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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개 연필 Oct 03. 2021

할머니의 간장게장

  주말에 친정엄마로부터 연락이 왔다. 간장게장을 담글 것이니 가져다 먹으란다. 연락을 받고 다섯 살 난 딸아이와 설레는 마음으로 친정에 들렀다. 아이스박스를 열어보니 박하지가 가득 들어있다. 차가운 얼음찜질에 기절한 듯 조용하다. 박하지를 대야에 쏟자 죽음을 앞두고 있음을 눈치챈 것인지 아니면, 그제야 몸이 풀린 것인지 조용했던 게들이 앙상한 다리를 흔들고 기어 다니며 서로 뒤엉켜 발라당 뒤집힌다. 그 모습이 딸아이는 우스운가 보다. 까르르 웃으며 "엄마, 꽃게야, 꽃게. 옆으로 옆으로." 하고 게걸음 흉내를 낸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신나게 춤까지 추는 딸아이의 얼굴에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보인다.

  돌게라고도 부르는 박하지는 어릴 적, 우리 집에서 자주 먹던 음식이었다. 박하지는 꽃게보다 크기는 작지만 결코, 맛은 꽃게에 뒤지지 않았다. 지금은 차로 20분 정도면 수산 시장에 갈 수 있지만, 어린 시절에는 시장 한 번 가려면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40분을 걷고, 버스를 타고 또 40분을 가야 했기 때문에 박하지를 먹기까지 보통 수고로운 것이 아니었다.

  어릴 적, 시장은 시골 소녀에게 재미난 구경거리 중 하나였다. 7일장이 열리는 날에 맞춰 시장에 가면 볼거리가 더 풍성했다. 비릿한 바다 내음에, 오가는 사람을 붙잡고 흥정하는 장돌뱅이, 이름 모를 희한하게 생긴 생선이 즐비한 시장은 시골소녀에게 또 다른 세상이었다. 할머니와 함께 시장에 가면 늘 코스는 정해져 있었다. 먼저, 상회에 가서 콩이나 깨 등을 팔았다. 곡물을 판 돈으로 내 옷이며 운동화를 사고, 단골 찐빵집에서 팥이 잔뜩 들어있는 찐빵을 사 먹었다. 배를 두둑이 채운 다음 두부, 콩나물 등 반찬거리와 박하지를 사서 바리바리 보자기에 싸서 머리에 이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참, 할머니는 중간에 손녀딸을 위해 뻥튀기집을 들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은 항상 조마조마했다. 어디선가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나서 이리저리 살펴보면, 버스 바닥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할머니의 보따리가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봉지 안에 있던 박하지들도 버스 풍경이 궁금했는지 비닐봉지를 뾰족한 발로 뽕뽕 뚫는 바람에 얼음물이 새고 있었다. 비린내는 금방 버스 전체로 퍼졌고, 물건을 그렇게 싸서 가지고 다니면 어떡하냐는 버스 기사의 타박을 듣기 일쑤였다. 기사는 내리는 문 옆에 세워놓았던 더러운 대걸레로 할머니 발 밑에 있는 보자기 주위를 대충 문질렀다. 소녀는 버스 기사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면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양손에 든 검은 봉지를 덜렁덜렁 흔들며 걸었다. 왼손에는 곡물을 팔아 산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운동화나 옷, 오른손에는 뻥 뛰기 한 봉지를 들고 있었다. 소녀는 양손에서 느껴지는 풍족 감에 깨금발로 걷기도 하고, 뒤로 걷기도 하면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오두방정을 떨었다. 할머니 얼굴은 땀범벅이었다. 할머니는 나무 그늘에서 쉬었다 가자며 머리에 인 보따리를 내려놓고 땀을 식히곤 했다.

  "할머니는 어떻게 할아버지랑 결혼했어요?"

  "어떻게 하긴, 중매로 했지. 옛날엔 다 중매로 시집 장가갔지."

