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 슈만의 두 자아를 생각하며

by 메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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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신협의 간부였습니다. 상임감사로 은퇴하신 아버지는 바깥에서는 늘 친절한 분이셨습니다. 사람들을 잘 챙기고, 누군가를 돕는 데도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오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곤 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화를 자주 냈고, 우리 형제들에게는 늘 엄격했습니다. 부엌에서 일하시던 어머니가 가끔 혼잣말처럼 “사람들이 아버지 실체를 봐야 되는데…” 하고 중얼거리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말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 왜 바깥의 얼굴과 집 안의 얼굴이 저토록 다를까. 한때 영화 「헐크(Hulk)」를 보며 아버지를 떠올린 적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멀쩡하고 차분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화가 나면 전혀 다른 얼굴로 변하는 인물. 어린 내 눈에는 밖에서의 아버지와 집 안에서의 아버지가 너무 다르게 보여서,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아버지의 문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 역시 내 안에 서로 다른 얼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의 나는 무척 열정적이고 집요하며 쉽게 밀리지 않습니다. 그때는 세상일이 다 해볼 만하고, 웬만한 어려움쯤은 밀고 나갈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반대로 어떤 날의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잘못된 일들이 모두 내 탓처럼 여겨집니다. 괜히 지나온 시간이 초라하게 보이고, 삶이 공연히 덧없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같은 사람인데도, 같은 사람 같지 않은 순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아버지를 보며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그 낯선 얼굴들이, 돌아보니 내 안에도 있었습니다. 사람은 하나의 마음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은 아마 그 무렵부터였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의 한쪽 얼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들에 오래 눈길이 갔습니다.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Psycho)」처럼 한 인간 안의 균열과 분열을 건드리는 작품들이 왜 오래 남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한 가지 표정으로만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남에게 보이는 얼굴이 있고, 혼자 있을 때 드러나는 얼굴이 있고, 스스로도 다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의 결이 있습니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이라는 이름 앞에서 내가 오래 멈추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자기 안의 상반된 기질을 플로레스탄(Florestan)과 오이제비우스(Eusebius)라는 두 인물로 자주 형상화했습니다. 플로레스탄은 격정적이고 행동적이며 바깥으로 밀고 나가는 힘을 상징했고, 오이제비우스는 내향적이고 사색적이며 안으로 가라앉는 면을 상징했습니다. 한 사람 안에 함께 살아가는 두 자아를 그렇게 이름 붙여 불러냈다는 사실이 내게는 오래 남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특별한 병증이라기보다, 한 인간 안에서 서로 다른 기질이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 함께 살아가는 방식처럼 느껴집니다.


생각해보면 이 이름들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 안에나 바깥으로 밀고 나가는 마음이 있고, 다시 안으로 물러나 스스로를 의심하는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어떤 날은 플로레스탄이 앞에 서고, 어떤 날은 오이제비우스가 더 크게 자랍니다. 문제는 어느 하나가 거짓이고 어느 하나가 진실인 것이 아니라, 그 둘이 모두 한 사람 안에 함께 살아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쉽게 단정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바깥에서 강한 사람이 집 안에서는 약할 수 있고, 남을 밀어붙이던 사람이 어느 날 자기 자신에게는 한없이 가혹해질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친절이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고, 누군가의 차가움만을 그 사람의 전부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대개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삶은 늘 하나의 얼굴로만 흘러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의 하늘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낮게 깔린 흐림 사이로 빛이 잠시 스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맑아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흔히 안개가 걷히고 마음이 정리된 상태만을 괜찮은 상태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늘 그렇게 또렷하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개와 햇살이 함께 머무는 그 모호한 상태가 삶의 더 정확한 얼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는 『데미안(Demian)』에서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라고 썼습니다. 그 문장을 읽을 때마다, 사람은 자기 안의 여러 마음을 다스리며 사는 것이 아니라 끝내 다 이해하지 못한 채 함께 데리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가 집 안에서 보여주던 날 선 모습도, 내 안에서 불쑥 고개를 드는 비루함도, 한쪽만 떼어내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것들 역시 나라는 사람, 혹은 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밖으로 솟아 나오려 애쓰는 과정에서 생긴 흉터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 안의 서로 다른 마음들을 억지로 다스리거나 외면하지 않으려 합니다. 강하게 밀고 나가는 마음도 나이고, 문득 모든 것이 내 탓처럼 느껴지는 마음도 나입니다. 뜨겁게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는 마음과, 조용히 물러나 자신을 의심하는 마음이 서로 충돌한다고 해서 그 삶이 잘못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불협화음을 너무 서둘러 지우려 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흐린 하늘 아래에서 시작하는 하루도 하루입니다. 안개가 남아 있어도 길은 보이고, 비가 조금 내려도 아침은 지나갑니다. 사람 마음도 그와 비슷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깨끗이 정리된 뒤에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흐린 채로, 어떤 날은 모호한 채로, 어떤 날은 내 안의 두 마음을 다 안고도 하루를 건너가야 합니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날의 당혹감도,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여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 안에 함께 사는 서로 다른 얼굴이 그저 이상하거나 부끄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 것 같습니다. 사람은 끝내 하나의 표정으로만 살아내지 못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하게 맑아진 마음이 아니라, 안개를 안개인 채로 두고도 하루를 살아내는 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굳이 다 걷어내지 않아도 좋을 마음들이 있습니다. 선명하지 않아도, 정리되지 않아도, 그 모호함 자체로 이미 내 삶의 일부인 것들 말입니다. 나는 이제 그것들을 조금 덜 두려워하려 합니다. 내 안의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가 서로 밀어내지 못한 채 함께 살아가는 시간을, 그것이 삶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조금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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