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적 우상향 클럽>
끝과 끝은 닿아있다.
농담과 진지함. 가벼움과 무거움.
꿈과 현실. 환희와 절-망.
대비라고 여겨온 그것들은 늘 맞닿아있었다.
인생은 불공평해 라고 주절거리면서도 결국 이 세계는 지독하게 공평한 것 같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 것은 나빠보이는 것과 좋아보이는 것들의 이면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었던 그날부터였다.
다다익선과 과유불급 어느쪽이 지혜일까.
지식이나 부와 같이. 인류보편 다다익선 같은 것들을 많이 쥘 수 있다면? 신포도를 차치하고 바라보아도, 너무 많아지는 것에는 그것에 동행하는 책임과 위태가 따른다. 이거참- 곤란한 지점은. 반면에 또 적게 쥐면 결핍과 갈망이 샘솟아 과유불급의 트리거가 된다. 아니 그렇다면 아무렴 적당히를 찾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놈 적당히의 수준이란 것은 예민하기 짝이없어서 양과 농도가 매일같이(진짜 정말 매일매일 심지어 시시각각 비트코인 호가창마냥) 다르다. 결국 적당한 영점은 “찰나.”로 지나갈 뿐, 대부분은 부족하거나 넘치는 그런 상태로 생을 운영해야 한다 사람은.
글이나 그림,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감수성이 풍부한'으로 분류되고, '감정기복이 심한'으로 회자(a.k.a.뒷담)된다. 의도치 않게, 예술을 원체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각-청각-촉각 그런 것들을 마주하는 눈금자가 잘게 쪼개진 상태로 세상에 던져진다.
- 감수성이 풍부하다.
생활기록부에서 항상 본인을 따라다니는 말이었다. 내가 바깥에서 눈물을 끊게 된(구라다. 나는 최근에도 길에서 울었다. 길빵 길맥 말고, 길눈물. 못끊었다.) 이십대 초반이 되기 전까지 나의 별명은 울보나 수도꼭지 그런 것들이었다. 어린 본인이 대면하는 세상은 낯설고 무섭고 아픈 것들 투성이였고, 그것들은 끊임없이 내게 생채기를 만들어 엷고 두꺼운 굳은살을 마음의 피부 구석구석에 길러냈다. 생채기가 생길 때마다 나는 혼자만의 답을 찾기 위해서 책으로-책으로 파고들어갔다. 대단한 결심도 의지도 아니고, 생존과 치유의 문제였던 것이다. 읽고 쓰는 것을 해야하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기백이 꼿꼿한 성인 여성이 된 지금도 순간의 감각들이 비대하게 느껴진다. 본인이 그런 사람임을 알아서 이전보다 상황을 관조하듯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더 기쁘고 더 슬프고 더 고맙고 더 미안하다.
기쁨의 언어를 잘게 쪼갠다.
호기심, 설렘, 반가움, 성취감, 충만함, 환희. 그마저 도통 부족해서 자박자박한 수사들을 단어의 앞뒤에 붙이거나, 비슷한 경험들을 덧대어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글로 그려낸다. 온점까지 한세월, 쉼표 없인 한눈에 담기가 어려운 문장을 뻗어내고야 이것이었다 만족스럽다 그런 마음이 올라온다.
텅 빈 일요일 오전이었다.
나는 주중에 그 시간을 위해 아무개로부터 알게된 절판된 빨간책을 암암리(는 아니고 알라딘으로)에 구입했다. 오래된 책 표지의 네 모서리가 모두 헤져 종이가 결결이 쪼개진다. 몇명의 손을 타고 내게 왔을까.
처칠, 간디, 링컨, 케네디. 시대를 풍미하고 위인으로 까지 올려진 역사적 인물들의 공통점은 무엇이 있을까. 비범한 리더십으로 오래도록 회자되는 업적을 쌓았다. 그 리더십은 어디에서 오는가. 책의 논지는 비범한 리더십은 정규분포 바깥의 투지와 포용력, 회복력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력은, 곧, 정신증과 맞닿아있다는 서술이다. 모두 평균치를 넘어서는 조울의 진폭을 갖고 있었다.
좌로 보면 정신증이고, 우로 보면 정신력이다.
이럴 수가 있나. 손가락질과 대대손손 대중의 추앙이 한끗발개끗발 그 사이에. 같은 기질을 두고 한끗발개끗발 만들어낸다고. 본인의 기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당과 지옥이다.
조울의 메리트는 무엇이 있을까.
우선 조울의 낙천감은 회복력으로 좌절감은 투지로 연결된다. 한가지 더. 조울의 렌즈를 낀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이, 더 현실적이라는 연구가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지나치게-현실을 바라보게 되어서 더욱 큰 비극을 감지하고, 환희는 지극히 찰나일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의 반복으로 세계를 느끼고 포용하는 폭이 지속적으로 넓어진다. 상황을 바라볼 때는 쓰리고 고통스럽겠으나 좌절의 웅덩이를 실천으로 이어낸다면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 세시에 뚝섬역 3출에서 뵈어요.
