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00 flowers hidden deep>
종교와 영화 마지막 수업으로 감상한 첸 카이거 감독의 <100 flowers hidden deep>은 10분 남짓의 짧은 단편임에도 이번 학기 종교와 영화 수업에서 다룬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펑씨라는 사람이 ‘꽃동네’에서 짐을 옮겨달라고 말할 때, 실제로는 텅 빈 공간이기 때문에 이삿짐 센터 직원들은 ‘허구’를 인식한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받기 위해 결국 ‘짐이 실제로 거기에 있는 척’ 함으로써 이 허구의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그런데 직원들은 점차 이 허구에 몰입하여 현실과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자전거를 타고 끼어든 사람에게 비키라고 말하고, 꽃병이 깨졌으니 돈을 받지 않겠다고 위로하기도 한다. 이 ‘꽃동산 세계’에 대한 믿음을 종교라고 본다면 직원들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종교적인 것에 끌리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직원들은 현실의 인식에 머무르면서도 허구의 세계를 동시에 믿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보여준 진실의 복수성과 연결된다. 또한, 짐을 옮기는 과정에서 직원들과 펑씨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그 과정은 마치 <맨 프럼 어스>에서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유사하다. 펑씨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이 허구적 이야기를 제작하는 데 동참하는 것이다.
펑씨의 태도에서도 종교에 관한 여러 함의를 도출할 수 있다. 첫 번째로 펑씨의 이야기는 인간이 종교를 찾게 되는 이유를 보여준다. 펑씨는 무언가 힘든 일을 겪었고 그 결과 어딘가 정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행동하게 된다. 그는 흙밖에 없는 공터가 자신의 집이고 여기에 짐이 있으니 옮겨 달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를 망상증이나 트라우마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허구의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펑씨는 살아갈 힘을 잃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책 <호모데우스>에서 인간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 차원에서 ‘허구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능력 덕분이라고 말했다. <카이로의 붉은 장미>에서 이야기했듯 인간은 현실에서만 살 수는 없는 존재다. 혹독한 현실 속에서 인간은 허구를 필요로 한다. 두 번째로 주목할 만한 점은 펑씨의 상상(믿음)이 완전한 허구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영화 후반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펑씨의 집은 강제적으로 철거되었고 펑씨가 말한 ‘꽃동네’는 과거에 실재했던 곳으로 보인다. 이는 종교를 완전히 허구적인 것으로 치부해서도 안 되고, 종교가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는 메시지가 아닐까. 달리 말해 종교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적절히 기능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엉클 분미>에서 보았듯 종교를 다룰 때도 현실 감각을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학기 종교와 영화 수업은 여러모로 기억에 많이 남는다. 종교학 내용도 접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영화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얻어가는 것 같아서 만족스럽다. 앞으로 영화를 볼 때 마음 한구석에 항상 이 수업이 떠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