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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Sep 28. 2016

비극을 먼저 겪어준 당신  (마크 로스코)

비극적 경험만이 예술의 원천이다 (2015, 마크 로스코전)

Look, it's my misery that I have to paint this kind of painting, 
it's your misery that you have to love it, 
and the price of the misery is thirteen hundred and fifty dollars.

(Mark Rothko)


예술을 업으로 믿으며 살고 있는, 무기력과 절망에 주저앉은 사람을 만났다. 
나는 목숨처럼 아끼는 마크 로스코의 어록을 인용하여 위로하였다. 


(당신의 결과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왜 좌절하나요.
마크 로스코는 "비극적 경험만이 예술의 유일한 원천이다"라고 했어요. 

우리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당신은 지금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 중이에요.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처음 보았던 때를 기억한다. 
스무 살의 겨울, 강의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는 교수님의 <
○○○○론>수업이었다. 


총명하고 아름다운 그분이 마냥 좋았다. 
복잡하다는 조명 버튼 조작을 배워 맨 앞에 앉았다. 
인스턴트커피 두 잔을 연달아 마시며 행여 졸기라도 할까 봐, 
그분의 말씀 하나를 놓칠까 봐 전전긍긍했다. 

새로운 작가를 만나는 설렘, 새로운 작품을 보는 놀라움, 새로운 마음을 읽는 고통. 
그 모든 것 위에 "선생님"이 있었다. 

그분이 파고드셨던 네 번째 작가가 마크 로스코였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보기 위해 조명을 모두 끄고 슬라이드 필름을 돌렸다. 
이전의 수업과 달랐다. 어둠이 가득한 공간에서 필기를 할 수 없었다. 
연필을 꺼내 손끝을 더듬어 종이 위에 글자를 그렸다. 

교수님은 이 공간에서 이 그림에 빠져드는 경험을 요청했다. 
빠지기는커녕 슬슬 아팠다. 
왜 아픈 거지. 가슴 사이가 뻐근하게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목 위로 치밀어 오르는 무엇, 
그리고 그것이 곧 눈가로 올라오기 시작한다. 

안돼.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 



미술이론도 미학도 약간 알게 된 지금, 그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안다. 
숭고의 경험이다. 숭고는 압도하는 경험을 통해 고통을 가져온다. 

고통이 스며들지 않으면 숭고가 아니다. 
그리고 이 고통은 내 밑바닥에 깔린 고통과 맞닿아 오른다. 
이것을 비극으로 부르고 싶지 않다.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다. 
이것을 극으로 올리고 싶지 않다. 

이 극은 내 안에서만 상영되어야 한다. 
내가 공개하고 싶지 않은 비극은 결코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 중 유명하지는 않지만 가장 이 비밀과 어울리는 작품이 있다.
분홍색과 하늘색으로 내 위에 무너져내리는 마크 로스코의 비극, 
<Untitled> (1969년), 나는 이 작품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마크 로스코의 비극을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당신도 나와 같은 비극을 먼저 겪은 이였구나, 그것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는 비밀 안에서 각자의 비극을 최선을 다해 연출한다. 

이것이 엿보이는 순간 능청스레 감추는 능력이 어른의 능력이다. 


하지만 같은 주제의 비극을 연출했던 사람은 같은 주제의 비극을 상영하는 사람을 알아본다.
그들은 서로 끌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비극을 상영하는 사람을 끌어안는다.



마크 로스코는 혹시 이것이 당신의 비극인가요?라는 물음을 던진다. 

비극을 경험한 사람만이 비극을 위로할 수 있다. 
비극을 거둬낸 사람만이 비극을 지켜볼 수 있다. 


대학시절 내내 "선생님"과 가까이 지냈다. 졸업하고 나서도 몇 번 찾아뵈었다. 
선생님과 가까워질수록 선생님의 사연을 엿보게 되었다. 
선생님의 아픔, 그래서 선생님이 상영하고 있는 비극, 
그리고 그 비극을 견뎌 내는 동력까지도 알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이상하게도 잊히지 않는다. 

이제는 선생님을 뵙지 못한다. 너무 오래되었다. 
신문 지상에서 선생님이 쓰신 글을 읽는다. 
서점에서 선생님이 내신 책을 읽는다. 
이제 선생님의 비극은 어느 정도 끝나가는 것 같다. 

선생님은 승자다. 
그리고 여전히 수많은 비극의 연출자들을 위로하고 계신다. 

그의 비극이 나의 비극을 눈 뜨게 했다. 나의 비극이 그의 비극을 눈 뜨게 했다. 
우리의 비극은 서로 연대한다. 이 비극의 상영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만으로 이미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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