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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실 Aug 30. 2020

가족 팔아 돈 벌어먹는 위선자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을 출간하며






































브런치북 <글러 먹긴 했지만 말아먹진 않아서>가 에세이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으로 정식 출간되었다. 브런치에서 시작한 글이니 이곳에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계속 망설여졌다. 솔직히 글쓰기가 조금 무서워진 것도 한몫했다. 이제 "글을 쓴다"는 것은 "용기를 낸다"는 말과 같은 무게로 느껴진다. 그 무게로 며칠 동안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출간 후기를 적어본다.



글쓰기에도 부작용이 있다고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처음엔 마냥 좋았다. 가난이 내 삶을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풀어내겠다는 열의가 가득했다. 모니터 앞에 앉으면 하고픈 말들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글은 쉽게 써졌고 거침없이 채워졌다. 그러다 문득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 이야기를 쓸 때마다 항상 울었기 때문이다. 원래 글쓰기가 이렇게 아픈 건가. 치유를 위한 과정이니 아픈 게 당연한 건가. 그즈음 한창 북 토크와 글쓰기 수업을 다녔던 때라 만난 작가님께 조심스레 여쭤봤다.

"어디까지 나를 드러내야 덜 상처 받을까요?"

한 작가님은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다. 세상에 나온 글은 더 이상 작가의 몫이 아니라고 했다. 또 다른 작가님은 단계별로 한 꺼풀씩 벗겨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직감했다. 아, 나는 망했다! 이미 내 글은 편집자님 앞에서 최소 열여덟 번의 스트립쇼를 마친 상태였다. 뭣도 모르고 헐벗었다니. 겁도 없었다, 참.



첫 번째 부작용 : 아빠가 싫어서


사실 아빠가 밉다는 생각은 꽤 어려서부터 해왔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2년마다 이사를 다녔을 때, 잠결에 다리를 기어오르던 바퀴벌레와 하이파이브했을 때, 변기에 들러붙은 구더기가 싫어 소변을 꾹 참았을 때. 그때마다 '아빠가 보증만 안 섰어도 이런 집에 안 살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는 없었다. 사회통념상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말해버리면 천하의 썅년이 되는 것 같았다. 그는 돈 버는 재주가 없었을 뿐 가족에게만은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글을 쓰면 쓸수록 이상한 자신감이 붙었다. 내가 정말 아빠를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자신감. 그러다 기어코 그가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내 적금을 깼을 때, 나는 천하의 썅년이 되기로 했다.


며칠 후 가족회의가 소집됐다. 나는 아빠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은 노트 앱을 켜 30분 동안 낭독했다. 아빠의 딸로 살며 느낀 가난과, 가난해서 서러웠던 옛일들과, 그것이 나를 어떻게 구질구질하게 만들었으며, 사실 나는 착한 딸이 아니라는 것, 불만을 이야기하면 사이가 틀어질까 봐 그저 참고 살았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끈적한 낭독회가 끝나자, 잠깐의 침묵 후 아빠가 한마디 했다.

"미안하다."

어떤 변명도 핑계도 없이 담백했다. 그래서 초라했다. 그 모습이 괜스레 더 짜증 나서 큰소리쳤다. 아빠와 더는 연락 하고 싶지 않다고. 마음을 추스릴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때까지 기다려달라고. 그렇게 5개월이 흘렀다.



두 번째 부작용 : 내가 쪽팔려서


내 글의 가장 큰 무기는 솔직함이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부모를 원망하는 것, 그것에 죄책감을 갖는 것, 거짓말과 가스라이팅으로 멍든 연애 후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것, 죽음에 초연해지려 애써 노력하는 것, 널뛰는 우울을 겨우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 등이 그랬다. 한데 쓰고 나서야 알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솔직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을.


특히 X의 이야기가 그랬다. 스스로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해 꺼낸 일이었는데 오만한 판단이었다. 첫 문장을 쓰자마자 잊고 있던 사소한 기억까지 순식간에 밀려들어왔다. 감정이 흘러넘쳐 자꾸 몸 밖으로 범람했다. 울다가 욕하다가 소리치다가 끝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 나는 여전히 아프구나. 떨리는 몸을 간신히 두 팔로 안아주며 도닥였다. 괜찮아질 거야. 글을 쓰면 다 나아질 거야. 그때마다 다시 물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글을 붙잡고 있는 걸까? 그 답도 찾지 못한 채 그저 쪽팔리다는 생각만 했다. 일면식 없는 사람들은 몰라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 날이면 그냥 위약금을 내고 출판을 취소할까 싶어 핸드폰을 수십 번 만지작거렸다.



