의 삶은 밝지 않았다. 공연을 하는 도중, 괴한에게 테러를 당해 심하게 상처를 입었고, 결혼, 이혼, 결혼의 과정이 있었으며 콘서트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주로 공부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배우 김지미 씨와 결혼한 이후 김지미 씨에게 서예와 그림을 배웠는데, 나훈아 개인의 인격과 내적 성숙이 이 시기에 많이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1989년, KBS에서 방송한 나훈아 쇼특급에서는 이전보다 발전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훨씬 많은 합창단과 무용팀이 나오고, 나훈아는 공연 끝부분에서 남북통일을 노래하고 있다. 1990년 '나훈아 스페셜'에서는 노래와 춤을 다양하게 변주하는 장면을 직접 연출해서 그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를 '아티스트'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번 KBS에서 방송한 '2020 대한민국 어게인' 공연이 결정적이다. 이미 2000년 이후 나훈아는 수 많은 콘서트를 통해 아티스트의 면모를 충분히 보였고, 그에게 '가황'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도 팬들이었다.

콘서트에서 그가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기대나 상상을 뛰어 넘는 파격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배운 국악, 국악기, 무용, 합창, 연주 등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를 동원해 화려하고 아름다운 무대를 연출하고 있다. 

그가 부르는 대부분의 노래는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인데, 작곡과 편곡은 전문 작곡가와 편곡가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가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작품의 내용과 수준에 있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발언하며, 그 작품이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건 대중의 판단과 선택에 있다.

나훈아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이후 '엄니'라는 노래를 만들어 광주시민에게 헌정했다. 하지만 이 노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2020년 신곡 앨범에 들어갔다. 노래를 들어보면, 저절로 눈물이 흐를 정도로 노랫말과 음악이 애절하다. 가사에서는 광주민주항쟁에 관한 내용이 직접 들어 있지 않지만, 나훈아가 처음으로 전라도 사투리로 노래를 부른 것, 엄니에게 간절히 부탁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누구나 이 노래가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것임을 알 수 있다.

헤비메탈 그룹 '블랙홀'이 부른 '마지막 일기'도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가 쓴 일기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이렇게 구체적인 내용을 가사에 넣지 않아도 대중은 상징과 은유를 충분히 해석하고 공감하게 된다.


엄니 엄니 워째서 울어쌌소

나 여그 있는디 왜 운당가

엄니 (엄니) 엄니 (엄니) 뭐 땀시 날 낳았소

한 많은 이 세상 어째 낳았소


들리지라우 엄니 들리지라우 엄니

인자 그만 울지 마시오

엄니 엄니 워째서 불러쌌소

눈앞에 나 있는디 어째 날 찾소

엄니 (엄니) 엄니 (엄니) 무등산 꽃 피거든

한 아름 망월동에 심어주소


들리지라우 엄니 들리지라우 엄니

인자 그만 울지 마시오

엄니 엄니 워째서 잠 못 자요

잠자야 꿈속에서 날 만나제

엄니 (엄니) 엄니 (엄니) 나 잠들고 싶은디

잠들게 자장가나 불러주소


들리지라우 엄니 들리지라우 엄니

인자 그만 울지 마시오

인자 그만 울지 마시오

인자 그만 울지 말랑께


이 가사에서 '무등산 꽃피거든 한아름 망월동에 심어주소', '나 잠들고 싶은디 잠들게 자장가나 불러주소'는 아직도 진상규명이 끝나지 않은 광주민주화운동과 가해자 전두환 일당이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처참한 상황을 뜻하고 있으며, 전두환 일당을 처단하고, 광주항쟁을 역사에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때,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있다.


나훈아가 '예술가'로 인정받는 사건 가운데 한 재벌 회장이 불렀을 때, 오히려 자기 공연장에 와서 들으라고 말한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의 가수라면 그 재벌 회장의 생일에 초청받아 노래를 부르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하겠지만, 나훈아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만큼 나훈아는 자신의 음악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직업을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예술가는 결코 돈에 팔려다니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예술가나 작가, 지식인이 돈에 팔려다닌다면 그건 이미 예술가, 작가, 지식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대중가수는 노래로 인기를 얻는데, 노래는 가사와 음악으로 구성한다. 음악은 가사를 표현하는 동시에 멜로디 자체의 힘을 지니고 있다. 가사가 없어도 음악은 성립하고, 음악이 없어도 음악이 된다. 클래식 음악도 음악이고, 판소리도 음악이다. 대중가요는 가사와 음악이 대중의 정서에 호소하고,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대중가요를 낮춰 말하는 사람은 클래식 음악이 더 '고급'하다고 믿는다. 이건 어처구니 없는 사대주의다.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쵸네도 대중가요다. 오페라는 당대의 대중이 즐기던 대중을 위한 공연이었다.

