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상담중입니다.

by maru

왜 바쁜일은 한번에 몰려오는가.

사람이 살면서 힘든일이 한번에 몰려오는 것 처럼 유치원도 바쁜시기에 일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 했다.


3월.

아이들 적응부터, 수업, 각종 공문처리에 그놈의 서류, 서류, 서류....끝이 없는 서류와의 싸움까지.

이런 와중에 마루에게 3월 중 가장 큰 이벤트가 다가왔다.

1학기 학부모 정기상담.

가정과 유치원이 정보를 나누며 1년 동안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이었다.

정말이지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한 순간이라고 마루는 생각했다.


마루는 오늘 평소보다 신중하게 고른, 단정한 옷을 차려입고 출근했다.

아이들에게는 우리 선생님이 평소보다 더 반짝반짝하고 예뻐보이는 날이지만,

사실 선생님들에게는 평소보다 긴장과 부담이 더 가중되는 날이기도 했다.


-상담실-


조용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빈 공간에 마주보고 놓은 길다란 책상 두개와 의자 두개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곳에서 마루는 며칠에 걸쳐 학부모들과 17명의 아이들에 대해 치열하게 얘기할 것이다.

긴장한 마음을 누르고 웃음을 보이며, 때로는 공감하며.

조심스러운 말들을 꺼낼 때는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라가며 목이 쉬도록 이야기 할 것이다.


드르륵-


상담실에 앉아 아이들을 관찰한 기록을 들춰보며 상담을 준비하고 있는데 첫번째 학부모가 들어왔다.


'자, 시작이다'


마루는 긴장한 마음을 누르며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여기 앉으세요"


첫번째 상담이 시작되었다.

마루는 학부모의 얼굴을 천천히 살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물론 그런 의도의 상담이 아니지만, 꼭 상담을 할 때마다 얼마나 아이에 대해 잘 관찰했는지

시험대에 오르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 마루였다.

긴장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상담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름 고경력인 마루는 학부모의 유형을 단번에 파악했다.

다행히도 첫번째 만난 학부모는 "유치원이 재미있으면 됐죠" 유형의 학부모였다.


"선생님. 우리 채인이는 유치원이 너무 재미있대요.

주말에도 유치원에 가고 싶다고 해요. 저는 그걸로 됐어요. 호호"


사실 마루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유치원이 재미있으면 된것 아닌가?

친구들 잘 사귀고, 재미있게 놀이하고, 선생님이랑 즐겁게 생활하면서 주말에도 가고싶은 유치원이라니!


'캬. 역시!'


속으로 짦은 탄성과 함께 스스로를 칭찬하며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 했다.

다행히도 첫번째 상담부터 유쾌하고 즐겁게 시작할 수 있었다.


두번째 만난 학부모는 "네? 우리아이가요?" 유형의 학부모였다.


"선생님, 우리 연우는 집에서 정리를 너무 안해서 유치원에서도 그럴까봐 걱정이에요"

걱정스러운 학부모의 표정을 보며 마루는 대답했다.


"연우가요? 유치원에서는 정리대장인데 이상하네요"


사실 집에서는 아직 막내라서, 아직 아기같아서, 아직 의존적이라서 걱정을 한아름 안고

오는 학부모들도 유치원에서의 생활을 들으면 놀라곤 했다.

우리 아이의 이중적인 모습이라니!

유치원은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사회였고, 그안에서 규칙이나 약속을 배워가며 사회화가 되어가는 곳이었다.


놀란 학부모의 표정을 보며 마루는 덧붙였다.

"아이들도 아는거죠. 유치원에서 "해줘"는 안통한다는 걸요."


마루와 학부모는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마루는 오늘하루만 여섯명의 학부모들과 상담을 마치고 연수실로 들어섰다.

학부모들과 나눈 이야기를 떠올리며 상담기록지를 하나하나 다시 정리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걸까?

아이들이 집에서의 모습과 유치원에서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걸까?'


친정에 가면 수면바지 차림으로 소파에 누워 "엄마, 물!"을 외치는 마루와,

번듯하게 차려입고 화장을 뽀얗게 한 얼굴로 '응, 나 고경력!' 이라는 포스를 뿜으며

각종 업무를 척척 해내는 마루는 놀랍게도 동일인물이다.


술과의 싸움에서 진 후 친구를 붙잡고 울며불며 유치원 일이 힘들다고

오늘은 원감한테 이런 말까지 들었다고 주정 부리는 마루와,

아이들 앞에서 해맑게 웃으며 손유희와 함께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동요를 부르는 마루도 역시 동일인물이다.


'우리는 서로를 알고 있긴 한....걸까....?'


생각을 마치자 괜히 연수실을 한번 쓰윽- 둘러보는 마루였다.

여러명의 학부모들을 상대하고 영혼이 나간 얼굴로 앉아있는 이 선생님들도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이자 친구, 애인일 터였다.

마루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료교사들도 마루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비밀스러운

모습들이 있을 터였다.


'아, 우리엄마도 유치원에 와서 원장님이랑 면담 해줬으면 좋겠다!

사실 마루는 약한 아이니까 일 많이 시키지 말고, 마음이 여리니까 말도 예쁘게 해주고

동료 교사들이랑 친하게 잘 지낼 수 있게 회식도 많이 만들어 달라고!

선생님들은 원장님이랑 학부모 상담 안해주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일년 중 가장 예쁜, 하지만 가장 피곤한 날의 하루가

너덜너덜해진 목과 함께 저물어 갔다.




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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