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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누리 Dec 19. 2023

2화 비사벌 콩나물국밥 용기맛

<장기적 우상향 클럽>

  그 날도 그런 날이었다.


  내가 내게 불만이 많은 새벽과 아침의 어디쯤. 좋은 글을 쓰고싶다는 이상이 머리 꼭대기까지 들어찼는데, 나의 두 검지 끝에서 나오는 글자들은 하염없이 얇고 허접하다는 것을 마주하는 순간. 업무기기 중고판매로 염가에 업어온  북유럽 디자이너브랜드 스탠드 너머로 몇차례 바닥에 떨어져서 테이프질 해놓은 포스트잇이 넘실거린다. 포스트잇에는 짧은 글이 적혀있다.


  '반드시 부끄러울 것. 부끄러움을 직면해야 나아갈 수 있다.'



  비디오라도 찍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카메라에 대고 글 쓰는 단상이랍시고, 이런저런 징징거림을 주절거리고도 도무지 해소가 되지 않았다. (그 비디오는 나의 유투브 채널에서 유일하게 '비공개'가 부여되었다. 차마 내가 돌려볼 수가 없더라고. 처절한 나의 낯이 아무렇지 않아지는 순간이 온다면 '전체 공개'의 영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어코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정말 일을 그만두고 글에만 전념해야하는 것 아닐까. 오만한 발상 아니냐고 일을 마친 밤에만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말야.



비공개가 되어버린 괴로움_비디오.youtube


  기다란 내 얼굴이 순무같은 색깔로 물들고 머릿속의 복잡함에 해갈이 들어선 순간, 그녀가 번뜩 떠올랐다. 통번역사를 관두고 그림의 길로 들어섰잖아. 그녀는 나보다 앞선 그런 고민들을 마주했을 것이라. 사실 그동안 그림작가님과 나는 추석이다 뭐다 이런저런 일상적 사유들을 주고받다보니 만날 법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쉬이 만나지지 않았다.


  대신 인스타그램 게시물의 라이크를 주고받으면서 하루이틀 엷은 내적친밀을 쌓았다. 돌이켜보면, 꼭 그렇게 만남을 급히 잡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그녀와 연결이 될거라는 알 수 없는 믿음이 있었다 내 안에. 인연이라는 것은 참 신기해서 나의 노력과 행동에 비례하지도 반비례하지도. 형용할 수 없는 무엇들로 이어지고 놓아진다.


  기어코 카톡창을 열어 그림작가 횐님을 찾았다. 역시나 인연은 *될연될(*'될 인연은 된다'의 줄임말). 우리는 동시에 우울했고 동시에 추웠고 동시에 콩나물국밥에 동의했다.

  "그럼 일욜 저녁 6시 비사벌콩나물국밥에서 뵈어요."




성수 비사벌콩나물국밥.
비사벌콩나물국밥은 내가 성수에서 꼽는 최고맛집 다섯곳 중 하나이다. 나누리배 성수 최고맛집 다섯곳은 23년 겨울 현 시점 비사벌, 훼미리, 백리향, 행칼, 술래가 있다. 1)혼밥의 자유도, 2)느긋하게 신문읽기 편안한 테이블회전도, 3)맛의 일관성의 기준으로 선정되었다.



  나는 조금 일찍 비사벌로 나서서 베이커리에서 손바닥만한 파운드케익을 하나 샀다. 갑작스런 만남에 응해준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조금이라도 표현하고 싶어서. 그녀가 조금 천천히 와준 덕분에 나는 먼저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비사벌의 가장 안쪽 길고 까만 소파에 기대앉아 물을 한두모금 홀짝이며 카운터 너머의 유리문을 때때로 살핀다. 따뜻한 것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그녀가 문을 밀고 들어온다. 오늘은 운동이 아니라 추운 날씨로 양 볼이 붉게 물들어 있다. 분홍 볼이 참 귀여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삼킨다. 비사벌의 유일한 메뉴인 콩나물국밥 두개에 나만 모주를 먹기로 한다. 음식을 주문하고는 시선을 테이블과 가게 이곳저곳으로 떨어뜨린다. 낯가림과 어색함을 해소해보려는 본능적인 행동이다.


  "어떻게 지냈어요?"

  "사실은 제가 이주 전에 실연을 해서요. 콩나물국밥을 잘 못먹어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찌질한 사랑과 이별 서사라면 나의 전문분야가 아니겠나. 혹시 질퍽질퍽한 상태인지 여쭈었더니 작은 입이 쉴 새 없이 달싹인다. 실연한 이와 나누는 위로와 회고와 공감과 희망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주고받는다. 한때 이별의 슬픔에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을 호텔방에 숨어 하루 라떼 두잔으로 연명하고 울고 나오던 본인이었기에. 아프고 저릿하고 원망스럽고 그럼에도 보고싶은 그 마음이 자꾸만 동기화 되었다.