  쥐방울 만한 소녀는 심심하던 차에 스무고개라도 하듯이 끊임없이 질문을 했고, 할머니는 궁금한 것도 많은 손녀의 질문에 바싹 마른 입을 다셔가며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1923년, 한약방집 둘째 손녀가 태어났다. 한약방집 손녀딸은 머슴이 10명은 되는 집에서 쌀밥을 먹으며 배고픔이란 것을 모르고 자랐다. 하지만 친정 엄마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계모가 집에 들어왔고, 그때부터 소녀의 비탈길 인생이 시작되었다. 계모는 16살이 된 전처의 딸을 가난한 집으로 시집보냈고, 어린 새댁은 시집오자마자 일제강점기의 직격탄을 고스란히 맞게 된다. 1930년대 많은 조선인들이 그랬듯 새신랑은 광부 모집 소식을 듣고, 일본 가서 돈을 벌어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집을 떠났던 것이다. 그때 새신랑의 나이는 18살이었다. 금방 돌아온다던 새신랑은 몇 년이 지나도 소식도 없었다. 어린 새댁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집 근처 나루터에서 자주 눈물을 훔쳤고, 때로는 늦은 밤까지 바느질을 하다가 소쩍새 우는 소리에 서러워져 옷고름으로 눈물만 찍어댔다. 새댁은 처녀들을 잡아간다는 흉흉한 소문들이며, 구둣발로 대문을 박차고 들이닥쳐 쇠붙이란 쇠붙이는 다 긁어가던 일본 순사들을 마주할 때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빨리 새날이 오기를 기도했다.

  새댁이 꿈꾸던, 오지 않을 것 같던 새날이 현실이 된 이후, 어엿한 26살 여인 앞에 한 사내가 마주 섰다. 돈을 벌어 온다며 떠났던 소년은 떠난 지 10년 만에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사내는 그리워하던 고향집에 돌아왔지만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고 술에만 의지했다. 맨 정신으로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일본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고 싶었으리라. 남편 없이 시부모를 모시고 눈물의 세월을 보낸 할머니는 남편과 재회하고 1년 후, 27살에 첫아이를 낳았다. 그렇게 할머니는 결혼한 지 11년 만에 첫아이를 낳고, 아래로 여섯을 더 낳았지만 열병으로 갓난쟁이 둘을 가슴에 묻어야 했으며, 여전히 지긋지긋한 가난과 싸워야 했다.

  할머니는 수수죽도 배불리 못 먹는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랫말에 있는 바다로 나갔다. 바다는 굴이며, 능쟁이, 바지락 등 해산물을 내어주며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특히, 해산물 중에서도 식구들은 박하지를 제일 좋아했다. 박하지장이 떨어질 때쯤이면, 할아버지는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고 바다로 나갔고, 박하지를 잔뜩 잡아 할머니에게 건넸다. 투박하게 생긴 박하지에는 박하지만큼 투박하지만, 가족을 생각하는 남편이자 아빠의 사랑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1981년 이후로 할머니는 친정엄마 품과 같던 바다에 나갈 수 없었다. 우리 지역에 간척지 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마을에 있던 바다가 논과 밭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남편을 기다리는 새댁의 눈물을 닦아 주었던 나루터도, 식구들의 배를 곯지 않게 화수분 같이 먹을 것을 내어주던 바다도 더 이상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은 길 옆의 절벽이나 바위에 간간이 붙어 있는 굴 껍데기가 옛날에 이곳이 바다였음을 말해줄 뿐이다. 할머니는 바다가 사라진 후, 바다 대신 시장에서 박하지를 사다 나르며 헛헛한 마음을 채우셨다.

  친정 엄마는 냄비에 1대 1로 섞은 물과 간장, 그리고 각종 야채를 넣은 후, 냄비를 불에 올려놓는다. 그 사이 박하지를 칫솔로 박박 닦아 시원한 냉수 마사지를 시킨 후, 한약 달이 듯 정성스레 달인 간장은 야채를 건진 다음 식힌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별로 해주지 않던 엄마가 게장을 담그는 모습은 조금 낯설다. 사실, 엄마는 간장 게장보다 빨갛고 매콤하게 무친 양념 게장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엄마는 장아찌 종류를 싫어했다. 어릴 적 지겹게 먹어서 싫다고 했다. 그런 엄마가 웬일로 간장게장을 담그는 걸까. 엄마는 박하지를 통에 담으며 할머니는 게가 민물에 닿으면 곯는다며 씻지도 못하게 하고, 소금까지 뿌려 절인 후에 간장에 담갔다며 할머니의 게장 레시피를 이야기한다. 엄마는 소금을 뿌리지 않았다. 식힌 간장 폭포가 쏟아졌다. 게들은 기어 나오려고 난리 치며 마지막 발악을 한다. 힘이 정말 세다. 안도현의 '스며드는 것'에 등장하는 게들처럼 울컥울컥 죽음을 받아들였는지, 잔물결이 일던 간장 수면이 곧 잠잠해졌다.

