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을 깨는 일은 두렵지만 새로움이 깃든다.
수요일 저녁이었나.
여느때처럼 침대에 누워 음악을 듣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뻐렁쳐 올라오는 마으믜 소리.
- 나는 이사를 해야해.
평소에 논리논리 거리지만, 이럴땐 무논리의 끝이어라. 그러나 그 직관이 던지는 방향이 그간 틀렸던 적이 없었다. 나의 회백질 빅데이터가 말해주는 것이야. 나는 그 소리를 이번에도 믿어보기로.
- 낼 비 안오면 나가보아야지.
그렇게 목요일. 맑음.
소중한 연차와 함께 나는 성수동으로 몸을 싣었다.
-
성수동을 고른 것은 5월의 리프레시 휴가의 결론이었다. 나는 5월에 리프레시 휴가를 사용하면서, 대략 보름간 살고 싶은 동네에 에어비앤비를 두고 동네를 미적미적 걸어다녔다.
그때 나의 물망에 오른 동네는 세 곳. 1) 망원동, 2) 서촌, 3) 성수동.
회사의 재택근무가 제도화 되었겠다. 나를 회사 앞의 지루한 동네에 더이상 방치할 사유가 없어졌고. 내가 살고 싶은 동네로의 이사. 싱글이고 보증금도 있고 출퇴근도 해결된 지금.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
최초에는 회사와의 교통을 생각하여 한남동도 후보에 있었으나, 예산이 닿는 곳은 치안이 우려되어 제외했고. 대신에 망원동이 추가되었다.
동네에 대한 감상은.
1) 망원동
20대 초반에 살았던 동네의 주변이다. 내게는 사실 서울에서의 고향같은 동네인 서교동과 맥을 닿고 있는 곳. 골목골목에 서린 빈티지하고도 유니크한 가게마다의 맛이 여전하다. 예전보다 더 빽빽해진 작은 점포들. 고맙게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커피집과 책방, 맥주집을 순례하며 ‘추억팔이’ 했다. 마지막 날. 여긴 구남친이야. 추억팔이. 그만큼의. 내겐 이미 소진되어버린 온도였다. 그저 애틋하고 고맙지만, 나의 미래를 던지기에는 미지근했다.
2) 서촌
미술관을 뺀질나게 드나들던 시절. 여기 주변에서 살고싶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원서동의 디자인연구소에서 일하고, 나는 봉천동의 대학원생이었던 시절. 그러니까 20대 후반이었나보다. 우리는 없는 주머니 털어서 ‘안주마을’에서 제철 안주 털어먹고, ‘MK2’ 가서 염세적인 주절주절 늘어놓기가 취미였는데. 나직나직한 건물과 은빛 바위로 물든 인왕산 자락을 바라보며 서울에 살면 역시 사대문안 아니겠냐고 소주 자아로 쩌렁거렸더랬다. 그런데 여기도 역시나. 심심했다. 이번에도 참. 미지근해.
3) 성수동
연무장길에서 5일 정도를 보냈다. 첫 날은 동네가 낯설어 멀리도 못갔다. 고 짧은 거리를 홀로 낯가림 하면서 걸었고. 알고 있는 커피집이나 가고 베이글 사먹고 그렇게 보냈다. 마천루와 빨간벽돌이 이렇다할 경계도 없이 마구 섞인 스카이라인. 40년은 족히 된 주택에 가득 주차되어 있는 전동 킥보드. 헤드셋을 끼고 실버 악세서리를 구석구석 아로찬 젊은 인원들.
그 속에서 나는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코란처럼 끼고서 작은 맥주집을 찾아다니며 읽었다. 감튀에 그 집의 시그니처 맥주, 그리고 책. 헤드셋으로는 자이로의 2020년 음반을 반복재생했다.
그렇게 아침에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플립플랍 짤짤거리며 2불짜리 콘파냐를 두번에 쪼개어 마시고. 낮에는 창이 큰 가게에 앉아 햄이 낀 빵을 씹었다.
