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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누리 Jul 10. 2016

유럽 한량의 꿈

나는 러블리 할매가 되고 싶다.

스물 셋에 도합 32킬로그람의 짐을 싣고서 나는 두바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두바이를 경유한 날개 두쪽 비행기의 목적지는 스페인 남부의 마드리드 였다. 마드리드에서부터 근 한달간 스페인 방랑을 마치고서야, 나는 교환학생으로 초대받은 오스트리아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팔개월동안 슈타이어라는 동네에서 경영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내가 살던 플랫(우리나라의 원룸/빌라와 유사한 주거형태)의 앞에는 아름다운 강이 흘렀다. 그 강은 슈베르트 음악 "숭어" 중 '거울같은 강물'의 배경이 된 앤스강자락이었다. 우리집은 200년이 넘은 옛날 건물의 내부만 현대식으로 개조한 작은, 일종의, 원룸이었다. 아침이면 나무살로 열십자를 여덟번 그려놓은 얇은 유리창으로 거울강의 새벽공기와 햇살이 동시에 밀려들어왔다. 꽃을 꽂아놓은 유리병 사이로 스미는 빛그림자가 하루도 빠짐없이 아름다웠다.



집 앞의 앤스강. 오른쪽 집들 중 하나가 우리집이었다.



건물의 한편에는 앤스강이 흘렀고, 반대편에는 번화한 마을의 중심가가 자리해있었다. 우리집과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맞은편에는 슈베르트가 쉬어가던 건물이 있었다. 유럽사람들의 특성상 건물의 모양새가 고대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일층에는 최신 화장품가게가 들어와있어서, 나는 자주 슈베르트네 집에 폼클렌징이나 아이라이너를 사러 갔었다.




오른쪽의 노란 건물이 내가 머물던 집이었다. 왼쪽의 건물 중 앞에 좌판이 있는 곳이 아이라이너를 팔던 가게.



그 오래된 동네에서 내가 주로 하는 일은 마트에서 먹거리를 쇼핑하는 일, 가끔 학교에 가는 일, 수요일마다 파티에 가는 일, 주말이면 여행을 떠나는 일이었다. 말그대로 팔자 좋은 한량 생활이었다. 나는 평일이면 장을 보거나 학교에 갔고, 남는 시간이면 비행기나 기차표를 검색해서 주변나라를 구경다녔다. 즐거운 나날이었다.


느슨한 한량생활에 조미료를 더하고자 조금씩 반주를 하다보니, 내가 '맥주 맛'을 처음 깨우치게 된 곳도 그곳이었다. 맥주를 사랑하는 바바리아인답게 그곳에서는 학교의 카페테리아에서도 당연히 맥주를 팔았고, (수업중 조과제를 하면서 마시기도 했고,) 파티를 하는 날이면 냉장고 세칸을 맥주 여섯박스로 그득그득 채워놓고 음악 선곡을 준비했었다.


동네 마트에서 맥주는 0.6유로에서 1유로선(대강 1000원-1500원정도)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와인도 3유로에서부터 천차만별로 다양했기 때문에 나같이 할일없는 인간들이 주정뱅이 되기에 딱인 조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필연적으로 주정뱅이가 되었다. 삼시 세끼 맥주나 스프리제(탄산수를 섞은 와인)를 반주로 하여, 하루종일 20퍼센트쯤 알코올에 정신을 적셔 놓은 상태로 지냈다. 그렇게 그 기간을 그렇게 술에 절여서 보낸 탓인지, 그때를 추억하면 몽롱하고 환상적이다. 마치 포도주내 물씬 나는 꿈의 한 페이지 같다.


문득, 오늘밤과 같이 약간 차가운 바람이 팔덜미를 스치면, 나는 그 몽롱한 주정뱅이 시절이 생각난다. 인생의 호시절에 코가 높은 친구들과 나는 삼삼오오 무리지어 와인한병과 감자칩 한봉을 소중히 끌어안고서 불이 다 꺼진 중세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밤늦은 시간에 정말 흔한 연애 이야기나 취업 이야기를 하면서 홈파티가 열리는 친구집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나는 눈파란 친구들과 썸남썸녀 이야기나 취업 준비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속으로는 참 사람 사는게 다 똑같구나 하는 생각을 꾸준히 했었다.


