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일 오후 3시
중고딩때 나는 쭉빵카페의 회원이었다. 쭉빵카페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포털사이트 다음 카페 중 하나로 음 한마디로 전국 여자 중고딩들의 와글와글 커뮤니티이다. 담탱이의 뒷담화에서부터 아이돌 연예인 이야기, 얼짱들의 일상이나 이성친구이야기같은 것이 주된 게시글이었다.
그곳은 일종의 거대한 쇼핑센터같았다. 자극적이고 재미로운 컨텐츠들이 넘쳐나는 게시판들이 줄줄이 있었고, 나는 가게를 구경하듯 게시판들을 들어갔다 나왔다하면서 새롭게 출시되는 게시글을 소비했다. 그곳을 구경하면서 헐대박쩐다를 외치다보면 시간이 가는줄 몰랐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시판은 생정이라는 줄임말로 불려지는 생활 정보 게시판이었다. 떡볶이를 맛있게 먹는 방법이나 화장실에서 소리 안나게 용변을 보는 법같은 시시콜콜한에 대한 정보를 주제로한 글들이 올라왔다. 나는 그곳의 정보들을 눈크게 떠서 읽고 쉬이 실천했다. 점점 머리가 커지면서 그런 정보들을 멀리하게 되었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차마 지우지 못한 쭉빵 생정이 발현된다. 그것은 우습게도 비오는 날에 라떼를 시키는 습관이다.
아마 2006년쯤 생정 게시판에서 매력적인 여자가 되는 법이라는 글을 읽었다. 내용에는 여러가지 매력적인 여자가 되는 방법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비오는 날에 라떼를 먹는 것과 같이, 어떤 날마다 똑같은 행동을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비오는 날 라떼를 먹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서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하 참 별별짓을 다하네 코웃음치면서 다음글으로 넘어갔지만, 비가 내리면 자꾸만 그게 생각이 났다.
비가 오는 오늘, 점심을 먹고 라떼를 샀다. 매력 어필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나는 그냥 라떼가 먹고싶었다고 변명을 한다. 그런데 솔직히 마음 한 켠에서는 이왕이면 뭐. 그러면 뭐. 더 좋지 뭐.하고 얄팍한 생각을 한다. 그것때문이 아니라고 쭉빵인의 아이덴티티를 부인해보지만, 나는 이미 땅바닥이 젖으면 라떼를 생각하고있다.
경험은 사람을 만든다. 나는 누구인가는 나에 대한 기억의 총체이다. 내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그러니까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나를 알게 한다. 즉, 경험은 기억을 만들고, 기억은 나를 만든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쭉빵인의 과거를 지우려 해도 그것은 어떤 모양으로든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쭉빵걸 시절이 싫어서 오늘 라떼를 먹지 않아도, 쭉빵 생정을 거부하려는 의도가 있으므로 그것도 결국은 쭉빵 경험의 연장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경험은 중요하다. 무얼 하고 무얼 보는지가 나를 구성한다. 어떤이가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과 만나는 것이라 했다. 오늘 나와 라떼를 먹은 박사 선배님은 쭉빵걸을 마주했을 것이다. 사연있는 척하는 스물다섯살 쭉빵걸이었다. 초코렛을 좋아하는 오래된 교수님의 수업시간에 교수님은 초코렛을 까드시고 나는 라떼를 홀짝인다. 좋은 것을 많이 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