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vorak - Cello Concerto, Op. 104
맑게 갠 봄 아침, 꽃이 흐드러진 들판 앞 복숭아나무에 꽃은 사람의 마음은 더 조용한 그리움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오늘 아침, 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ín Dvořák)의 첼로 협주곡 B단조 Op.104를 세계적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가 협연한 장한나씨가 지휘하는 디토 오케스트라의 예술의 전당 공연영상을 감상합니다.
오늘 아침은 참으로 맑습니다. 어제 잠깐 내린 비 탓인지 초여름 같았던 지난 주말의 기운이 한풀 꺾였고, 공기는 다시 완연한 봄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산책하기에 참 좋은 날입니다. 이런 아침에는 세상이 지나치게 빠르지 않게 느껴집니다. 들판의 꽃도, 나무 끝에 막 올라온 연한 잎도,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이는 햇빛도 무엇 하나 서두르지 않는 듯 보입니다.
어제 스쳐간 비가 공기 속의 먼지를 한 번 씻어낸 덕분인지, 아침 풍경은 한결 또렷하고 부드럽습니다. 이렇게 맑은 봄날 아침에는 세상이 조금 느리게 흘러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빨리 피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차례를 알고 제 속도로 살아가는 것들 앞에 서 있으면 사람도 잠시 마음을 늦추게 됩니다.
전국 최대 과일 주산지 가운데 하나인 충북 충주시의 들녘에 복숭아꽃과 사과꽃, 배꽃이 흐드러졌다는 소식을 접하며 제 마음도 어느새 그 풍경 곁으로 가 있었습니다. 나지막한 구릉을 따라 이어진 과수원마다 연분홍과 흰빛이 번져 있었을 것이고, 그 사이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덩달아 느려졌을 것입니다.
그런 장면을 떠올리고 있노라면 문득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B단조 Op.104가 생각납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곡으로 알려져 있지만, 제가 이 곡에서 먼저 듣게 되는 것은 눈부신 기교보다도 그 안에 스며 있는 사람의 숨결과 바람 같은 호흡,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선명해지는 그리움입니다.
꽃이 많다고 해서 마음까지 마냥 환해지는 것은 아니고, 맑게 갠 아침이라고 해서 사람의 생각까지 가벼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좋은 날일수록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던 생각 하나가 더 조용히 떠오르곤 합니다.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은 제게 늘 그런 음악입니다. 봄날의 빛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사람의 체온과 그리움, 늦게 돌아오는 감정의 결까지 함께 안고 있는 곡입니다.
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ín Dvořák)는 이 협주곡을 1894년 11월부터 1895년 2월까지 미국 뉴욕에 머물던 마지막 시기에 썼습니다. 이후 귀국한 뒤 1895년 5월과 6월 사이 결말을 손질해 지금의 형태를 완성했습니다. 작품은 1896년 3월 19일 런던에서 레오 스턴(Leo Stern)의 독주와 드보르자크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습니다. 이 곡은 단순히 유명한 협주곡 한 편을 넘어, 미국 체류 말기의 향수와 피로, 고향 보헤미아에 대한 갈망, 그리고 개인적인 상실의 감정이 겹쳐 빚어진 말년의 걸작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드보르자크가 본래 첼로를 독주 악기로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첼로가 높은 음역에서는 칭얼대고 낮은 음역에서는 웅얼거린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 그가 1894년 가을, 갑자기 이 곡을 쓰기 시작하며 친구에게 "나 자신도 왜 이런 일을 시작했는지 놀랍다"는 편지를 남겼습니다.
작곡가가 스스로 망설였던 악기에서 가장 깊고 인간적인 목소리를 길어냈다는 점은 이 작품을 더욱 특별하게 만듭니다. 이는 악기의 한계를 증명한 것이 아니라, 그 한계라고 여겨졌던 지점을 드보르자크가 뜨거운 예술성으로 정면 돌파해 버린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협주곡의 이면에는 세 명의 인물이 놓여 있습니다. 곡을 써달라고 오랫동안 요청해 온 체코의 첼리스트 하누슈 비한(Hanuš Wihan), 드보르자크에게 창작의 자극을 주었던 빅터 허버트(Victor Herbert), 그리고 무엇보다 깊은 곳에 자리한 처형 요세피나 카우니 초바(Josefina Kaunitzová)입니다.
드보르자크는 첫사랑 이기도 했던 요세피나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그녀가 좋아하던 자신의 가곡 선율을 2악장에 인용했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3악장 끝부분을 다시 손보며 긴 작별의 인사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이 곡의 마지막은 찬란한 승리가 아니라, 눈부심을 조금 거둔 채 기억의 저편으로 돌아서는 고결한 여운으로 끝을 맺습니다.