그렇지만, 그 친구들과 내가 다른 점도 있었다. 음 서양대딩과 나 사이의 정말 큰 차이점은 인생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였다. 그런 고리타분한 질문에 나와 같은 동양 친구들은 인생의 지향점으로 성공을 꼽은 반면, 유럽의 또래들은 행복을 꼽았다. 성공과 행복의 관계, 이게 참 미묘한데, 우리는 성공을 하면 행복이 온다는 생각이고, 그 친구들은 행복하려면 물론 성공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해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다시말해, 동양문화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실패자의 모양새로 꼽지만, 그곳에서는 행복하다면 그러한 잣대는 의미 없는 것이었다. 성공과 행복간에는 어떠한 상관관계는 보일 수 있다하더라도, 인과관계는 옳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우람한 삼성맨이 되겠다는 흔한_대학생의_꿈을 꾸고 있던 나에게 이러한 가치관의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유럽에서 내가 가장 불편했던 것은 저녁 7시면 칼같이 문을 닫고, 주말이면 하나같이 휴업하는 가게들이었다. 토요일에 허겁지겁 먹을 것들을 사두지 않으면, 일요일에는 우유 하나 사는 것도 무척 까다로웠다. 나는 유럽 친구들에게 그 시간에 문을 여는 가게가 있으면 떼돈을 벌텐데 왜 아무도 그러지않느냐고 불평을 토로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그 시간은 가족들과 보내야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것은 행복과 성공에 관한 가치관의 차이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대화였다.


친구들과 술냄새나는 이야기를 마치고, 신나는 파티도 한참 즐긴 뒤에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한참을 생각했다. 동이 트고 세상 환한 정오가 될 때까지 노래를 듣다가 일기를 쓰다가 꽃병을 바라보다가 했다. 그러한 건조하고도 긴 시간을 보낸 내가 깨달은 바는, 꿈이라는 것은 결코 어떤 명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령, 어린시절부터 교육되어 온 디자이너, 의사와 같은 꿈은 단순한 직업의 명칭이고, 사회 일꾼의 분류어일 뿐 개인의 목표가 될 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꿈이라는 것은 무언가 구체적이고도 추상적인 형용사를 품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때 내가 고심끝에 설정한 꿈은 '바르고 행복한 사회인'이었다. 평범한 단어의 나열이라 별스러운 것이 아닌것 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을 내가 교환학생에서 얻은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로 꼽는다.


만약, 내가 지금껏 꿈을 단순하게 뭐 예를들어서 연구원이라 칭했다면, 나는 연구원 명칭을 내 명함에 인쇄하는 순간부터 허무주의에 빠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바르고 행복한'이라는 방향성을 넣은 덕분에, 꾸준히 내가 원하는 목표 인간에 도달하고자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때 빠르게 두근거리는 심박수를 들으면서 꿈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사람의 모양새여야지 어떤 직업의 단순한 명칭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철학자 한병철씨는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성과지향의 현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인간에게 필요한 상태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의지가 선택한 가치 있는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에 십분 동의한다. 사람은 아무런 긴장도 목표도 없는 상태에서보다,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 긴장감을 유지할 때 비로소 생동성을 띄우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사람의 생동성 부여에 중요한 것은 '자유의지'이다. 사회적으로 주입된 단순 직업군의 명사말고, 자기가 원하는 인간상의 모습을 자기의 언어로 우려낸 목표가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가장 싱싱하게 펄떡인다.


나는 담담히 나의 자유의지의 소리를 듣고서, 바른 생활과 행복한 감정을 위해서 노력한다. 나는 궁극적으로 그러한 노력 끝에 눈웃음 주름살을 가진 러블리 할매가 되고싶다 생각한다. 25세를 기점으로 서서히 식어버린 마음근육, 열정근육에 다시 불을 당기고자 한다면, 정신머리가 원하는 꿈을 품는 것이 좋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놓고, 세상의 어떠한 모양새말고 그 '인간새'를 갖추고자 고군분투한다면, 분명 심장은 다시 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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