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기술과 문명의 바탕에는 서로 같은 뜻으로 읽기 위해 다듬어진 '오래된 약속'이 있습니다.
오늘날 노트북은 스마트폰과 연결되고, 날씨를 알려주며, 결제까지 해냅니다. 우리는 이를 편리함이라 부르지만, 그 바탕에는 아주 오래된 약속이 깔려 있습니다. 누군가 정해놓은 규칙, 누구나 같은 뜻으로 읽을 수 있는 문장, 즉 서로 달라도 함께 이해할 수 있도록 다듬어진 공통의 질서 말입니다.
인류의 발전은 늘 이런 약속 위에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수를 세고, 길이를 재고, 계절을 기록하던 작은 계산들이 쌓여 농업을 가능하게 했고, 다시 산업혁명과 정보기술의 발전, 그리고 지금의 AI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힘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서로가 함께 읽을 수 있도록 다듬어진 약속의 문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이탈리아의 수학자 주세페 페아노(Giuseppe Peano)가 세상을 떠난 지 94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는 숫자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던 숫자를, 누구나 같은 뜻으로 읽을 수 있도록 더 분명한 규칙과 문장으로 다듬으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889년 자연수의 성질을 정리한 페아노 공리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또 수학의 기초를 다지고, 논리와 수학적 표기를 더 엄밀하게 다듬는 데에도 중요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페아노 곡선 역시 그의 이름을 오래 남긴 업적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에게서 더 크게 보게 되는 것은 공식 그 자체보다, 그가 지키려 했던 태도입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도 사람들은 이미 숫자를 세고 계산을 해왔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그것이 새로운 숫자를 발명한 데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서로 다르게 말하지 않도록 정리하고, 감으로 이해하던 수학을 함께 확인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로 다듬으려 했다는 데 있었다고 봅니다.
이 점은 우리 삶과도 닮아 있습니다. 중학교 교실을 떠올려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같은 수학 문제를 푸는데 어떤 학생은 기호를 제멋대로 바꾸고, 어떤 학생은 풀이 순서를 마음대로 섞고, 또 어떤 학생은 같은 뜻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적는다면 금세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누가 맞고 틀린지를 따지기 전에 먼저 필요한 것은 함께 알아들을 수 있는 약속입니다. 페아노는 바로 그 약속의 가치를 믿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사실을 보고도 각자의 문법으로만 말하면 뜻은 흩어지고 오해는 쌓입니다. 기준이 제각각이면 대화는 부딪힘이 되고, 함께 세워야 할 가치는 흔들립니다. 공부도, 일도, 공동체도 함께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문장이 있을 때에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함께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신뢰입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모든 것이 촘촘하게 연결되는 시대일수록 각자의 기준만을 고집해서는 오래갈 수 없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빨라져도 공통의 규칙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또 다른 혼란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화려한 기술보다, 서로가 신뢰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통의 문법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만큼이나, 이미 있는 것을 모두가 함께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은 중요합니다. 흩어진 생각을 약속으로 바꾸고, 표현을 공통의 문장으로 다듬는 조용한 작업이 문명을 움직여 왔습니다. 주세페 페아노가 남긴 유산도 제게는 바로 그렇게 읽힙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만큼이나, 이미 있는 것을 모두가 함께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 말입니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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