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의 날.
몇주동안의 고생이 하루, 아니 2~3시간 안에 모두 보여지는 날.
평소처럼 일찍 출근을 한 마루는 불이 꺼져있는 교실들을 쭉 둘러보았다.
교실 바닥이며 벽, 구석 하나하나까지 선생님들의 손길과 노력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을 것들 이지만, 같은 교사인 마루는 알아볼 수 있었다.
교구장 사이에도, 바구니에도, 아이들 이름표에도
그동안의 선생님들의 정성과 노력이 쌓여있었다.
마루는 항상 축제당일보다 축제 준비기간을 더 좋아했다.
방학 당일보다 방학을 기다리는 시간을 더 좋아했더랬다.
좋아하는게 다가오고 있다는 기대감과 설레임이 더 좋았던 것이다.
다행인건,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거였다.
준비하는 동안 엄청난 부담감에 시달렸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해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전날 잠도 이루지 못한 것에 비하면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건 사실이지만,
긴장감과 부담감이 밥그릇에 먹다 남은 밥 한숟가락만큼 마음 한켠에 남아있었다.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출근하고, 연수실은 들뜬 분위기와 긴장감이 함께 감도는 묘한 기운이 퍼졌다.
한사람의 얼굴에 긴장과 오늘이면 끝난다는 홀가분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마루는 처음 알았다.
정말이지 읽을 수 없는 표정들이었다.
"평소 하던대로 하면 되지!!! 너무 무담갖지 말자고~"
선생님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힘을 주어 이야기 하는 마루였다.
마루도 애써 힘을 내보는 척 하지만 마음이 마음이 아니었던지라 잠도 통 못자는 바람에,
죽어라 다이어트를 해도 단 1그램도 빠지지 않던 살이 준비하는 기간동안 쏙 빠져버렸다.
교실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 졌다.
학부모님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우리 엄마를 찾아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으며,
오랜만에 동창이라도 만난듯이 엄마들끼리 반가운 인사를 주고 받기 바빴다.
이제부터는 긴장할 시간도 없다.
부담감을 느낄 여유도 없다.
말그대로 지금부터는 마루가 아니었다.
수업을 하며 학부모 한명한명과 눈을 맞추고,
아이들의 표정을 바라보며, 손을 들고 발표하려는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기 위해
누가 발표를 했었는지, 아직 하지 못한 아이가 누구인지 신경써야 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끝나고 보면 의식을 잃었던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슨 정신이었는지 기억이 안나는 순간들이었다.
말 한마디를 하기 전에 생각을 하고, 말을 하면서도 생각을 해야 했다.
학부모와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며 다음 질문을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정신을 잃지 않으려, 차분해지려 노력하면서 수업을 진행하던 순간이었다.
"우리동네를 돌아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것은 무엇이었나요?"
"..."
큰일이었다.
아이들이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몇일 전부터 엄마가 우리를 보러 올꺼라고 이야기를 해놨던게 탈이 된걸까?
평소에 잘 하던 대답도 아이들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와중에 눈치없는 아이 서너명이 뒤를 돌아보며
"우리엄마에요!!"를 외치고 있었다.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등줄기로 한줄기 땀이 흐르려던 그때였다.
"아이스크림 가게요!"
영우였다.
질문에 알맞는 정확한 대답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이 사진은 우리가 무엇을 했던 사진인가요?"
"..."
평소에는 손도 들지 않고 서로 말하려고 싸우던 아이들이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카페 놀이요. 저는 사장님을 하고 있어요!"
또 다시 영우였다.
평소에 친구들과 놀이만 하면 싸우기 바빴던 영우였다.
자기가 가진 것 보다 남이 가진것을 더 욕심내는 바람에 항상 친구들과 부딪힘이 있던 아이.
매일같이 싸움을 중재하느라 힘들었는데,
오늘 공개수업에서 영우는 영웅이었다.
그리고 마루는 볼 수 있었다.
영우 엄마의 표정을.
지금 이순간 영우엄마에게 영우는 '슈퍼천재' 그 자체였다.
그와중에 평소에는 앞줄에 앉아 반짝이는 눈으로 마루를 바라보던
태민이가 안하던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며 엄마를 몇번이고 부르지를 않나, 손을 입에 넣으며
"이거 먹어도 돼요?" 라며 말도 안되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걸 먹으면 되겠니....'
차마 입 밖으로 낼 순 없는, 속으로 삼켜야 하는 말이었다.
평소 수업대로 흘러가지 않을꺼라는 건 알고 있었다.
돌발상황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아이들은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들을 보일 것이었다.
다 알고있는 사실인데도 맥이 빠지는건 어쩔 수가 없었다.
평소에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모습이든간에
지금 이순간 눈앞에 보이는 모습만을 믿을 학부모들이었다.
보이는게 전부가 아니지만, 보이는게 전부였다.
정신 없는 하루가 지나갔다.
마루는 인파와 소음이 사라진 빈 교실에 다시 들어왔다.
벽에 걸려있는 아이들 작품, 예쁘게 꾸민 창문, 정성스럽게 오리고 붙여서 꾸민 교실 구석구석-
모두 오늘 하루만을 기다리던 것들 이었지만, 이제는 자기 몫을 다하고 지나간 것이 되었다.
마루는 마음이 후련했다.
잘했든, 못했든 일단 끝이 났다.
항상 감사하다는 학부모는 마루가 무엇을 해도
'선생님 고생하셨다'며 감사해 할 것이고,
항상 불만인 학부모는 마루가 무엇을 했든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는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시간들이었다.
긴 시간동안 정성과, 시간과, 노력을 새하얗게 불태웠던 교실 문을 닫고 나가며,
마루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