브람스가 이 곡의 악보를 보고,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자신도 첼로 협주곡을 썼을 것이라고 감탄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낭만주의 협주곡의 정점에 놓이면서도 독주자의 기교 과시에 머물지 않고,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대지 위로 흐르는 인간의 목소리를 끝내 놓치지 않았기에 가능한 찬사였을 것입니다.
https://youtu.be/h82Nq6RV4FQ?si=OOCactUIkqH-I4oo
제1악장(Allegro)은 첼로가 바로 등장하지 않고 오케스트라가 먼저 넓은 풍경을 펼쳐 보입니다. 목관과 현악, 금관이 차례로 주제를 세워가며 이 곡이 하나의 거대한 서사임을 예고합니다. 독주 첼로가 들어오는 순간 무대의 공기는 일순간 바뀝니다.
마치 오래 참아온 말을 마침내 꺼내는 첫 문장처럼, 첼로의 음색은 두텁고 깊게 파고듭니다. 드보르자크는 첼로의 중음역대를 특히 아름답게 활용해 사람의 가슴에서 나오는 말과 노래가 만나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냅니다. 풍성한 오케스트라 편성이 첼로를 짓누르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게 떠받치는 균형감은 이 곡의 큰 미덕입니다.
제2악장(Adagio ma non troppo)은 이 곡의 심장입니다. 단순히 느린 악장이 아니라, 소리를 서두르지 않는 악장입니다. 요세피나를 향한 그리움이 스며든 가곡 선율이 흐를 때 음악은 달콤함을 넘어 이별의 그림자까지 함께 드리웁니다.
첼로가 길게 숨을 이어가는 동안 목관은 조용히 응답하고, 현악은 그 숨이 끊어지지 않도록 받쳐줍니다. 첼로의 음색은 바이올린의 빛보다는 사람의 체온에 더 가깝습니다. 드보르자크는 그 체온을 통해 슬픔과 위로, 애틋함을 함께 전합니다. 봄날 꽃을 보다가 문득 떠난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그 묘한 감정의 시간을 닮아 있습니다.
제3악장(Finale: Allegro moderato)은 전진하는 기운으로 시작하지만, 단순한 영웅담으로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첼로는 끊임없이 뒤를 돌아보고, 오케스트라도 마냥 돌진하지 않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덧붙여진 고요한 코다는 환호보다는 추모에 가깝습니다. 크게 외친 뒤에 침묵할 줄 아는 품위, 그것이 이 곡을 완성하는 힘입니다.
연주자 소개: 스승과 제자의 뜨거운 해후
2023년 9월 24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무대는 지휘자 장한나가 11년 만에 한국에서 스승 미샤 마이스키와 함께한 투어의 대미였습니다. 1부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 2부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로 구성된 이 무대는 그 자체로 깊은 상징성을 지닌 공연이었습니다.
장한나는 열한 살에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던 첼리스트에서, 이제는 세계 주요 악단을 이끄는 지휘자로 성장했습니다. 그녀는 마이스키와의 만남을 삶을 바꾼 사건으로 꼽고, 마이스키 또한 그녀를 유일한 제자로 아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첼로라는 악기의 메커니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지휘자라는 점에서, 그녀의 지휘는 협주곡의 결을 더욱 섬세하게 빚어냈습니다.
미샤 마이스키는 강렬한 서정성과 뜨거운 음색으로 기억되는 거장입니다. 로스트로포비치와 피아티고르스키라는 두 전설을 모두 사사한 유일한 첼리스트로 자주 언급되며, 악보를 정교하게 재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체온을 불어넣어 음악을 살아 있게 만듭니다. 드보르자크의 비탄과 회상, 결기와 애틋함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의 첼로는 더욱 깊은 설득력을 가집니다.
디토 오케스트라는 젊고 역동적인 에너지로 독주자와 지휘자의 호흡을 든든하게 받쳐주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반주자가 아니라, 첼로의 목소리를 둘러싼 숲과 하늘, 바람과 대지의 풍경이 되어 곡 전체의 세계를 완성했습니다.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은 흔히 첼로 음악의 최고봉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이 곡이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 까닭은, 큰 소리를 내면서도 끝내 사람의 마음을 놓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맑게 갠 봄 아침, 과일꽃이 흐드러진 들판을 떠올리며 이 곡을 듣는 일은 무척 잘 어울립니다. 세상은 이토록 눈부시게 피어 있는데, 우리 마음 한쪽에는 말로 다 못할 그리움이 남아 있는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드보르자크는 바로 그 틈을 알고 있었던 작곡가였습니다. 찬란함과 그리움, 오늘과 어제를 한 곡 안에 함께 담아낸 그의 음악은 봄날을 더 밝게 만들기보다, 그 밝음 속에 숨어 있는 우리의 복잡한 마음을 가만히 어루만져 줍니다.
잘 피어난 꽃을 보면서도 조금 쓸쓸해질 수 있는 사람,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잠시 뒤를 돌아보게 되는 사람에게 이 곡은 깊은 위로가 됩니다. 오늘 같은 맑은 봄날 아침,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 선율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충주의 복숭아꽃 향기처럼 오래 머물기를 바랍니다.(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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