  할머니는 시장에서 박하지를 사 오자마자 게 위에 소금을 뿌렸다. 짜다는 며느리의 말에 곯으면 못 먹는다며 소금에 박하지를 절였다. 할머니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나 썼던 방식을 고수했다. 그래서 할머니의 박하지장은 할머니 인생만큼이나 짭조름했다. 할머니가 간장을 끓일 때 넣는 재료들은 다시마, 대파, 양파, 마늘 등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것들이었다. 간장 달일 때 나는 짠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할머니는 '휴' 한숨을 내쉬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간장 거품을 연신 걷어내고 야채들을 건졌으며 달인 간장을 반나절 식혔다가 '끙'하고 박하지 위에 간장을 부으면 고된 작업이 끝났다.

  게장을 담근 후 이튿날, 할머니는 간장을 다시 따라서 끓여 부어주었고, 삼일째 되는 날이면 게장이 밥상에 올라왔다. 부엌에서 탕탕거리는 소리가 나면 으레 밥상에 게장이 올라오겠거니 생각했다. 게의 단단한 집게발은 칼등으로 부숴주어야 쉽게 먹을 수 있다. 흠집이 덜 난 집게발을 씹어 먹다가는 생니를 잃을 수도 있다. 할머니의 게장을 좋아하던 어린 손녀는 단단한 집게발을 호기롭게 입에 넣었다가 으지직 소리와 함께 하얀 어금니를 뱉어냈다. 지금 내 입에는 할머니의 게장을 나만큼 좋아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 노란 어금니가 훈장처럼 빛나고 있다.

  밥상에 게장이 올라오면 철없는 손녀는 게 부위 중 가장 맛있는 게딱지에 눈독을 들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게딱지를 아빠 공깃밥에 올려주었다. 그렇다고 덥석 받을 아빠가 아니었다. 목적지 잃은 게딱지는 할머니와 아빠, 엄마 사이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다 결국 종착지는 내 공깃밥이 되곤 했다. 밉살맞은 소녀는 게딱지에 밥을 야무지게 싹싹 비벼 맛나게 먹었고, 할머니는 늘 물에 만 밥 한 술에 짠 간장 국물만 떠 드셨다. 할머니는 아들이 올려주는 게 다리 한쪽, 그게 뭐라고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붙잡고 간장 맛이 없어질 때까지 게 껍데기만 빨아 드셨다.

  친정 엄마는 할머니가 없었으면 우리 5남매를 키우지 못했을 거란다. 어릴 적, 부모님은 새벽 4시 반이면 나가서 밤 9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와서 저녁을 한 술 떴다. 그래서 나와 동생들은 부모님보다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았고, 아침밥이며 도시락, 빨래, 청소 등 할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은 살림이 없었다. 할머니는 아빠가 입맛이 없다고 하면 박하지를 사러 가야겠다고 했다. 아빠는 할머니의 박하지장이 보약이라고 했다. 짭조름한 할머니표 게장만 있으면 식구들은 밥을 두 그릇 씩 먹었다. 할머니의 게장은 입 짧아 부모 속을 태우는 서울 사는 손녀도, 먼 길 달려 고향에 온 아들 딸도 체면 차리지 않고 손에 쥐고 쪽쪽 거리게 만드는 별미였다.

  병원과는 거리가 멀었던 할머니는 몇 년 전부터, 잦은 체기로 죽을 드시는 날이 잦아지면서 병원 문턱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게장을 더 이상 담글 수 없을 정도로 할머니의 기력이 나빠지자, 우리 집 식탁에는 할머니의 게장 대신 엄마표 게장이 할머니 생신과 명절에나 올라왔다.

