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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누리 Feb 10. 2016

일랑(ill_lang) 이야기 01

우리는 어쩌다 신촌의 양초 팔이가 되었나

나는 실수로 대학을 졸업했다. 겨울방학에 야심 찬 경주 여행 계획을 짜고 있었는데, 그러는 동안에 졸업 유예 신청을 깜박한 것이었다. 경주행 무궁화호를 타러 가는 새벽에 내가 대학을 졸업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2월 9일이었다.


졸업식은 2월 23일이었다. 부모님께 이 사실을 어떻게 알릴까 가 큰 과제였는데, 나는 잔머리 만렙이었기에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그것은 나는 졸업 사실에 굉장히 감격하였고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 행복한 연기를 하면서 졸업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다녀와서 온 집에 기쁘게 졸업을 공지하였고, 부모님은 그렇구나 수고했다 하시며 축하해주셨다.


졸업식날은 정말 행복했다. 동아리의 후배들이 졸업 축하 현수막을 만들어준 덕분에 장원급제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졸업자 대여섯 명과 SBS 8시 뉴스에서 학사모 던지는 장면도 촬영하였다. 또 저녁에는 오랜 작업 동기들과 좋아하는 연희의 술집에서 술도 진탕 마셨다.


졸업한 다음날에는 할 일이 없었다. 소속이 없다는 것은 8세에 초등학교를 입학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스물다섯이었고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내일 할 일도 없었다. 심지어 나는 취업을 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나는 나를 백수라 소개해도 한점 부끄럼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께서는 신촌에 하숙방을 구해주셨다. 방은 작고 오래되었지만, 사방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는 점이 마음에 들어서 계약을 했다. 6개월. 그리고 6개월의 하얀 시간이 주어졌다.


발단은 그 전 학기의 기말고사였다. 나는 복수전공을 한 탓에 4학년 마지막 학기에 18 학점 수강에다가, 졸업 필수과목인 한문도 들어야 했다. 수학 과학이나 미술 정도에서만 쓸만한 머리통을 가진 나에게 한문은 세상에서 배워 본 공부 중에 제일 어려웠다. 단언컨대 내 인생의 공부 중에 가장 어려웠다.


그것은 그림 3000개와 글자 3000개를 기계적으로 매칭 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림 3000개는 너무 비슷했고, 글자 3000개는 너무 달랐다. 이 세상에 그런 공부가 있다는 사실과, 내가 그것을 해야 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잘하는 인간이 졸라 많다는 사실은 트리플 충격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임파써불이즈낫띵 하면서 12칸 한자 노트를 꼬박꼬박 채워갔다. 그것이 12월까지 네 권이었다.


함께 연희동 변두리에서 한자 노트의 멘붕을 채워주던 스물다섯 살 친구들이 있었다. 따뜻하고 세련된 카페에서 나는 한자를 그렸고, 친구들은  시험공부를 하였다. 가끔 그림 그리는 친구가 오기도 했고, 그것은 두 명이기도, 세명이기도 했다.


어느 날 친구 1이 초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나는 한자만 아니면 다 좋았고, 만드는 것이라면 제일 좋았다. 당연히 앞도 뒤도 묻지 않고 호탕하게 오케이를 그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는 기말고사를 핑계로 카페에 모여서 초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봄이 되었고, 백수도 되었다. 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초를 만들기에 최적화된 인간의 상태였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 2를 하나 더 꼬아서 초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정문 앞 골목길의 가마 마루이에서 라멘을 먹으면서 일랑이라는 이름도 지었다.


그때부터 우리의 이름을 건 브랜드를 만들어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시작했다. 내 하숙방을 우리의 사무실로 만드는 것이 가장 먼저였다. 그냥 셋이서 말로만 그렇게 이야기 나눈 것인데도 그때부터 나는 하숙방에 들어올 때마다 괜스레 근엄한 표정을 하면서 우리 브랜드의 미래를 고민했다.


오 그런데 이것참. 아쉬웁게도, 우리는 머니머니해도돈이 없었다. 일단 각자 20만 원씩을 각출하였는데도, 아무것도 없는 것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숙방에서 금전 고민을 조금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나와서 학교엘 가니, 아카라카가 한창이었다. 축제 한복판에서 우리는 계획이라도 한 듯 똑같은 생각으로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장 각자의 집으로 가서 빵을 구웠다. 그것이 당케오케맥 이었다.



다음날, 빵 굽기와 잠을 교환하고서, 축제라면 피곤함에 고개를 짤짤 거리던 할머니 학번 세명이 대운동장 한쪽에서 당근케이크, 오레오 브라우니, 더치 맥주를 팔았다. 이것을 팔아서 밑천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포스터도 만들고 가판도 열심히 꾸며서 호객행위도 했다. 지인 강매 절반 판매  절반으로 당케오케맥은 중박을 치고서 일일천하의 셔터를 내렸다.



밑천이 마련되자 그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매주 한두 번씩 사무실(은 내 하숙방)에 모여서 콘셉트 회의를 했다. 그리고 오랜 친구에게 초 만드는 재료도 양도받고, 을지로에서 나머지 재료도 채워왔다. 어떤 날은 샘플 프로토타입을 만들었고 어떤 날은 브랜드 콘셉트를 고민했다. 밥을 주는 이 없었고, 시키는 이도 없었지만, 셋은 일초도 아까워하지 않고 시간이 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하숙방 바닥에서 일랑을 만들었다.










일랑의 첫번째 에디션(이었던) 제주 바다 캔들, 제주 조개 캔들, 제주 전복 캔들.


일랑(ill_lang)의 뜻은 나른함의 환상이다. 사람들의 보통의 하루에 나른한 환상을 주는 브랜드가 되겠다는 의미이다. 일랑의 제품은 인스타그램  @ill__lang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이제는 각자의 사정으로 브랜드를 잠정 중단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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