해학과 풍자, 은유를 내포한 작품을 만들 정도의 가수라면, 그 가수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예술가라고 볼 수 있다. 신중현, 한대수, 정태춘 같은 가수를 예술가라고 부를 때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이제 나훈아도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걸 말할 때가 되었다.

이번 '2020 대한민국 어게인' 공연에서 가장 인기를 얻은 노래 '테스형'은 그가 예술가의 반열에 확실히 올랐음을 증명한다. 어느 예술 장르든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미와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상징미가 있기 마련이다. 대중음악에서는 풍자와 해학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표피적인 내용만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기는 불가능하다. 일시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지만 그 생명이 매우 짧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울 아버지 산소에 제비꽃이 피었다

들국화도 수줍어 샛노랗게 웃는다

그저 피는 꽃들이 예쁘기는 하여도

자주 오지 못하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

아! 테스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세월은 또 왜 저래

먼저 가본 저세상 어떤가요 테스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형


가사에서 '테스형' 즉 소크라테스에게 하소연 하는 내용이다. 소크라테스를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파격이지만, 가사에서 백미는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와 '테스형 아프다 세상이 눈물 많은 나에게'다. 이 가사는 50대 이하와 그 이상에서 느끼는 감정이 상당히 다를 것으로 안다. 흔히 유행가 가사가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면 그건 내 이야기라고 한다. 50대 이상에서는 '세상이 왜 이렇게 힘들고, 눈물 많은 나에게 세상이 아픈' 것은 바로 내 이야기라서 공감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를 소환한 것은, 대단한 철학자로 알려진 소크라테스도 사실 알고보면 우리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걸 말한다. 위대한 사람의 삶이나 평범한 사람의 삶이나 모든 삶은 비슷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삶은 희노애락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인생은 고행이지만, 그 고행을 알되, 삶은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불교적 관점을 말하고 있다. '턱 빠지게 웃다'가도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 것은 나이 든 사람이라면 절절하게 공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노래가 훌륭한 건, 노래 전체를 뒤집는 상징이 있다는 데 있다. '테스형'의 진짜 모습은 아버지였다. 즉 나훈아는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고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묘소 앞에서, 힘들고 외로운 자신의 처지를 아버지에게 하소연 하는 내용인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 하면서, 힘들고 외로운 내 처지를 아버지에게 넋두리 하면서, 정작 부르는 대상은 '테스형'인 것은, 그가 풍자와 해학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훈아는 나이 들면서 꾸준히 발전, 진화하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 졸업 후 얻은 직장에서, 직책에서 수십 년 변하지 않으면서 점점 퇴화하는 것과는 달리, 늘 새로운 시도와 모험을 하며 삶의 지평을 확장해 온 태도만으로도 나훈아는 충분히 훌륭한 인물이다.

이번 KBS 공연도 그렇지만, 그는 콘서트를 할 때, 무대 기획부터 소품까지 스스로 꼼꼼하게 점검하고, 확인하는 사람이다. 91년 한 방송에서 나훈아와 이상벽 씨가 같이 나와 대담을 하는 가운데, 이상벽 씨의 증언을 들어보면, 나훈아 씨가 얼마나 완벽주의자인가를 알 수 있다. 그건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을 지키려는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무대의 완벽주의자라면 조용필을 떠올릴 수 있는데, 나훈아, 조용필 같은 최고의 스타들이 보여주는 결벽에 가까운 완성도에 대한 집착은, 그들이 성공하는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데뷔하고 이제 50년 넘는 세월을 무대에서 노래한 나훈아는 한국가요계의 살아 있는 증인이자, 한국가요의 지평을 확장하고, '대중가수'에서 '예술가'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 교과서 같은 인물이다. 이렇게 멋진 사람이 문화예술계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멋지지만, 그는 여전히 청년으로 활동하고 있어서 더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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