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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Sep 28. 2016

나 대신 외로워하고 나 대신 슬퍼해주는 당신 (호퍼)

어쩌면 이렇게 나 대신 외로워하고 나 대신 슬퍼해 줄 수 있는지...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한강 <서시> (도입 부분)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어르신들은 <소년이 온다>에서의 생명과 고통을 언급하며,

젊은이들은 <채식주의자>에서의 존재성을 언급하며 작가님을 축하했다. 


그러나 내게 떠오른 것은 오직 <서시>의 다정한 도입 부분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 조용히, 그리고 와락, 끌어안고... 

무언지 정체 모를 온기를 끌어안고,

꼭 맞는 위안이 간절해 그 시를 몇 번이고 외웠다.  


외로워, 외로워, 외로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외롭다는 말.

입 밖에 내고 나면 외로움에게서 헤어나지 못할까봐

새어나오지도 못하게 조심조심 다루는 말.

외로움을 간신히 다독이고 나면 조용히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꺼내본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보면서 울지 않는 날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 나 대신 외로워하고 나 대신 슬퍼해 줄 수 있는지...

Edward Hopper <Solitary Figure in a Theater> 1903

젊음의 초입부터 외로움을 앓는 법을 배웠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외로움과 슬픔을 견디기 위해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나만이 알고 있는 조용한 공간에서, 

때로는 어두운 기도실에서 얼굴을 감추고 꼿꼿이 앉아 조용히 기도를 삼키다 보면,

내 앞에 희미하던 검은 실루엣. 누구 어머님인지 누구 할머님인지 알 듯 말 듯한

그들의 울음소리와 몸부림에 내 고통을 잠시 잊기도 했다.


어둠 가운데 우리는 각자 고독했다.

나의 비밀은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었고 그들의 비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함께 있지만 알려지면 안 되는 비밀을 감추며,

여럿이 홀로 각자의 자리에 서 있었다.


... 결국은 늘 혼자 남게 되었다.

누가 나와 함께 외로워해주고 누가 나와 함께 슬퍼해줄까.

Edward Hopper <The Automat>
Edward Hopper <11 A.M.> 1926

호퍼는 세밀한 묘사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의 손끝도, 발끝도, 속눈썹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그녀들은 나와 닮았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도 자신과 닮았다고 말한다.)

왼손 장갑을 여전히 끼고 있어야 할 정도로 한기가 도는 외로움.

오랜 망설임 끝에도 차마 나아가지 못하고 내내 주저앉게 한 막막함.


호퍼의 이 두 그림을 가장 좋아한다. 나와 닮았다.

동그란 얼굴도, 튼튼한 다리도, 힘 없는 머릿결도,

장갑을 한쪽만 끼는 습관도, 낮은 의자를 좋아하는 취향도

나와 꼭 닮았다.

호퍼의 그림은 나 대신 외로워하고 나 대신 슬퍼해준다.

내가 의연한 척 할 수 있는 것은 호퍼의 그림 덕분이다. 

나 대신 외로워해주고 나 대신 슬퍼해주는 호퍼 덕분에 한 번 더 외로움을 참아낼 수 있다.


이제는 혼자 남아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나의 운명이 나를 끌어안는다. 나의 고독이 나를 끌어안는다. 


다독다독,


운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운명도 나를 믿어 주지 않는다.  

우리는 오래 함께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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