가족 팔아 돈 벌어먹는 위선자가 되어


5월. 원고가 얼추 모양새를 갖춰갔다. 그동안 나는 꾸역꾸역 글을 썼다. 다 쓰면 꼬일 대로 꼬인 내 마음이, 우리 관계가 모두 잘 풀릴 것 같다는 막연한 희망을 꿈꿨다. 마침 어버이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5개월 만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했고, 가족 이야기를 다룬 글들을 모아 전달했다. 없이 자랐어도 덕분에 사랑만은 차고 넘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며칠 후,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책을 내지 말라고 했다. 글을 본 그는 벌거벗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엄마는 밤새 울었다고 했다. 나는 가난한 가족을 팔아  벌어먹는 위선자가 되어 있었다. 황당했다. 쪽팔린 건 나여야지 당신일 수는 없었다. 왜 당신이 부끄러워하는지 통 이해할 수 없었다. 가난을 통과해  과정을 이야기하는  과연 부끄러운 일인 걸까. 그렇다면 그건 누구의 몫이어야 할까. (※ 아빠와 화해하기까지의 과정은 책 속  「에필로그_서툴러서 그래요」를 참고해 주세요.)


6월. 프롤로그, 에필로그까지 더해 32개의 글이 완성되었다. 편집자님은 제목을 정하기 위해 본문에서 몇 가지 키워드들을 추출했다. 가족, 가난, 그리움, 슬픔, 미움……. 순간 흠칫했다. 내 글에 가족과 가난이 그렇게 많이 녹아있나? 해당되는 글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봤다. 22개였다. 68.75%. 그제야 실감했다. 나는 정말 가난한 가족을 파는 장사꾼 인지도 몰라.



내려놓은 만큼 채워진 것들


8월. 책이 나왔다. 책을 수령한 다음날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아빠는 표지를 보자마자 '나무집'을 알아보곤 반가워했다. 엄마는 제목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뭐가 그리 마음에 드냐고 물으니 "슬프지 않게 슬픔을 말하는 법이면, 엄청 슬펐다는 거잖아."라고 했다. 그로부터 4일 뒤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너는 정말 다 내려놓았구나."

그는 세 번이나 완독 하며 곱씹어 봤다고 했다. 처음엔 자기 이야기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미리 보긴 했지만 그래도 무능한 부모로서의 부끄러움은 여전했다고 했다. 두 번째부터는 자식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했단다. 아빠가 모르던 이야기가 많아 깜짝 놀랐다고 했다. 세 번째부터는 그냥, 다,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왜 책을 내려 하는 걸까 의아했는데 너는 책을 쓸 수밖에 없었겠구나 싶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부모님께만은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던 책 속 단어들이 스쳤다. 썅년, 죄책감, 섹스, 가스라이팅, 씨발, 안전 이별, 우울 따위의 것들. 나는 생각보다 여렸고, 과거를 마주할 만큼 단단하지 않았으며, 괜찮지 않은 일을 괜찮다고 말할 만큼 세련되지도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을 품는 아빠가 고마워서 나는 또 울먹이고야 말았다. 4일 전만 해도 자신의 삶이 부끄러워 주변에 딸의 출간 소식을 알리지 못하겠다던 그였다. 하지만 아빠도 용기를 내보겠다고 했다. 지인들에게 선물할 책을 구입하고 싶다고 했다. '가난한 부끄러움'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몫이 아니었다.



나를 위로했던 글이 당신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그렇게 <슬프지 않게 슬픔을 이야기하는 법>이 나왔다. 제목, 디자인, 면지 컬러, 본문 종이까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 취향이 담뿍 담겼다. 조용히 표지를 바라봤다. '마실 지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왜 '씀'이 아니라 '지음'일까. 고민 끝에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글은 혼자 쓰지만 책은 함께 짓는 거니까.


사실, 나는 새로운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큰 터라 누군가와의 협업이 가당키나 할까 싶었다. 더욱이 에세이는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글 아니던가. 그래서 편집자님께 발가벗은 원고를 보낼 때면 발을 동동거리며 속으로 외쳤다. '쪽팔려! 쪽팔려! 쪽팔려 죽겠다고!' 하지만 동동거린 망설임이 무색할 정도로 그는 좋은 편집자였다. 어떤 글을 써야할지 몰라 헤맬 때 분명한 방향을 안내해주었다. 어디까지 솔직해야 덜 상처 받을지 골몰하는 속내와, 내 고통에는 어떤 표정이 있냐는 요상한 질문에도 최선을 다해 답해주었다. 다시 한번 김남혁 편집자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덕분에 내 글은, 내 삶은, 충분히 존중받았다.


책이 나온 후에야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았다. 나는 그저, 이해받고 싶었다. 그럴 수 있다고, 네 삶이 틀린 건 아니라고, 잘 헤쳐나가고 있다고,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그리웠나 보다. 이로써 나의 사리사욕은 다 채웠다. 이제 남은 건 '가난을 어떻게 잘 팔 것인가'일 테다. 아빠는 어차피 팔린 가난, 이왕이면 잘 팔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구구절절 말이 길었지만 "많이 읽어주시고 사주세요♥"가 핵심이다. 부디 나를 위로했던 이 글이 당신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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