그렇게 사흘. 그 동네와 낯가림이 끝나고 더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영업시간이 안맞아 못가 본 소품 가게나. 간판만 보고 저장해둔 알 수 없는 업종의 점포. 그리고 새벽 요가 프로그램이 있는 몇 곳의 하타 센터들. 도보로 지근거리에 있는 서울숲이나 한강줄기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성수동으로의 이사를 다짐했다.
공간이 주는 힘은 거대하다. 나를 이 공간에 던져놓았을 때의 변화가 기대된다. 새로움이 깃들고 문화가 흐르는 동네에. 여즉 풋풋하고도 반짝거리는 30대 초반을 밀어넣고 싶었다.
-
2009년. 내가 처음 부동산의 유리문을 넘어본 해이다. 그 때부터 나는 서울의 부동산을 족히 서른 곳은 가보았으리라. 그리고 이후에 성남에서의 경험까지 누적되어. 내향적이고 나발이고. 노란색 부동산 시트지 앞에서 주저하기도 이젠 한두시간이면 극복하고. 빤빤하게 들어가서 안녕하세요, 집 좀 보러왔어요. 물 한잔 마셔도 되나요? 날씨가 많이 덥네요. 하는 여유도 생겼다. 이동하는 길에는 요새 거래가 좀 되나요? 하면서 부동산 근황도 업데이트하고.
13년차 부동산 손님의 경험에서 오는 바이브. 이럴 때 나 좀 어른같다. 우쭐.
덕분인지, 마음에 드는 집은 바로 알아본다. 계약도 속전속결. 집은 다른 재화와 달리, 규격화된 부분도 한정적이고 컨디션도 제각각. 디테일도 제각각인데. 그것들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또 거대해서. 그런 것들의 총합이 맘에 드는 곳을 한 번 놓치고 나면.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맘에 들고 예산에 벗어나지 않으면 고민보다go 하는 편이 좋았다. 놓쳐보아야 깨닫는 것.
-
지금의 성수동에는 애석하게도 괜찮은 월세 매물이 거의 없었다. 아니 월세 매물 자체가 없음에 가까웠다. 성수동 바닥을 샅샅이 뒤져서 지층 옥탑 제외하곤, 오피스텔 0개, 원룸투룸 2개. 최근 성수로 직장이 많아짐에 따라 공급없이 수요만 늘어난 것. 거기에 상경-로망 인파까지 더해서, 매물이 삼일을 못간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마저도 컨디션이나 위치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쩐다. 물 한병 마시고 멍 때리다가 문득.
아차 여기에 오더라도 새벽 요가는 다녀야 하니까, 내가 다닐 것 같은 요가원 주변의 부동산에 가보자. 거기도 없으면 오늘은 집에 갈 수 밖에..
그렇게 나는 요가원 드리븐 부동산 서치를 했다.
새벽 하타 프로그램이 괜찮아 보이는 곳 주변에서 맘에 드는 부동산에 들어갔고. 뭐 기적은 없는건지. 오피스텔도 원룸도 없다고. 아는 부동산에 한번 전화나 해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
- 세시에 나온 매물이 있다고? 보증금 00원에 월세 00원? 00 아파트 주변?
전화기를 쥐고 통화하면서 의향이 있는지 묻는 중개인분의 눈짓. 나는 반짝반짝 관심을 뿌리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어느 집일까. 깨끗했으면..
중개인분과 통화한 다른 중개인분이 도착했고. 그녀가 향하는 회색 대리석 건물.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무인택배함에 깔끔한 공동현관, 엘리베이터까지. 애써 미소를 감추고. 집 크기와 구조도 딱 적당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적당한 그만큼.
지어진지 3-4년. 예산도 문제없고. 딱이다.
- 계약하고 갈게요.
그렇게 나는 싸인을 열다섯개쯤 하고. 예금통장을 깨서 가계약금을 이체했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5월부터 내 마음을 괴롭히던 이사의 날짜가 잡히고. 그렇게 나는 사년간의 분당을 정리-해야만 하는 상태에 던져졌다.
나는. 느릿느릿한 분당선에서 보수동쿨러의 0308을 들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 익숙함을 깨는 일은 두렵지만, 새로움이 깃든다.
https://youtu.be/WHhbac6PVqs
이사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성수에서의 본인 phase 2
기대해주세요. 고맙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