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여 말을 걸어 주십시오. 다시 한 번 이 순간의 보라에 응답하리이다
사랑하는 당신이여
당신의 그리움은 다시 안녕하신가요
보라색 날들이 다시 말을
걸어올지라도
그렇게 멀리 뛰어가지 말고 한번쯤은
뒤돌아서서
애태움과 기다림의 간절함을
꽃의 순수함으로 다시 말을 걸어주십시오
정세일 <보라색 날들이 다시 말을> (시의 시작 부분 인용)
"색채 때문에"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고흐의 작품이 그러할 것이고, 르동과 마티스의 작품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색, 끝없는 보라색의 풍경으로 나를 사로잡은 작품이 있다.
펠릭스 에두아르 발로통의 작품이다.
참 신기하다. 보라색만이 줄 수 있는 묘한 신비가 있다.
빨강이 주는 열렬함과, 파랑이 주는 높음과, 노랑이 주는 부드러움,
그것과는 너무나 다른 차원의, 보라만이 내뿜는 안개 같은 신비가 있다.
보라색은 안개처럼 내려앉는다. 그러면서 공간을 약간 뿌연 무언가로 채워버린다.
그 공간의 빛을 볼 수 있고 자유자재로 내뿜을 수 있었던 사람이 발로통이었다고 생각한다.
스위스 출신의 펠릭스 에두아르 발로통 Felix Edouard Vellotton (1865-1925)은 1882년 열일곱 살에 파리에 오면서 미술가로서의 공부를 시작했다.
고전적인 작품들에 몰두하던 그는 어느 날 판화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스물여섯 살경 목판화를 시작하고 얼마 뒤 에칭 분야에도 도전한다. 이렇게 판화를 연구하고 발전시킨 중요한 인물이 발로통이었다.
이후 그는 앙데팡당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기존 미술계에 등을 돌리고, 이후에는 나비파와도 연결되게 된다. 나비(Nabi)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의미하는 것처럼, 종교적인 주제와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주제를 주로 하였으나, 나중에는 일상까지도 주제로 포괄하여 다루었다.
발로통은 존경하던 고갱의 색채 개념에 영향을 받아 윤곽선을 강조하였으며, 표현을 단순하게 하고, 상징적 색채를 사용하여 작품 속 대상들을 살아 숨 쉬게 하였다.
발로통은 이제 후기 인상파와 상징주의와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고, 유화 작품에 치중하면서 장식적이고 평면적인 표현을 시도하게 되었다.
호기심이 충만하고 자기 연구에 성실한 발로통 덕분에 우리는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을 통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작품 성향을 관찰해볼 수 있다.
발로통은 비교적 일찍 작가 생활을 시작했고, 다작을 해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발로통이 미술사에서 가장 발전시켰던 것은 목판화였을지도 모르나
내가 미술사가라면 단언컨대, 보랏빛 풍경화를 남긴 작가로 발로통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는 특이하게도 보랏빛이 고인 풍경화를 꽤 많이 남겼다.
나에게 고흐가 노랑의 빛이라면, 발로통은 보라의 그리움이다.
보라색의 날들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 그 보라색에 응답할 줄 알았던 사람.
그럴 수 있는 사람만이 보라색의 순간을 붙잡을 수 있다.
순간에 응답하는 삶, 그 응답들이 모여서 누군가의 인생을 물들이는 것 같다.
나 대신 보라색에 고여주었던 삶이 있어서 이제 내 인생이 이 그림에 응답한다.
사랑하는 당신이여. 이제 다시 말을 걸어주십시오.
다시 한번 이 순간의 보라에 응답하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