  그 덕분일까. 어색할 새 없이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사실 그거 하자고 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거? 아.. 식단카드요. 전 그보다.."

  "그럼 무슨 일로 연락하신거예요?"

  "괴로워서요."


  이번에는 나의 차례였다. 가장 좋은 대화는 둘의 말밥이 절반씩을 주고받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네가 늘어놓았고. 이번에는 내가 늘어놓을 차례. 출력 버튼이라도 눌린 듯 마음속에 꾹꾹 눌러온 고민의 말들이 음성으로 형태를 만들어갔다. 홀로 앓던 일과 글 병행의 어려움, 비디오를 만드는 것의 고민, 막막한 지금에 대한 소회들이 앞다투어 나의 바깥으로 나아갔다.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이 아니라 말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글은 생각을 일방적으로 늘어놓는다. 말은 듣는 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대한 반응들을 수집한다. 듣는 이의 반응에 대한 나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구체화한다. 내가 하는 말을 나도 듣고 너도 듣고 네가 들은 바를 또 내가 듣는다. 그러면서 마음의 이곳저곳에 늘어져 있던 생각들은 꿰어지기도 버려지기도 한다. 그렇게 대화는 '다음'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말을 하는 이유다.


  "카페로 갈까요?"

  나와 그림작가님은 말이 남아서 카페를 찾았다.

  "일 이야기 해볼까요."

  카페에서는 본격적으로 '그 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묵혀놓은 '그 일'을 꺼내어 각자의 상황과 생각을 나누었다. 디짐에서의 구월이 겨울이 되는 동안, 그림작가님의 문구브랜드 <talking hands>가 기록하는 손들을 돕겠다는 브랜드의 방향성을 정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덕에 식단카드와 운동카드가 꽤나 핏이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참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을까? 그림작가님 몰래 맘 속으로 도원결의 협의체를 한번 만들었던 탓인지, 혼자가 아니니까 해보자는 생각이 차올랐다.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나겠냐고. 우리는 꽤나 좋은 콤비로 보여졌다. 이 일의 목적은 수익이 아니다. 데미안의 클리셰, '알을 깨는 것'이다. 나와 그림작가님은 모두 깨고 싶은 알이 있다.


   회사일을 하면서 일하는 본인에 대해 알게된 것 하나쯤 있다면,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이더라고. 둘 다의 능력치와 상황이 어떠하건 바라보고 있는 종착지가 같다면 어떻게 해서든 나아갈 것이다. 어떤 사건들이 앞으로의 시간들에 끼어들게 될지라도, 그녀와 함께 '그 일'을 완주했을 때, 반드시 나의 손에 쉬이 가질 수 없는 귀한 무엇이 쥐어질 것이라는 감각을 나는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 첫번째 미팅로그 > 23.11.26.
@컴오프커피 성수
- 꿈으로의 과정을 기록하는 것을 돕는 ‘어떤 것’.
- 각자의 일신을 정비하고 3월부터 시작. 11월 출시를 목표로.
- 제작 과정을 기록한다. 글이나 그림, 비디오로.
- 우아 떨다가는 커피값도 못챙긴다. 처절하게..
- 그렇지만 진실된 메시지로 부끄럽지 않은 것 만들기.



  "둘 다 부적을 가지고 다니네요."

  '그 일'의 큰 틀을 나누고나니 비로소 둘 다의 핸드폰 뒷판에 '최고심 부적'이 끼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친구에게 받았어요. 저를 응원해주는."

  "헉 저도요. 두 장 다. 저를 응원해주는 친구가 각각.."


  '용기가 생기는 부적'

  '꿈이 이루어지는 부적'

  '모든 일이 잘되는 부적'


  두 장의 부적은 사랑하는 바다와 유진의 선물이다. (진지한 와중에 딴 소리이지만, 이렇게 글로 적고 보니 S.E.S. 멤버 두명의 이름이구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둘은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다.) 꿈에 대한 믿음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주입하기 위해서 핸드폰 뒷판에 끼워두었다. 진심어린 응원의 마음이 단 하나만 있어도, 사람은 훨씬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 내더라고.



최고심 부적은 장당 500원이다. 도합 1500원. 심적 효용은 1500억 이상이다.



  "고마워요. 또 뵈어요."

  우리는 각자의 장난감 부적을 소중히 가담으며 자리를 일어섰다. 재치 넘치는 '최고심 부적' 너머로 알 수 없는 투지가 컴오프커피를 감돌았다. 더이상의 퇴로는 없다. 두 사람은 꿈을 좇아 생의 저점으로 투신하겠다는 다짐을 소리없이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그 날을 '비사벌콩나물국밥 용기맛'으로 기록했다.




콩나물국밥. 짱맛있음..



오늘도 진짜 춥네요.

그래도 눈이 내려서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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