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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누리 Jul 01. 2016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내가 태어난 해의 라디오를 듣는 일은 환상적이다.

봄, 삼청동에서 혜령에게 팟캐스트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추천받은 뒤로 아니벌써 반절이나 들었다. 사실, 한때 잘 듣다가 잠시 안듣고 있었는데, 비가와서그런지 오늘따라 가사를 느낄 수 없는 음악과 과장된 목소리의 경남제약 레모--나 광고듣기가 참말 좋다.



2004년의 황정민의 음성을 듣는다.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가장 유명한 작품이었던 공사년도 황정민이의 말. 저는 제가 연기를 하고 있을 때에만 배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사실. 아니죠. 그냥. 황정민이죠.


패러디 해본다. 저는 제가 오이스틱을 먹고 있을 때에만 다이어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사실. 아니죠. 그냥. 나누리죠.



정은임은 92년부터 04년까지 MBC에서 <FM 라디오 음악>을 진행한 아나운서이다. 비극적이게도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라디오가 종방되었으나, 그녀의 아버지 및 팬들이 가진 녹음본  덕분에 그 음성을 팟캐스트에서 청취 가능하다. 현재 팟캐스트에는 94년부터 04년까지의 방송이 드문드문 올라와 있다.




(거의) 내가 태어난 해의 라디오를 듣는 일은 환상적이다. 내가 살았지만 알지 못하는 세상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그때의 세상은 대체로 부모님 또는 고모들로부터 주입된 것들이 전부이다. 머, 누리가 젖을 안먹을라고 해서 분유 멕이느라 느그 엄마가 고생많이 했다던지, 누리는 고집이 억시 쎄서 아빠한테 밤새도록 콩콩 혼났다던지 대충 그런 것들. 당사자인 나는 단 한 끼니의 분유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 뭘 먹기는 했었는지 모르겠다.



이틀만에 퇴근하고 단칸방에 틀어앉아 겨우 라디오 하나 틀어 놓았는데, 그 시절의 스물여섯이 된 기분에 흠뻑. 방가방가. 나는 X세대 나누리. 구로로 가는 출근 길에 마몽드 팩트를 찍어바르고, 취미는 피씨통신 채팅이다. 대화명은 꽃사슴이고, 당장의 꿈은 대우자동차에 다니는 그 남자와 결혼하는 것. 결혼이 늦은 것을 매일 밤 걱정한다.




계속 생각해보니, 내가 나이가 많았다고해도 딱히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아마도+거의+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모르는 세상이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도 그렇기 때문이다. 정수리 똑바로 들고서 살고있지마는, 알지 못하는 세상이 태반이다. 매일같이 하루가 더 늙어가는데도 도무지 나아지질 않는다. 배신감. 그랬던 것이다. 자란다는 것은, 사실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떤, 그랬떤! 것이다.


쩝. 그렇다면 이것을 '1994년의 배신'이라 하자.


불편한 것에 대해 못된 말로 낙인찍기를 하니 한결 기분이 좋다. 내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의 배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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