업사클링한 노트에 각자의 테마로 기록을 이어만든 초안들을 책으로 엮어낸 <초안클럽>의 행사가 있어서 횐님과 일정을 만들었다. 이제는 함께가 서서히 편안해진다. 횐님은 주말에 샐러드가게에서 파트타이머를 한다. 나는 횐님의 파트타임이 끝나기 전까지 붉은책을 탐독하고는 초연하게 같은 지하철로 몸을 싣었다.
서울역 문화역284 RTO애서 열린 일요일정은 본래는 <물건의 집>이라는 플리마켓 행사가 메인이고, 그것의 한 꼭지로 <초안클럽> 부스가 운영되었다. 지속적으로 소비를 줄이기로 다짐한 탓에. 물건의 매대 앞 주인들의 미소를 미안한 마음으로 스쳐내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초안클럽>부스로 발걸음을 이었다.
부스에는 손바닥만한 낱낱의 초안 원판들이 색색깔 명주실에 묶여 전시되어 있었다. ‘기록에 관한 선제적 기록’을 배워보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나선 둘이기 때문이었을까. 횐님과 나는 부스 앞에 꼼꼼히 발자국을 찍으며 거의 모든 초안을 시간을 들여 넘겨냈다.
수영을 배운 기록, 팀장이 된 기록, 아침마다 그림 한장씩을 그려낸 기록, 하루에 한개씩 물건을 버려본 기록. 기록과 기록. 기록의 기록. 기록기록기로기. ..
- 기록하면 뭔가 되네요.
- 그러게요.. 알아도 안되는게 참 많아요.
꾸준함이 답이라는 것은 모른 적이 거의 없었다. 예술가들의 창작하는 습관이나 주변의 자유업을 하는 사람들의 일과를 귀동냥 해보아도, 어쨌든 밥벌이까지 이어지기에는 무명의 순간을 인정하고 돌아보고 수정하고 다시하고 겸허히 반복할 뿐이다.
답은 근면과 성실이야. 희뿌연 막연을 성실함으로 딛고 의미있는 것을 굴려낼 때까지 근면을 지속할 뿐이다. 이어-계속-지속 이구나. 그것이 새벽이건 낮이건, 스타벅스건 내 책상이건, 규칙적이건 불규칙적이건. 아무렴 자기의 리듬대로 지속해내는 것 뿐이구나.
돌아오는 지하철.
나는 횐님에게 오전의 책 이야길 꺼냈다. 우리는 내리는 문 앞에 서서, 감정을 도구적으로 다루는 것에 관한 대화를 했다. 감수성이 풍부한 인간 종이 본연의 기질을 개끗발이 아닌 한끗발로 소화하려면, 고점에도 저점에도, 너무 오래 잠겨있지도 그렇다고 너무 빨리 빠져나오지도 말아야 한다. *필요한 만큼의 괴로움과 필요한 만큼의 쾌활함으로 이어가야 한다. 흘러가버리는 필요한 만큼의 순간을 포착하고, 좌절을 매도하고 창작으로 교환하고. 환희를 매도고, 또 창작으로 교환한다.
*필요한 만큼이 얼마만큼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이정도면 되었을까 하면서 던져보는 수 밖에. 과연 그것이 적당치였느냐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지나간 다음에야 사후적으로 해석해낼 뿐이다.
현실을 마주한 괴로움을 연료로 약속한 실천들을 고독으로 씹어내고, 쥐어지지 않는 미래를 쾌활함을 덧대어 명도를 조금 높혀보는 작업이다. 한쪽만을 긍정하지도, 중간만을 추앙하지도 않는. 양쪽을 모두 인정하고 유려하게 도구로 다루어내는 상태. 그곳으로의 도달이 창작자를 지속적으로 창작자이게 해줄 것이다.
<초안 클럽> 매대를 너무 오래 서 있었던 탓일까.
발목과 종아리 근육 사이로 까득까득 피곤의 상징인 젖산이 끼는 것이 감지된다. 도착역에서 서너개 쯤 남았을까.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빈 지하철 의자에 착석했다.
(다음은 마주보고 나눈 카톡 메시지다.)
- 도삭면 드시고 싶으면 알려주세요. 전 내려서 그거 먹으려고요.
- ㅋㅋㅋㅋ 드시러 가세욤. 저는 도삭면을 조아하지 않습니다. 굵은 면, 날달걀이 시러서 ㅠㅠ
- 각밥하시죠. 가끔 국밥하고
- 가끔 훼미리 가고...
- 좋아요. 좋은 저녁 보내시고요
- 맛삭면 하세요
각자의 감수성을 도구로써 글과 그림으로 표현코자. 우리는 자기만의 방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 날을 초안클럽의 구경클럽으로 기록했다.
요즘 철학을 너무 읽었나 글이 뻑뻑하네요.
저는 곧 여행을 떠납니다. 새로운 시각과 쾌활을 채워오기를 소망합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