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어쩌겠니, 너가 선생인데 가야지
마루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 불편충인만큼 이번 사건(?)도 듣자마자 눈사이가 한껏 찌푸려지는 일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첫날 수업을 마치고 연수실로 모인 여섯살 선생님들이 이제 막 수고했다는 인사를 마친 참이었다.
"오늘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라는 질문에 4년차 지연이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아이들은 그런데로 괜찮았는데, 학부모님들 중 한분을 조금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머릿 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첫날인데? 벌써? 그럴일이 있다고?
걱정스러운 마루의 표정일 읽은 지연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이가 칫솔을 안가지고 온 줄 알고 어머님께 문자를 보냈는데, 가방 안쪽에 들어있었더라고요.
그런데 어머님이
'아니, 애들 가방 확인 안해요? 완전 어이없네'라고 문자를 보내셨어요.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기면 어떤 반응으로 나올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하네요"
하아...
이런 일로 어이없어 하는게 더 어이가 없었다.
첫날 정신없이 보내는거야, 교사 사정이니 학부모님들이 몰라줘도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래도 서로간에 예의는 지키면서 대화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산전수전 다 겪은 마루야
'아, 오늘 집에가서 맥주 한잔 마셔야겠다' 하고 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지연에게는 아니었다.
이럴때 근사한 말로 위로해주는 멋진 선배이고 싶었지만, 위로에 서툰 자신이 밉기만 했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첫날이라 힘든데 커피한잔 하자. 오늘은 내가 쏠게!"
이런 진부한 멘트가 전부였다.
비록 일이란 일은 다 도맡으며 꼴랑 6만원 더받는 부장수당이지만 뭐, 이럴때 써야지 어쩌겠나.
어쩌면 부장수당은 '너는 물욕없는 청렴한 선생님이야'를 강요하는 금액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 앉아 학기초 밀린 업무를 보려고 하는데 마루의 모니터 하단에 알람이 떴다.
마루네반의 '이지아 학부모님'이 쪽지를 보냈다는 알람이었다.
마루는 방금 전 지연이 겪은 일을 떠올리며 긴장되는 마음으로 쪽지를 열어봤다.
쪽지 안에는 장문의 글, 아니 편지에 가까운 말들이 쓰여 있었다.
'선생님. 오늘 첫날인데 아이들 보느라 고생하셨어요'
로 시작되어
'올 한해 일년동안 우리 지아 잘 부탁드려요'로 끝나는 글이었다.
마음이 뭉클해지려는 순간, 동시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2월. 불과 한달 전의 일이었다.
교사들끼리 누가 몇반을 맡을지 회의를 하는 시간이었다.
마루는 1반, 지연선생님은 2반을 골랐다. 모두 마쳤다고 생각했는데 지연이 조심스럽게 마루에게 물었다.
"부장님. 혹시 저하고 반 바꿔주실 수 있으세요?"
"상관은 없는데, 왜요?"
"작년에 쓰던 교실 1년 더 쓰고 싶어서요. 혹시 싫으시면 괜찮아요."
"아니에요, 좋아요. 교실 옮기는게 보통일도 아니고...나는 괜찮아요!"
이렇게 반을 바꿈과 동시에 일년동안 함께 생활할 아이들, 학부모님들을 모두 바꾸게 된 것이었다.
그때 순간의 선택이 새학기 첫날 두 교사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마루는 선생님들 인생이 꼭 주사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에 의존해야만 하는 운명.
방금까지 첫날 학부모에게 한마디 말로 상처입은 동료교사를 보고왔는데,
마루는 오늘하루 고생했다고, 잘 부탁한다는 장문의 편지를 받은 터였다.
반배정을 할 때 마루와 지연이 바뀌었다면, 오늘 천국과 지옥의 끝에 서있는 둘의
기분과 감정을 정 반대였을 것이다.
어떤 학부모를 만날지, 어떤 아이들을 만날지, 어떤 동료들을 만날지
나의 일년이 달려있는 이 중요한 만남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특히, 더욱-
그저 주사위 던지듯 툭-하고 주어지는 만남에 순응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던 하루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당장이라도 바닥에 누워 뻗고싶은 마음을 간신히 누르며 옷을 정리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
울리는 핸드폰 속에 '엄마'라는 두글자가 떴다.
"어, 엄마. 무슨일이야?"
"오늘 새학기 첫날이잖아. 별 일 없이 잘 마쳤나 해서"
평소라면 반가웠을 전화지만 지금은 전화받을 체력도 남아있질 않다.
평소 아이들 얘기며 학부모 얘기며 있었던 일들을 주저리주저리 얘기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냥 그랬지 뭐. 아!! 유치원 가기 싫다!!"
의미없이 하는 하소연 끝에 엄마의 대답이 들린다.
"그래도 어쩌겠니, 가야지. 너가 선생인데"
그래. 어쩌겠나. 가기싫어도 가야지. 하기싫어도 해야지. 해내야지.
이런저런 대화들로 전화를 끊고 마루는 결국 거실에 대자로 뻗어 누웠다.
오늘하루의 긴장과, 간밤에 잠을 설쳤던 피로가 한꺼번에 마루를 덮치듯 몰려왔다.
피로를 이불삼아 누워 거실 천장에 대고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새겨 본다.
오전에는 아이들과 선생님으로써, 오후에는 행정업무와 서류에 둘러싸인 부장으로써 보냈고,
엄마와 통화할때는 철없는 딸로, 이제는 집에서 아내로써 보낼 시간 시간이다.
하루를 여러번에 나눠서 산 느낌이었다.
길도고 긴 하루였고, 많은 일들이 있었던 첫날이었다.
첫날. 첫만남.
남들은 1월 1일에 시작하는 1년의 첫날을 마루는 3월 2일이 되어서야 그렇게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