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TV없이 못 사는 남자, TV가 없으면 좋겠는 여자

by 찐테크


결혼 준비를 하다보니 연애만 할 땐 생전 싸울 일도 없던, 아니 대화 주제조차 될 수 없던 것들이 대화 주제가 되면서 서로의 다름을 계속 깨닫고 있다.



분명 우리 둘은 잘 맞는 편이었다. 가치관도 비슷했고 경제관념도 비슷하고 결이 잘 맞는 사람들이라 자부했다. 하지만 막상 결혼 준비를 하다보니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어? 나랑 이렇게 다르다고?' 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가전을 구매하면서 가장 많이 다툼이 있었던건 TV였다. 그는 거대한 TV를 사고 싶어했고 나는 집에 TV가 없길 바랐다. 내 고집만 부려 TV를 사지 않는 건 너무 일방적이니 한 발 양보해 구매를 하되 집의 크기에 맞는 적당한 사이즈의 TV를 구매하자고 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TV는 무조건 거거익선이라며 77인치 TV를 사고 싶어했다.



19평 짜리 집에 77인치 TV가 웬 말이냐며 말렸지만 요즘엔 다들 집이 작아도 TV는 큰걸 산다며 (대체 누가?) 끝끝내 본인 고집대로 그 큰 TV를 샀다.



평소에 드라마, 예능 일절 안보는 사람이 왜 그렇게 TV에 목숨을 걸까 싶었는데 막상 TV를 사도 드라마나 예능을 보진 않는다. 그 큰 TV를 그냥 유튜브나 넷플릭스 재생기로 쓰고 있다. 유튜브를 봐도 큰 화면으로 보고 싶다나 뭐라나. 시청하는 영상이 대부분 부동산, 의학 정보, 제품 리뷰 같은거라 굳이 그렇게 큰 화면으로 봐야하는 이유가 있는건지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 술 더 떠 안방에도 TV를 놓고 싶다는 소리를 했다. 이유인즉슨 주말에 침대에 누워서 TV를 보고 싶은데 거실에만 있으니 불편하다는거다. 그럼 쇼파에 누워서 보라고 했더니 거실로 나가는거 자체가 귀찮다는 억지를 부린다. 기가 막혔다. 집이 뭐 한 100평은 돼서 거실 나가는게 한참 걸리면 모를까 세발자국만 걸으면 거실인데 그게 귀찮아서 TV를 하나 더 사자는게 말이야 방구야 싶었다.



본인 고집대로 거실에 큰거 하나 샀으면 됐지 내가 TV 싫어하는거 뻔히 알면서 하나 더 사자는건 너무 제멋대로인거 아니냐며 화를 냈고 그도 사고 싶은거 사지도 못하냐며 발끈해서 한참을 싸웠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우리 둘의 생각과 취향이 다른건 서로가 여태 살아온 환경 탓이었다. 남자친구는 TV가 없는 집에서 자라왔고 나는 좀 과장 보태서 365일 24시간 내내 TV가 틀어져있는 집에서 자라왔다. 우리 집은 아빠가 TV를 정말 좋아한다. 거의 모든 드라마를 섭렵하고 있고 뉴스도 시간대별로 똑같은 내용을 계속 본다. 어렸을 때 아빠가 항상 출근 전에 아침 드라마를 보고 출근하던 모습이 아직도 새록새록하다.



우리 아빠의 하루 일과는 아침에 눈을 뜨면 거실로 나와 안마의자를 하며 TV를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TV는 그냥 틀어져있을 뿐 안마의자에서 자고 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또 다시 안마의자에 누워 TV를 틀어놓고 잔다. 아무도 보지 않는 TV가 그렇게 하루종일 틀어져있다보니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밤에 잘 때까지 하루종일 시끄러워서 진절머리가 난다. 특히 나는 가족들 중 제일 먼저 자는 편이고 잘 때 소리나 빛에 예민한 편인데 항상 거실에서 아빠가 TV를 보고 있다보니 쉽게 잠에 들지 못해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제발 TV 좀 끄면 안되냐 짜증도 많이 냈지만 쉬이 고쳐지진 않는다.



반면 남자친구는 집에 아예 TV가 없었다. 어렸을 땐 유튜브나 넷플릭스 같은 것도 없었으니 당연히 유행하는 예능, 드라마 등을 볼 일이 없었고 심지어 유명한 연예인이나 아이돌도 잘 몰랐다. 그렇다보니 친구들이 드라마나 연예인 얘기를 할 때 낄 수도 없었다.




이렇게 너무나도 다른 환경이 지금 남자친구에게 TV, 그것도 아주 거대한 크기의 TV에 대한 욕망을 키워줬고 나에게는 TV가 없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을 키워줬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서로의 환경을 이해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여태까지는 맞춰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싸움과 감정소모가 동반됐다. 앞으로 수 없이 많을 서로의 다름에 대해 우린 상대방을 이해하고 맞춰가며 잘 살아갈 수 있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습기 때문에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