  할머니는 늘 첫 손녀가 시집가는 모습이나 보고 죽을 수 있을지 걱정하셨다. 몇 년 전, 산후조리원에서 첫 증손녀를 보시고 아이같이 좋아하시던 할머니의 미소가 떠오른다. 증손녀를 보시며 꼭 지 엄마 어릴 적 모습이랑 똑같다며, 안 보면 증손녀가 눈에 아른거린다 하시던 할머니. 백옥같이 하얀 피부, 그리고 세월을 말해주듯 피부보다 더 고운 백발 머리. 보청기를 껴도 잘 들리지 않는다 하시며 손자, 손녀들이 말동무가 되어드리려 해도 그저 들리는 척 끄덕이며 웃기만 하셨던 할머니는 이제 여기에 안 계신다.

  병원에 가자고 할 때마다 안 간다고 거부하시던 할머니는 올 초, 병원에 가자는 며느리의 말에 가서 의사를 좀 만나봐야겠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셨지만 방바닥에 풀썩 주저앉으셨다. 할머니는 그 길로 병원 침대에 산소호흡기를 끼고 누우셨고, 가족들은 수명이 다 되어 어쩔 수 없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사의 소견을 들어야 했다. 할머니는 누워서도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안부를 다 물으며 집에 가고 싶다고 노래하셨다. 정신은 저리도 맑은데 육신은 내리막길로 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여 가족들은 눈물만 쏟았다.

  입원 한 지 2주 후, 올 설을 앞두고 98세 할머니는 16살 꽃 같던 새댁이 타국에 가 있는 남편을 애태우며 기다렸듯이, 40여 년 동안 할머니를 기다렸을 할아버지 옆자리에 새 옷을 곱게 차려입고 나란히 누우셨다. 차디찬 시절을 이겨내고 산 부부의 합장을 하늘도 흐뭇하게 여겼는지, 발인을 시작하자 아침부터 내리던 눈발도 그치고 날이 화창하게 개었다. 자손들이 할머니 가시는 길에 꽃을 뿌려드리고 선산에서 내려와 집안에 둘러앉자, 보슬보슬 비가 내렸다. 누군가 할머니는 복이 많으신 분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떼가 참 잘 살겠다고 말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을 지나 어느덧 인내의 여름이 자연스럽게 왔듯이, 우리는 어느새 할머니가 없는 일상에서 할머니를 자연스럽게 잊고, 때때로 떠올리며 살아가고 있다. 장례를 치른 이후 허전하다며 한동안 잠을 설치던 친정 엄마, 할머니와 함께 만들던 게장을 담그며 허전한 마음을 채우는 걸까.

  할머니께서 생전에 큰 손녀는 왜 자주 오지 않느냐며 손녀와 증손녀를 자주 보고 싶어 했다는 엄마의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내 딸아이가 혹여나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자주 가지 않았던 행동들과 죽음의 문턱에서도 증손녀의 이름을 부르시며 어린이집은 잘 다니는지, 손녀사위는 건강한지 걱정까지 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아른거렸다.

  거의 한 세기를 사신 할머니께 저승에서 누군가 당신의 인생은 어땠느냐고 물으면 뭐라 답하실까. 때로는 차가운 역사의 칼바람 때문에, 때로는 가난의 크기만큼 쪼그라드는 가슴 때문에 쓰고 짜기도 했지만, 그래도 가족이 있어 내 인생은 달았다고 말씀하시며 환한 햇살 아래 미소 지으시지 않으실까.

  친정 엄마가 싸 준 박하지장을 꺼냈다. 등딱지를 떼어내고 몸통을 네 토막으로 서걱서걱 잘랐다. 집게발도 먹기 좋게 칼등으로 탕탕 부쉈다. 잘 익은 홍시 같은 다홍빛 내장이 입맛을 더욱 돋운다. 게 한쪽을 들어 입에 넣자, 바삭하고 게 껍데기 씹히는 소리 사이로 야들야들한 게살이 물컹 쏟아진다. 짭조름한 간장 맛이 침샘을 자극하자 달착지근한 게살이 입안에 퍼지면서 바다 냄새가 밀려오고, 게살은 땅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첫눈처럼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소화가 안 된다며 죽만 드시던 할머니께 그 좋아하시던 게장이라도 사다 드렸으면 좋았을 것을...... 돌아가신 후에야 후회가 밀려온다. 게살이 별로 없어 먹을 게 없다며 투정하는 손녀에게 야들야들한 게살을 발라 어린 손녀 밥 숟가락에 얹어주시던 할머니, 꿈에서 나마 밥에 물 말아 한 술 뜬 할머니의 밥 숟가락 위에 부드러운 게살을 발라 올려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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