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스 맥주기념관을 가다
여행에 맥주는 빠질 수 없다
아니, 맥주 자체가 여행이 되기도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나는 일본을 만화와 드라마로 배웠다. 모니터 안의 일본. 그곳은 맥주에 빠진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식당에 들어가서 음식을 주문하기 전에 생맥주를 한 잔 때리는 나라. 일과를 마치고 도착하면 씻기 전에 맥주 캔을 까는 나라였다. 나도 내년이면 이곳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겠지?
그렇게 마실 맥주도 정했다. '에비스'였다.
수년이 지나서야 도쿄에 왔다. 그 사이 많은 것들이 변했다. 일본의 맥주는 한국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제는. 맥주보다 하이볼과 츄하이가 인기다 이제는. 그럼에도 변하지 않았을 그곳을 찾아 발을 옮긴다. '에비스' 행 티켓을 방금 끊었거든.
이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는 '에비스 맥주기념관'이다. 일본인의 에비스 부심을 가득 느끼는 그곳. 지하철에서 에비스 전통의 광고음악이 들리면 에비스 역에 도착한 것이다.
지역 이름이 맥주 이름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보통 나잇값을 자랑하는 맥주는 지역 이름을 따라 맥주 이름을 짓는다. 하지만 에비스는 맥주 이름을 따서 지역 이름을 '에비스'로 바꿨다. 이게 뭐가 대단하냐고? 우리 지역 이름을 바꿔보자. 카스, 하이트, 필라이트 하나만 골라라... 미안.
에비스의 랜드마크. 에비스 플레이스 가든에 도착했다. 원래는 에비스 생산공장이 있던 곳인데, 이제는 백화점과 레스토랑 그리고 삿포로 맥주 본사가 있었다. 에비스 맥주기념관은 가장 나중에 찾았다. 내가 가자고 한 데로 갔으면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에 갈 뻔했다. 왜 이 위대한 기념관을 건물 구석 지하에 놓은 거지!
...라고 한 말 취소다. 에비스 맥주기념관은 이곳에 위치해야만 했다. 에비스 맥주공장의 구릿빛 증류기가 기념관 한가운데 위치해있기 때문이다. 동그란 라운지, 검붉은 카펫, 높은 천장과 노란 조명. 나 빼고 모든 것이 멋져 보이는 이곳에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에비스 맥주기념관은 크게 '에비스의 역사'를 소개하는 곳과 '에비스를 시음'하는 곳으로 나뉘어 있다. 당연히 시음하는 공간으로 날아가고 싶었으나 교양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에비스 나이가 몇이요? 128살이라고. 죄송합니다 어르신.
직원은 가이드 투어를 추천했다. 난 고개를 저었다.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한국어로 적힌 가이드 종이를 줬다. 나는 한국말도 잘 못 알아먹는 녀석이지만 감사히 받았다.
에비스의 역사를 보며 다른 일본의 맥주와 비교해보았다. 다른 곳들은 어떻게 생산하는지를 중요시하는데 여기는 박물관의 성격이 강하다. 그동안 일본 맥주들이 드라이맥주나 발포주로 변해서 맛과 원가를 줄였다면, 이 녀석은 130년 동안 만드는 방법을 그대로 유지해왔다. 일본판 맥주 장인정신이랄까?
사실 가장 즐거웠던 것은 전설의 에비스를 보는 것이다. 다른 건 아니고 도미가 두 마리 들어있는 에비스다. 몇 백 병 당 하나 꼴로 나온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보다니 감회가 새롭다. 역시 콜렉터의 마음을 가지고 놀 줄 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만화 에반게리온에 등장한 에비스를 보여준다. 역시나 콜렉터가 덕후임을 알고 있다. 역시 덕후의 나라.
도미 두 마리와 에반게리온으로 역사를 끝내버리고(?) 에비스 시음코너로 달려갔다. 이곳의 입구에는 자판기가 있었다. 엔화를 에비스 코인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일본도 역시나 코인판인가(아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코카콜라 스토어에서 돈을 너무 썼다. 그렇다면 남은 돈은 이곳에 올인이다.
그렇게 에비스 코인을 짤랑짤랑하고 다녔는데, 이걸로는 에비스 맥주와 음식만 먹을 수 있다는 게 함정이었다. 에비스가 그려진 컵과 에코백은 그냥 천장에 달린 굴비 같은 것일 뿐. 이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화폐에 뛰어들면 안 되는 것이다. 눈물 섞인 에비스나 마시러 가야지.
에비스 맥주기념관의 맥주 코너에는 맛의 종류별로 맥주 서버가 존재했다. 맥주를 잔에 따르는 과정도 정말 멋졌다. 잔에 한가득 거품이 넘치게 따른 다음 위에 있는 거품을 탁 걷어내는 방식이다. 맥주 따르기의 인간문화재 같은 느낌. 섣불리 따라 했다가는 바닥 청소하느라 거품을 물 느낌.
샘플러로 나오는 에비스 3잔과 에비스 마이스터를 시켰다. 맛 별로 잔을 달리 한 배려도 너무 좋았다. 뒤에는 이 음료에 대한 설명이 써져 있었다(물론 읽기를 포기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에비스를 마신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야자시간을 일본 드라마로 채웠었다. 그것을 마시는 순간이다. 맛있다. 별 다른 말이 필요할까. 나는 이 한마디를 위해 이토록 멀리 달려온 것이구나.
세상은 새로운 것을 원하지만, 여전하기 때문에 더욱 멋진 것들이 있다. 에비스가 그렇다. 다른 것들은 변해도 에비스만큼은 그대로였으면 하는 마음이 에비스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자주는 마실 수 없지만 특별한 날, 돌아올 수 있는 안식처 같은 맥주다.
콜라에서 시작된 여행이 맥주에서 마무리되었다. 음료만 가지고도 공간과 문화를 이해하는 게 새로운 경험이 아닐까? 여행이란 애초에 온종일 마셔대도 부족한 일정. 여기에서 끝났다고 걱정(환호) 마시라. 못 마신 녀석들은 캐리어에 가득 넣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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