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말보다 함께 만든 음악으로 회복한 관계

Brahms : Double Concerto

by 메이슨
브람스 이중협주곡2.jpg (브람스(좌)와 요하임(우))

어젯밤 많은 사람은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Islamabad)에서 마주 앉은 미국과 이란의 첫 대좌를 지켜보며, 적어도 이번에는 아주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승리보다 종식을 먼저 바라게 되고, 강한 말보다도 다시 같은 자리에 앉는 장면 하나에 더 큰 기대를 걸게 됩니다.


한 번의 만남으로 모든 것이 풀릴 것이라고 믿기는 어려웠겠지만, 처음으로 마주 앉았다는 사실, 아직 대화를 아주 끊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점은 ‘화해’의 시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희망을 조심스럽게 남겨두었습니다.


물론 결과는 기대만큼 가볍지 않았습니다. 협상은 곧장 매듭지어지지 못했고, 긴장은 다시 높아졌다는 소식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는 결렬이라는 단어보다, 그래도 한 번은 마주 앉았다는 그 사실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아주 멀어진 사이일수록 완전한 합의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어쩌면 다시 말을 끊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 국가와 국가 사이도 처음부터 큰 화해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끝났다고 단정하지 않고, 다시 마주 앉을 가능성을 남겨두는 일. 그 자체가 이미 쉽지 않은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 끝에 떠오른 것은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의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협주곡 A단조(Double Concerto for Violin and Cello in A Minor, Op. 102)」입니다. 이 곡을 생각하면 늘 마음 한쪽이 조용히 움직입니다. 단지 아름다운 협주곡 한 곡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멀어진 관계를 다시 움직이게 한 한 사람의 방식, 그리고 말로는 다 닿지 못하는 마음이 때로는 함께하는 일 속에서 조금씩 회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함께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브람스와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은 한때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였고, 음악적으로도 깊이 연결된 동지였습니다. 요아힘은 젊은 브람스를 일찍 알아본 인물이었고, 그의 음악을 연주하며 세상에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이일수록 작은 균열은 더 깊은 상처로 남는 법입니다. 1880년대 초반, 요아힘의 부부 문제에 브람스가 어설프게 개입한 일은 결국 오랜 우정을 크게 흔들고 말았습니다. 브람스는 중재하려 했을지 모르고, 순간의 감정으로 말을 보탰을지 모르지만, 상대에게는 그것이 배신처럼 남았습니다. 오래 마음을 나누었던 사람 사이에 생긴 침묵은 낯선 사람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더 무겁습니다.


브람스 역시 그 무게를 오래 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길게 해명하거나 감정을 앞세워 관계를 풀어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가 택한 것은 사과의 문장이 아니라, 다시 함께 음악을 하자는 제안을 건네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이중협주곡입니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번갈아 말을 꺼내고, 때로는 부딪히고, 때로는 상대의 숨을 기다리듯 여백을 두다가 다시 하나의 흐름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닮아 있습니다.


바이올린이 더 밝고 선명하게 선을 그으면, 첼로는 조금 더 깊고 낮은 자리에서 그것을 받아 안습니다. 그 움직임을 듣고 있으면, 누가 더 앞에 서느냐보다 끝내 함께 가느냐가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브람스가 요아힘에게 내민 것도 바로 그런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내 말을 이해해달라”는 설득보다, “다시 나와 같은 곡 안에 머물러달라”는 제안. 말은 오해를 남길 수 있지만,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시간은 적어도 서로의 호흡을 다시 듣게 만듭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자꾸 오늘의 세계를 떠올리게 됩니다. 아주 멀어진 사이일수록 결국 마지막까지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승리도, 상대의 굴복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다시 마주 앉는 일이고, 다시 듣는 일이며, 다시 함께 무언가를 해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브람스와 요아힘에게 그것은 음악이었고, 오늘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협상의 지속일 것입니다.


오늘 아침도 맑습니다. 완연한 봄날 아침입니다. 아파트 뜰의 녹색 잎들이 하루아침에 분명한 풍경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관계의 회복도 이와 다르지 않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은 요란하게 시작되지 않고, 대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금씩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비로소 눈앞에 드러납니다.


이런 아침에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남긴 문장이 떠오릅니다. 1903년에 쓰인 이 편지는 흔히 네 번째 편지로 소개되는데, 백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읽어도 마치 오늘의 우리에게 건네는 말처럼 다가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저는 당신의 마음속에 아직 풀리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 인내해 주시기를, 그리고 마치 굳게 잠긴 방들이나 아주 낯선 언어로 쓰인 책들을 대하듯 그 질문들 자체를 사랑해 보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그 답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지금 당신은 그 답을 받아도 그것을 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살아내는 일입니다. 지금은 그 질문들 속에서 살아가십시오.”


오늘의 맑은 아침이 내게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릴케의 말처럼 우리가 그 ‘질문들’을 함께 살아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맑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다 풀렸다는 뜻이 아니라, 흐린 시간을 지나 아직은 더 나아질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브람스와 요아힘이 그랬듯, 한 번의 말보다 함께 만든 일이 관계를 다시 움직였듯, 오늘의 세계도 대화를 끊지 않고 협상을 이어가며 다시 평화 쪽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브람스의 음악이 내게 남기는 것은 결국 그 믿음입니다. 화해는 한순간에 선언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 관계는 때로 사과의 말보다 함께하는 일 속에서 더 깊이 회복되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멀어진 사이일수록 마지막까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은 다시 함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라는 것.


오늘의 맑은 하늘과 가지 끝의 연한 녹색 잎들을 바라보며, 나는 그 조용한 가능성을 다시 생각합니다. 부디 오늘의 세계도 파국보다 대화에 조금 더 가까운 쪽으로 흘러가기를, 협상이 이어지고 언젠가는 평화라는 이름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마침)


음악감상 : Brahms : Double Concerto/Anne-Sophie Mutter, Maximilian Hornung

https://youtu.be/5OjLKhmzQTA?si=LqRsD485UV40ig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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