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가장 인간적인 음료발명품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가 뭔지 알아?
친구들과 술자리에 소크라테스라도 온 것인가. 뜬금없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 친구는 조용한 분위기에 만족한 듯 새로 맥주병을 가져왔다. 그런데 병따개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숟가락과 라이터로 맥주병의 뚜껑을 따기 위해 낑낑거렸다.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인간은 병뚜껑을 딸 수 있지만, 침팬지는 못하지!"
이빨로 병뚜껑을 따려던 소크라테스는 결국 인간이 되지 못했다. 어허 불쌍한지고. 오늘은 인류가 어떻게 병뚜껑을 열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이게 다 윌리엄 페인터(William Painter)때문이다. 1892년 그는 '크라운 코르크(Crown Cork)'라고 불리는 병뚜껑을 발명했다. 이는 명백한 원한관계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가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상해버린 음료를 마신 것이 발단이 되었다. 배탈이나 바닥을 구르던 그는 세상의 모든 음료를 봉인하기로 결심한다.
윌리엄 페인터는 병뚜껑을 톱니바퀴 모양으로 만들어 병에 물렸다. 간단하면서도 혁명적인 발명이었다. 사람들은 완벽한 병뚜껑에 환호했다. 이제 김 빠진 맥주나 탄산음료를 마실 일은 없겠구나!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병뚜껑이 너무 완벽한 나머지 누구도 함부로 병을 열지 못했다는 것을.
음료는 대봉인의 시대를 맞는다.
크라운 코르크. 이 완벽한 병뚜껑을 따기 위해 많은 이들이 무기를 챙겼다. 가장 고전적인 형식의 병따개는 1900년대 초에 만들어진 '교회 열쇠(Church Key)'다.
병따개의 이름이 참 홀리 하다. 병따개의 모양이 중세시대 교회의 열쇠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세시대에 맥주와 와인을 책임졌던 교회에 대한 리스펙이 담긴 이름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교회 열쇠는 봉인된 맥주를 구해냈다. 당시는 캔맥주도 병뚜껑 못지않게 악명이 높았는데(캔 뚜껑이 없어서 캔을 완전히 까야했다), 교회 열쇠 하나만 있으면 캔도 열 수 있었다. 주당들에게는 이보다 더 성스러운 아이템이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교회 열쇠는 분실의 위험성이 컸다. 병따개가 대량 생산되어 테이블마다 하나씩 보급된 것은 아주 나중의 일이다(한국에서도 1980년대 이전에는 술집에 병따개가 하나 있을 정도로 귀했다). 사기에는 아까운데, 사두면 잃어버리는 이 계륵 같은 병따개여.
술집 사장님의 입장에서는 분실 염려가 없는 병따개가 필요했다. 아예 병따개를 고정시켜 버리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벽걸이형 오프너(Wall Mounted Openers)'가 나온다. 적어도 벽은 잃어버릴 염려가 적을 테니까.
기존의 상품에 병따개 기능이 추가되기도 했다. 맥가이버 형님이 유행시킨 만능 칼이 그렇다. 정식 명칭은 '스위스 군용 칼(Swiss Army Knife)' 혹은 '캠프용 주머니칼(Camper Knife)'이다. 상당히 오랜 역사를 자랑한 이 녀석은 1900년대에 들어 병따개용 칼날을 장착한다(와인 코르크 용 병따개도 장착된다).
병따개 업데이트를 함으로써 스위스 군용 칼은 못하는 게 없어졌다. 동시에 잘하는 것도 없다는 것이 함정. 병따개 자체의 기능은 쾌적하지 못하다. 그렇게 스위스 군용 칼 병따개는 장착은 되어있지만, 어떤 기능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병뚜껑과 인간의 끙끙사는 1950년대에 들어 종결된다. '바 블레이드(Bar Blade)'가 만들어진 것이다. 길쭉하고 날렵한 디자인은 요즘 사용하는 병따개의 시초가 되었다.
바 블레이드는 맥주 바에서 일하는 바텐더에게 최적화된 병따개다. 직사각형 구멍은 병뚜껑을 오픈하는데 이용된다. 반대편 동그란 구멍은 얼음통에서 맥주병을 들어 올리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바 블레이드는 병 따는 자세나 방법에 따라 효율도 남달라 '스피드 오프너'라고 불리기도 한다.
병따개 시장인 바 블레이드로 통일이 되자 스폰서가 붙었다. 바 블레이드의 평면에 음료회사의 로고나 광고가 들어간 것이다. 거기에 손잡이 부분을 발달시켜 뼈다귀 모양의 병따개가 되었고, 병뚜껑을 따는 부분만 남기는 방향으로 발전을 거듭한다.
지난 50년 동안은 바 블레이드의 시대였다. 하지만 바 블레이드는 여러 병따개의 도전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뽕딱스라는 별명을 가진 '팝 탑 보틀 오프너(Pop Top Bottle Opener)'는 차세대 병따개가 될 확률이 크다.
실린더 형태로 된 이 오프너는 병뚜껑 위에 대고 누르기만 하면 된다. 약간의 테크닉이 들어가야 했던 그동안의 병따개와 비교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하지만 원가가 높을뿐더러, 상용화가 되지 않아 사은품 정도로만 사용되고 있다.
한쪽 손만으로 병뚜껑을 따는 방법도 계속 고안되었다. '그랩 오프너(Gr Opener)'는 한 손으로 맥주병과 병따개를 한 번에 잡아서 열 수 있는 병따개다. 구조도 간단하고 편리하다. 가격도 저렴하다. 하지만 광고를 넣을 면이 적어서 주류회사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브로프너(BROpener)'는 벽걸이형 오프너의 계보를 이어가는 녀석이다. 브로프너는 성냥갑보다 작은 크기의 자석 판이 전부다. 도저히 21세기 병따개라고 생각할 수 없는 단순함이다. 이걸로 대체 병뚜껑을 여느냐고 묻는다면, 주먹이 해결해준다고 말한다.
브로프너의 사용방법은 다음과 같다. 선반이나 벽에 브로프너를 붙인다. 병뚜껑을 브로프너의 위쪽 모서리에 걸친다. 주먹으로 병뚜껑을 내려친다. 모서리 때문에 벗겨진 병뚜껑이 브로프너 자석판에 붙는다. 끝.
굉장히 단순하고 투박한 방식이다. 하지만 이곳저곳 붙여두기에도 좋고. 주먹으로 내려치는 것이 재미있어서 인기를 얻고있다.
윌리엄 페인터가 만든 병뚜껑은 100년이 넘도록 그대로다. 하지만 병따개는 계속해서 변화했다. 기능으로만 본다면 병따개는 목표를 충족한 지 오래다. 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병따개가 쏟아지고 있다. 어째서일까?
바로 쾌감이다. 꽉 막혀있는 병뚜껑을 개봉할 때 '뻥'하고 나는 소리에 매료되는 것이다. 병뚜껑을 여는 일은 지친 일상에서 벗어남을 알리는 전야제 폭죽 같은 역할을 한다. 병뚜껑을 따는 모습이 화려하고, 새로울수록 음료의 맛은 특별하게 느껴진다.
병따개.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이 도구는 놀이의 영역으로 발전한다. 이보다 더 인간적인 도구가 어디 있을까?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화할 병따개의 변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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